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감기약을 잔뜩 먹고 잤다.
초기 감기 증세가 만만치 않았다.
웬만하면 약은 잘 안먹는데 날이 날인 만큼 약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생각보다는 원기가(?) 좀 살아난다.
어제 저녁 냉동고에 넣어둔 보리차와 커피를 꺼내고 찰떡 쵸코파이,과일,팩소주를
마치 사전 입력된 로보캅 마냥 기계적으로 준비하여 배낭을 꾸린다.
거울을 한번 보고 순간적인 나르시시즘에 한번 젖어보고
폴로 향수 한 방울을 등산복에 떨어뜨린다.
(우리 마눌은 내 몸에서 땀냄새가 자주 난다고 한다)
구파발 역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다. 족발을 사고 인공폭포 앞에 앉아 있으니
물보라가 사정없이 얼굴을 적셔서 춥다는 느낌과 계절의 흐름을 동시에 느끼며
내가 왜 여기에 앉아 있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30분 동안 아무도 안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9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감기 기운에 정신이 없다보니
회사 출근시간인 8시로 내가 착각하여 너무 일찍와서 아무도 없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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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로 몇차례 공시한 내 자신이 8시로 착각하다니 조기 치매도 아니고
스스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정신차려라 이눔아!'.................
항상 이 시간이면 사랑의 스튜디오 최종 결과를 보는 듯하다.
생각하지도 않은 사람이 나타나고, 생각한 사람이 못 나온다고 전화오고...
그런데 오늘은 정말 기뻤다.
허장 선배님(3회)이 아무 사전 통보도 없이 모습을 나타내셨고
이상봉(4회)이 처음 참가를 한 것이었다.
총동문회에서 아무도 관심이(?) 없는 우신 등산반에 3회 허장 회장님이
"이제 3회도 처음 참가했지?"하며 웃는 모습에서
내 어찌 저 선배님의 깊은 뜻에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기 기운이 점점 사라지며 혼미한 정신이 차츰 맑아진다.
김성균(1) 허장(3) 최경수(7),박인호,김성우와 옆지기,임시경,이상봉,한득민,
신수철,이제환,백호현,민형동,기관노,김원기....
총 15명이 서로 상견례를 한 후
북한산성 계곡으로 씩씩하게 향했다.
첫 고지인 의상봉까지의 산길이 매우 가파르다.
신수철이의 배와 기관노의 체중이 그들로 하여금 후미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기관노가 기관차처럼 올라가야 할텐데 산행 전반부는 최종 후미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거의 나와 함께 움직였다.
지리산에서의 후미 동지였던 최경수 후배는 산행내내 선두를 고수했다.
선두를 맡은 김성균 선배님의 무전기에서는 후미보다 두 봉우리는 앞서가고
있다는 교신이 계속 들려온다.
역시 체력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새삼 느낀다.
허장 선배님이 가져온 디카로 사진을 찍고 박인호 회장이 가져온 켐코더로
촬영하며 2차원과 3차원의 세계를 정신없이 오고 갔다.
아직까지 천마고비(고2땐가 3학년때 양병택 교장선생님이 애국조회 훈화때
끝까지 천마고비라 해서 킥킥대며 웃었던 기억이 있음)는 아니지만
매미가 지나간 뒤의 북한산 하늘에서는 수많은 가을 잠자리가
속절없이 날고 있었고
서해가 보이는 듯한 맑은 하늘은 마음마저 청명하게 했다.
12시가 넘어 적당한 자리에 오찬 멍석을 깔았다.
족발이 3접시, 파전, 서울 막걸리,과일, 김밥,센드위치, 커피샤베트.....
허장 선배님이 가져오신 허영호 싸인이 들어있는 양주병의 사바스리갈 한잔,
캬~~~~ 속이 짜릿해 진다
산행의 초반은 아침 먹은 힘으로, 중반은 막걸리 힘으로
마지막은 정신력으로 버텨나간다.
하나 아쉬운 점은 우신여고생들이 한 분 밖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살림 산다고 바쁘신가 아니면 신랑의 돈벌이가 요즘 시원찮은가???
(윤문식,안상돈, 최영규..다음에는 너희들은 못나오더라도 우신여고생들 만이라도
오시라고 해라)
15인의 오찬이 끝난뒤 다시 1단~~2단~~~~5단까지 기어를 넣고 문수봉의 정상까지 달린다.
문수봉 정상에서 본 북한Mt의 수려한 모습에 디카와 켐코더가 사정없이 돌아간다.
마치 목욕을 하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나오는 아내의 누드 모습같은 북한산이다.
문수봉을 뒤로하고 하산길로 들어 섰다.
하산길에서는 허장 선배님에게 "형"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최경수 후배에게는 "경수야"
하는 소리가 아무 꺼리김 없이 나온다.
허장 선배님과 총동문회 이야기도 하고, 백호현이와 한국 교육의 현실에 대하여
우려도 하고 신수철이와 앞으로의 우리 삶의 방향에 대해서 논의도 하다보니
뒷풀이 장소인 구기동의 원조 할머니 두부집에 어느듯 도착했다.
다들 5시간의 산행에 힘들고 피곤했던 분위기가
두부보쌈, 두부김치, 콩비지 안주에
막걸리,맥주,소주에 젖어 들면서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콩비지가 정말 맛있어 계속 추가 주문이 들어간다.
등산반의 회비는 실비 계산이다.
허장 형이 만원짜리 수 십장(?)(술취해서 잘못봤다.3~4장이었다)을 주면서
나머지는 기금에 모아 두라고 하셨는데 과감히 거절했다.
산에서는 인간의 달란트가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 마음 만은 고마웠지만 우신 등산반은 선배님이라고 더 내고
후배라고 덜내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박인호 회장과 저의 조그만한 약속이 등산후 뒷풀이는 1차로 끝내는 것이어서
아쉬움을 남긴 채 마치게 되었다.
술이 발언을 하면 산은 침묵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4회들이야 친구가 있어 그나마 산행의 부담이 덜하겠지만
김성균 선배님, 허장 선배님,최경수 후배에게는
어렵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우신 등산반이 수평구조가 아니라 수직구조에서 더욱 아름다움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신념을 주심에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문수봉 정상에서 본 수채화 같은 풍경이 눈에 아른 거리는 아름다운 밤입니다.
2003. 9. 21
등산반 총무 김 원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