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그다지 충실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왜 그 순간 가장으로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지금도 아리송합니다.
아마 굳이 이유를 대자면 어줍잖게 마신 막걸리 한통의 위력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때는 바야흐로 오후 10시 30분을 막 넘어서던 순간이었습니다.
질풍노도의 소녀답게 중학교 2학년인 막내 딸 예랑이가 친구들하고 카톡을 하다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그 시간 나가야겠다고 허락을, 아니 통보를 엄마 아빠에게 전합니다.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아내는 아녀자 특히 15살 소녀가 그 시간 집 밖으로 외출하겠다는
그 선언을 외계인의 메시지인양 도무지 해독하지 못했고 당근 다소 커다란 목소리로 “너, 미쳤어 안돼!”라고 선언했지요.
하지만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랑이는 이미 나가야겠다는 결사항전의 자세로 눈빛에 힘을 주고 있었고,
엄마 아빠의 반대에도 굳이 나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거냐는 단호한 질문에 예랑이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네!” 라고 힘차게 대답을 했기에 나는 가장으로서 그럼 아빠랑 같이 가자면서 예랑이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물론 그 상황에서 내가 딸아이 친구들하고 만나 달밤에 야그를 나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주장만큼이나 설득력이 없는 것이었고, 결국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그저 딸 아이를 배웅해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기다람은 시작되었습니다.
54살 나이 먹도록 순진하기 그지없는 나로서는 딸아이가 잠깐 이야기만 나누고 오겠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1시간만 기다리면 아주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예랑이를 기다렸다 만나 함께 들어가는 보기 드문 감동 스토리 하나
만들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예랑이를 보낸 그 버스 정류장에서 그대로 기다리기로 전격 결정한 것이었지요.
기다리다 다소 심심해지도 했거니와 날씨도 제법 쌀쌀했던 까닭에 나는 예랑이가 만나기로 했다는 간호 전문대 교정으로
슬며시 찾아갔습니다.
나란 존재를 들키지 않을 요량으로 잔뜩 몸을 건물 담벼락에 밀착시킨 채 탐정처럼 접선하기로 한 그 장소에 갔는데
반투명 비닐 창밖 같은 텅 빈 풍경만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물 수제비가 찰랑 수면에 파문을 짓듯이 내 마음 속에는 순간 걱정이라는 동심원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이 장소가 맞는데 도데체 어디로 간 걸까 나는 12시에 사라진 신데랄라를 찾는 마음으로 이곳 저곳을 찾아
다녔지만 허사였습니다.
결국 도로 집앞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와 하염없이 딸아이 예랑이를 기다립니다.
저 멀리 휘황찬란하게 빛나던 빨간 십자가들도 이젠 잠들 시간이 되었는지 스르륵 꺼져버리고
남은 불빛은 슈퍼 불빛과 가로등 불빛 뿐입니다.
밤 하늘에 치렁치렁 쏟아지는 별빛 만이 네게 말을 걸어옵니다.
우리 동네 북두칠성은 거꾸로 매달린 채 하염없이 북극성을 향한 구애의 하트를 쑝쑝 날리는데 꼭 내 처지랑 비슷합니다.
그런데 저 별빛들은 지구를 연모해 달려온 세월이 몇백광년입니까?
나는 도무지 그 아득한 영겁의 시간앞에 작아지며 내가 기다리는 2시간 남짓의 사랑은 천년의 사랑 혹은
광년의 사랑앞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지 느끼며, 다시금 용기를 얻어 봅니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슬슬 내 마음은 분노 모드로 바뀝니다.
이 자식이 이럴 때 짠하고 나타나줘야 뭔가 폼나고 아빠 사랑이 감동적인거 아니냐고 주장할텐데 도무지
나타날 생각을 안하니 화가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데체 몇십대의 마를 버스가 지나쳐 간 걸까요?
나는 또 버스가 올 때마다 무심한 척 얼마나 많은 레이져 눈빛을 보냈던지요....
이러면 내 마음 까닭없이 재릿재릿해져 갑니다.
이제 기다린지 2시간이 넘어 갑니다.
날씨도 춥고 감동이고 나발이고 이제 그냥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늘 먼 곳에 노란 별 빛들은 마을의 불빛들이 꺼지면서 더욱 환하게 비치면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아하~ 어두워야 비로소 드러나는 별빛이 있듯이 내 사랑도 좀 더 추워야 빛이 나다 봅니다.
추우면 의식이 명료해진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언어 이전의 세계, 의식 이전의 세계가 얼마큼 심층적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이젠 우리 딸 예랑이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젠 걱정도 안됩니다.
오겠지요... 뭐... 그런 마음으로 감동이고 사랑이고 그런 거룩한 정서보다는 빨리 오면 아무 말 없이 그냥 손이나 잡고
쿨하게(날씨가 추우니깐) 집으로 들어가렵니다.
드디어 140분만에 녀석이 나타납니다.
버스도 이미 끊긴 시간 저 멀리 실루엣으로 걸어오는 게 예랑이 맞습니다.
분노도 사랑도 아닌 덤덤한 마음으로 “재미있었어?”라고 말을 건네며 슬쩍 어깨에 팔을 올려 봅니다.
간호대에 없던데 어디서 뭐하고 놀았니 라고 끝내 묻지 않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방금 배웅 나온 것처럼
딸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갑니다.
1시 이후의 마을은 흑백 수묵화처럼 흐려졌지만 어쩐지 이제 꾸게 될 달콤한 꿈은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동화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