눈이 곧 떨어질 듯하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인데도 새벽녘처럼 어둡다. 함박눈이 잠시 내렸으면 좋겠다. 어수선해진 마음이 하얀 눈송이에 어느 정도 진정이 될지도 모른다. 창으로 보이는 바깥에는 자동차들이 쉴새없이 오가고, 움추린 사람들이 간간이 보인다. 많은이들이 서울 복판에 모이기로 예정된 날이다. 눈이 내릴 양이면, 차라리 오늘밤 늦게 펑펑 쏟아져도 괜찮을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순결한 희망을 한껏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날이 오기를 바란다.
몇 십 년 전에도 그랬다. 예비고사를 며칠 앞두고 갑자기 그가 죽었다. 정치상황에 관심이 많았던 마음에 너무 이른 봄이 찾아왔다. 막바지 시험 준비에 웃음조차 잊은 분위기에서도 웅성거림도 있었다. 기숙사를 떠나야 하는 이별의 아쉬움도 컸다. 그 해, 유난히 일찍 추위가 찾아왔다. 아직 물들지 않은 잎들이 얼어버렸다. 짐을 싸들고 나서는 허름한 숙소 앞에는 포플러 잎사귀들이 심하게 나뒹굴었다. 친구들의 얼굴에는 더욱 무거운 긴장감이 보였다. 눈물을 감추려 해도, 찬바람의 재촉에 뺨이 젖었다. 작은 가슴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그리고 꽤 중요한 시험에 대한 중압감,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과 서러움이 뒤엉켰다.
삼십칠 년이 흘렀다. 한 세대에 해당되는 시간이다. 그 아비에 그 딸의 시대다. 어수선한 날들이 이어지고, 사람들은 희망의 촛불을 들고 모여든다. 그 긴 시간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긴 역사에 견주면 그리 길다고 할 수 없겠으나, 한 인생에는 반에 해당된다.
수십 년 전 아비의 시대에 어울렸던 그 얼굴들을 다시 보았다. 역시 찬바람이 불었다. 한 세대를 지나, 그때의 어린 친구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붐비는 지하철에서의 갑갑함도 잊었다. 어떻게 첫인사를 나눠야 하는지 등등으로 마음이 설렜다.
널찍한 방에 앉아 있는 중년의 얼굴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그 중 익숙한 두 모습을 보고서야 제대로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짧은 순간이지만 정신을 차려 둘러본다. 그 때의 그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부분 이름까지 떠오른다. 어떻게 인사를 나눴는지는 모르겠다. 정해준 자리에 앉고 나서야,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바로 옆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녀석이 있어서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반가움과 설렘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분위기는 들뜬 목소리로 달아오르고, 조금 늦은 친구들이 들어설 때마다 환영의 인사는 차라리 아우성이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보기만 해도 반갑고 즐거웠다. 검은 교복, 벙거지 모자, 좁은 책상 등등이 연상되다가, 마주 보면, 눈앞에 허연 머리에 늙어가는 모습이 낯설었다. 세월의 양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 속에 담긴 나름대로의 사연들이 가득하겠지만, 그냥 한 세대를 뛰어넘어 오락가락한다.
반창회 얘기다. 그 동안 동창회와 반창회에 몇 번 자리한 적이 있다. 자리와 참석 범위가 넓은, 공식성을 띤 의례가 갖춰진 자리에서의 즐거움은 사실 그리 크지 않다. 골프 모임은 이제 말 그대로 월례회가 되어 익숙해졌고,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 반창회는 오랜만이다. 굳이 반창회까지야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번의 반창회에 대한 감회가 색다르다. 나이가 더 들어서 그럴 것이라고 해석을 해보지만, 역시 보고 싶은 얼굴들을 볼 수 있어서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좁은 공간에서 같은 짓을 똑같이 했던 옛날의 그 사람들과는 얘기꺼리가 많다. 같이 한 시간이 소중한 모양이다. 그들의 기억에 내가 있고, 내 머리에 그들이 있다. 하나씩 꺼내어 펼치면, 모두 그 통속이다.
지금의 자리와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옛 녀석을 찾아보는 것이라 좋다. 마음을 쓰는 예의도 무시되고, 그때의 면면을 들추어내는 것이 주고받는 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서로가 서로를 이끌고 옛날로 돌아간다. 하얀 머리카락 아래 주름진 얼굴로 각기 지금의 제 자리에 서면, 근엄하게 다듬어진 꼴에 말투조차 권위스러울 텐데, 오십 중반의 모양으로 고삐리 노릇을 하니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재미의 정도는 웃음소리의 크기로 나타난다. 소곤소곤이라는 꾸밈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한껏 끄집어 올려 핏대를 세우지 않은 목소리로는 대화가 어렵다. 끊임없이 터지는 웃음소리가 말보다 더 많다. 그저 재미있다고 할 수밖에,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다.
살아 있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들었다. 내가 할 말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 내놓지 않았다. 이제 오십 중반인데. 그러면서 앞서 간 몇몇 친구들이 떠올랐다. 또 자리에 오지 못한 친구들을 꼽아봤다. 다시 속으로 인사를 한다. 살아 있어서 고맙고, 나와 주어서 고맙다. 제 스스로는 자신을 잘 보지 못한다. 네가 있어서 내가 보이고, 내가 있어야 너도 보일 것이다.
시간의 양은 절대적이지 않다. 어린 시절의 삼 년은 지금의 십 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세월이다. 그 긴 시간을 같이 했던 서로, 나를 담고 있는 네가, 너를 담고 있는 내가 어울려, 너는 나를 내놓고, 나는 너를 내놓는 짧은 만남이 정말 소중하고 재미나다. 늦가을의 앙상한 나뭇가지마냥 매마른 삶에 청춘의 뜨거운 열정과 패기를 불어넣는다. 나이가 열인지, 쉰인지 혼란스럽다.
창밖에 눈송이가 보인다. 그 밀도가 더해간다. 늦저녁에 오기를 바랐는데, 어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겠나보다. 그냥 차분해진다. 문학소년이 된 것처럼, 감수성이 한껏 살아난다. 친구들과 나눈 즐거움에 눈송이가 더해져 마음이 해맑아진다.
눈이 내리더라도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촛불이 모든 사람의 희망을 더욱 돋우고, 많은 사람이 함께 한자리에 모여 서로 가슴속의 분노와 응어리를 녹여주기를 바란다. 흰눈은 그 희망에 순결함을 더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