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은선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들
지난달 21일 SBS가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오은선의 카첸중가 등정이 의심스럽다는 내용을 보도하면서 언론과 네티즌 사이에 오은선씨의 히말라야 등반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특히, 이러한 SBS의 시각을 지지하는 시각들은 ‘과학적인 추론’과 ‘객관적인 증거’ 등을 근거로 오은선씨가 정상에 오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진실’을 밝히거나 ‘재등정’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은선씨는 이러한 지적들은 자신을 흠집내기용 계략이며, 자신은 진실로 정상에 올랐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8천미터나 되는 히말랴야와 같은 높은 산을 올라보지도 않고, 산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가타부타 이야기하는 것은 오류라고 반박한다. 그는 자신의 등정에 대해 신(神) 그리고 함께 올라갔던 셀파, 등반을 기록하는 엘리자베스 홀리여사가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은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있다. 함께 올라갔던 셀파 중 한사람은 올라갔다고 주장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안 올라갔다고 하고 있고, 다른 한 셀파는 침묵을 지키고 있어 혼란스럽다.
과연 어느 측의 말을 믿어야 할까? 이런 진실공방을 보면서 과학과 등산에 문외한으로서 몇 가지 생각이 든다. 우선, 논쟁이 비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잘 못하다간 노무현 대통령처럼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의 배경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내 생각엔 사람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풍조,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비정한 논쟁풍조, 그리고 사람의 공과를 균형 있게 보지 않는 성과지상적인 사회풍조,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비인간적인 풍조, 아울러 비정한 정치공론장이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또한 과학과 등산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 아마도 이번 공방은, 정상의 범위가 어디까지이고, 이것에 대한 ±오차의 범위 그리고 신뢰수준에 범위를 어디까지 놓고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에서 기인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보면,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측의 입장에 서서 만약 오은선씨가 오른 정상은 100중 97%라 한다면, 따라서 -3%의 오차가 나오게 된다. 이럴 때, 오은선씨가 했던 97%의 성과와 의미를 전면 부정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은 판이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왕 시작한 논쟁이라면, 다음의 것을 고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첫째는 또 하나의 시각으로 엘리자베드 홀리여사의 시각을 좀 찬찬히 음미했으면 좋겠다. 둘째는 이번 사건의 교훈으로 객관과 과학에 도달하기 위한 바람직한 토론문화 또는 토론정치의 모델을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점이다.
2. 또 하나의 엘리자베드 홀리여사의 시각
엘리자베스 홀리는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오은선씨가 가져온 등반사진은 신빙성이 약하다. 하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가 전적으로 셀파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녀가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오은선씨가 판단할 문제다.”
이런 홀리여사의 시각은 언론사들의 틀에 박힌 이분법적인 논쟁구도에 의해서 그 미묘한 시각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다. 더욱 이런 홀리여사의 발언은 언론사 마다 아전인수적 시각에 따라 유리한 쪽만 인용하여 조각나 사용하였다.
홀리여사의 시각은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하나는 오은선씨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과학과 진리의 세계를 피하고 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은선씨가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감각(感覺)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오은선씨와 그를 후원했던 한국산악연맹과 후원사들의 자기성찰을 요구하였다는 점이다.
이 홀리여사의 시각은 본인이 의식적으로 이런 정치적인 발언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사람을 살리면서 진실에 접근해 갈 수 있는 ‘정치적인 발언’이라고 생각된다. 잠시 생각해 보자. 오은선씨에게 ‘거짓말’이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 하면서, 진실을 밝히라고 하는 접근법과 셀파에게 의존함으로써 ‘착각’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제기하는 접근법은 오은선씨 입장에서 볼 때 상당히 다른 반응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첫 번째 접근법은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접근법으로서, 이것은 과학과 논리이전에 경험적으로 좌충우돌하고 실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자연스러운 세계이다. 하지만, 두 번째 접근법은 세상을 경험적으로 실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특히, 100% 맞고 100% 틀린 세계가 아닌 부분적으로 맞고 부분적으로 틀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합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오은선씨의 입장에서 첫 번째 시각은 자기의 존재를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철저한 공격과 방어모드로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시각은 오은선씨의 존재와 그가 이룬 성과를 대체로 인정하는 점에서, 의혹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보다 내생적인 자기성찰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에 거부반응이 덜 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논쟁이 처음부터 두 번째 방식으로 제기되었더라면 오은선의 주변세계에 대한 보다 진지한 성찰과 함께 풍부한 진실의 세계를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3. 과학보다 먼저 있는 생활세계 그리고 정치의 고향
이번 오은선씨 사태는 과학보다 먼저 있는 생활세계(life world)를 풍부하게 이해할 필요성을 제기해 주었다. 또한 과학과 논리가 한계에 봉착하면 생활세계로 돌아가서 지혜를 찾아볼 것을 제기해 주었다. 과학과 논리 그리고 이성 더 나아가 법과 제도 이전에 먼저 존재하는 것이 생활세계다. 사람들은 몸(신체)로 활동하면서 감각하고, 느낀다. 이러한 감각적인 활동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이렇게 감각하고 느끼는 생활세계는 100% 옳거나 100% 틀리거나 100% 거짓말 이거나 100% 참말인 세계가 아니다. 한마디로 참과 거짓 그리고 옳고 그름을 초월하는 상호주관적인 세계이며, 함께 공감하는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상호주관적인 말과 대화를 통해 자신과 타인들의 존재가 인정되면서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공감대와 공론장이 드러나는 세계이다.
생활세계에 대한 관점이 충만하게 반영되는 과학과 논리일수록 더 파워풀한 과학과 논리가 될 수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풍부한 생활세계를 반영하지 못하는 정치는 진리논쟁과 이념논쟁하다고 세월다보내고, 정착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 잃는다. 생활세계를 반영하지 못하는 정치와 정당은 독단과 오만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생활세계를 반영한 정치는 누구나 실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떠나서 상호주관성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체험을 전재로 잠정적인 수준에서 과학과 논리 및 정치를 논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생활세계적인 관점에서 이번 오은선이 문제를 바라보았더라면 우리가 몰랐던 등산과 산악인의 세계를 풍부하게 이해했을 것이다. 특히, 산악인이 산을 오르는 태도에 대해서 많이 이해했을 것이다. 산악인들에게 산에 왜 오르냐고 물으면 대체로 산이 먼저 있게 때문에 오른다는 답변하고 또 산이 좋아서 오른다고 답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 산악인들은 성과를 내기 위해 오르는 것 같다. 산악정신을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후원사에 의존하다보니 산악인의 초기 마음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곧 있으면 민족의 대명절 추석이 다가온다. 고향을 잠시 잊은 사람들, 부모를 잠시 잊은 사람들, 자기 주변을 잊은 사람들은 이날만이라도 고향과 부모 그리고 주변을 생각할 것이다. 정치인들도 고향을 찾아 추석민심을 찾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학과 정치는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나온 게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세계에서 내생적으로 자라서 나온 것이다. 생활세계가 과학과 정치의 고향이다. 특히, 생활정치를 하고 싶은 사람들은 고향인 생활세계를 방문하고 거기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