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없는 짓을 또 한다. 그냥 심심풀이다. 심심이 다소 풀리거든 용서를 해주고, 아니면 비웃어주라.>
움직일 때마다 온 근육의 통증이 고통스럽다. 넓적다리 뒤쪽과 허리 양쪽의 근육이 더욱 심하다. 짜증스럽거나, 이를 핑계로 일상의 생활에 변화를 줄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몸으로 느끼는 고통에 마음은 서러운 듯 평온하다. 따가운 가을 햇살 밑으로 파고드는 바람이 차갑다.
지난 주말 이틀을 꼬박 고구마 캐는 일에 바쳐야 했다. 주변에서 듣듯이, 주말농장에 소일꺼리로 했던 일이 아니다. 고향에 일손이 부족하여 어른들의 추상같은 명령에 따라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에 사는 모든 친지들이 다 동원되었다.
토요일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 형님과 동생 둘이 함께였다. 집안의 잔치나 명절, 제사 때마다 보곤 하지만 이렇게 한 차를 타고 몇 시간을 여행하기도 오랜만이다. 자랄 때의 여러 기억들을 얘기의 소재로 삼다가, 또 자식들이 일으키는 사소한 일화를 가볍게 주고받으며 그렇게 달렸다.
(내 고향은 전국에서 제일 가난하고, 늙은이가 제일 많기로 소문난, 그래도 이름 하나는 쓸 만한 전북 임실이다. 임실이라는 이름이 삼한시대부터 전해진 고유의 지명이란다. 그 뜻이 뭐 ‘내 님’, '내 사랑'이라고 들었다. 왜 그렇게 해석이 되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사실 난 고향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로 했었다. 어머니는 20년 전에 돌아가셨고, 몇 년 전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해 추석 이후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남들 다 그러듯이 추석 명절 성묘를 명분으로 고향을 찾았을 때, 그 막힌 도로에 참으로 긴 시간 동안 극도의 인내심을 동원하여 도착한 고향에는 말없는 무덤밖에 없었다. 갑자기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무덤은 사람이 아니다. 반갑다는 포옹도 없었고, 웃음도 보지 못하고, 오직 한번이면 그칠 인사를 매 무덤마다 찾아다니며 음식을 차리고 풀 위에서 두 번씩 절을 하는 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인사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인 줄도 잘 안다. 친지들로부터 핀잔을 듣는 것이 성묘 가는 것보다 나았다. 명절날 다른 할 일도 없어 낮잠을 자는 것으로 보냈다.
그래도 고향 선산에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터를 잡고 살다 가신 선조분들이 잠들어 계셨다. 어릴 때는 가을 시제를 별스런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연례행사로만 알고 지냈다. 비석에 새겨진 함자와 행적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 대조 할아버지인 줄도 몰랐다. 대학에 다닐 무렵 족보를 정리하면서 그분들 한분 한분의 함자와 생몰년, 그리고 묘소의 위치를 익혔다. 그 중에는 효자정문을 받으신 분도 계시고, 그 정려가 동네 어귀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문에 적힌 한문을 더듬더듬 익을 정도가 되어 상세히 읽어보곤 했다. 핏줄을 기준으로 여러 가지 더듬어보면서 강한 애착도 생겼다.
고향은 사백여년 동안 선조분들이 거기의 땅을 대대로 물려 일구며 아버지 때까지 사셨던 곳이다. 사방을 둘러보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을 끼고 제법 너른 평야와, 산과 산 사이에 층층의 논들, 산줄기가 그치려 낮아지는 곳에 자리한 밭들, 골짜기마다 옹기종기 집들이 박혀 있었다.
여름 방학에 내려와 어쩌다 한가한 시간, 소나무 그늘 아래서 담배 하나를 피우다 눈을 들어보면, 빙 둘러 산으로 갇힌 이곳에서 위의 할아버지들은 대체 어디까지 가보셨을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했다. 빤히 눈에 보이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고, 이 공간의 누구와 결혼을 하고, 여기의 땅을 일구며 그와 같이 살아갈 자식들을 낳고, 매양 그날이 그날같이 살다가 늙어 죽어서 여기 산 언저리에 묻혔다. 거의 대부분이 그러셨을 것이다.
삼각함수, 칸트, 주기열표 등등의 것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이, 오로지 농사짓는 방법과 먼 윗 조상들의 시제, 고조까지의 제삿날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물론 문자를 익힐 수 있는 영민한 분은 서당에서 글을 배우고, 읍내 향교에 오가며 유식한 채도 하셨다. 한문이야 배운다 해도 천자문에서 소학, 사서삼경, 통감 정도에 이르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공자와 맹자의 말씀, 통감에서 익힌 중국의 역사에 관한 내용 등으로 지식인의 행세에 손색이 없었을 것이고. 정월 대보름 등 축제에는 상쇠에서부터 단순히 소고를 돌리며 뒤를 따르는 일까지 각기 역할에 따라 자리를 지켰을 것이고, 관혼상제의 행사에도 역시 주어진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 시기나 상황에 따라 맡은 일을 하면 되었다. 어려서 익히 보아온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상상과 추리에 젖으면 젊은 나이에도 세월을 인식할 수 있었다. 또박또박 세월이 그렇게 흘러가면서 사람들은 거기에 어떻게 맞춰 살아야 하는 지도 알만했다. 하루의 원리와, 한 해, 한 세, 한 평생의 원리가 혹 같을 것이라는 점에 이르기도 했다. 한 해의 풀과, 한 생의 인간이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거 말이다.(나중에 보니, 이것은 송나라의 소강절이 다 해놓았더구먼.) 그만큼 여기 이 터와 여기를 스치는 세월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나아가 아버지를 포함한 주위 어른들에게 집안에 전해오는 여러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보태면, 시공과 사람이 한 데 어우러지는 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점차 부쳐 살고자 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선산 벌초하기조차 힘들다고 남아 있는 사람들의 하소연이 여러 해 반복되더니 급기야는 종중의 회의를 거쳐 몇 해 전 단체 납골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2004년의 일이다. 유난히 벚꽃이 화려한 봄에 선조분들 위로부터 한분한분 묘를 파헤쳐 화장을 하고 가루로 만들어 분에 담아 안치했다. 그렇게 높게 여겨지시던 분들이 저 아래 살아 있는 손자 놈 손에 의해 차례로 파헤쳐져 태워져 부서져 변하는 것을 보면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느 분도 허공에서 꾸짖지 않으셨고, 꿈자리에서조차 별다른 메시지를 못 받았다. 하루 종일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란 게 별 게 아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 모두는 그저 눈에 보이는 살아 있는 놈의 것이라는 거지. 살아 움직이는 후손 놈의 손길을 어쩔 수 없는 죽어 누워 계신 분들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너무 씁쓸하고 슬펐다. 어머니는 차마 손을 댈 수 없어 그대로 모셔두었다. 아버지도 우선 묘를 썼다.
지금 동족촌을 이루고 살던 그곳엔 몇몇 늙으신 친지들이 남아 계신데, 그중 작은집이 촌수로는 제일 가깝다. 숙부와 숙모가 계셔서 그래도 고향이었다. 그런데 지난 여름 숙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더 늙으신 숙부는 농사에 손을 놓으신지 몇 년이다. 자신이 갈 줄도 모르고 숙모는 이른 봄부터 고추, 고구마, 깨 등등을 밭뙈기마다 다 심어놓았다. 이번의 고향 길은 그 임자를 잃은 고구마를 캐러 가는 것이었다.
지난번 고추를 딸 때는 뙤약볕이 죽이고 팔다리 허리가 여간 힘들지 않더니만, 고구마 캐는 일은 아예 사람을 잡는다. 도저히 안 되겠다싶어 포크레인을 불렀다. 요금을 주고나면 남는 것이 없다고 모두 달라붙어 손으로 캐자는 어른들의 말씀에 따를 수 없었다. 이건 돈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을 잡는다. 병원비가 더 비싸다고 뭉개버렸다.
그러나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계가 퍼올린 흙속에서 고구마를 주워내는 일이 여간 고되지 않았다. 다소 속도는 나았지만 노동의 강도는 더했다. 기계의 속도에 맞추려니 쉴 새가 없다. 자꾸 모던타임스라는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다.
일은 몸이 하고 머리는 쉬는 셈이라 생각이 끊임없다. 말이 농사지 죽을 맛이다. 그러면서도 그 긴 세월 동안 모든 조상들이 대대로 이 짓을 하면서 살다 가셨다는 생각에 미쳐서는 다소 경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 뜨기 전에 논밭에 나가 뼈가 문들어지도록 일하다가 해가 지면 집에 들어와 자고, 또 그렇게 하고, 또 그리 하고. 그저 먹고 사는 일이 전부였던 시절의 인생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아버지까지 그랬다.
잠깐 쉬운 사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마누라 아들 녀석이 떠올랐다. 마누라는 매일 그렇듯이 그 짓을 하고 있을 것이고, 아들 녀석 또한 시험이다 뭐다 하고 어딘가 처박혀 있을 것이다. 몇 시간을 농사에 젖다보니 저 도회지의 마누라와 아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내가 있는 자리와 있을 자리가 뒤섞여 갈피를 못 잡겠다. 여기가 맞는지, 저기가 맞는지. 내가 사는 건지, 꿈인지 뭔지, 나이가 오십인지 어린앤지.
빈 고향에서 임자 잃은 밭에 농사일을 하며, 정말 난 뭐여? 땅에 부쳐 살아온 세월이 장구한데, 하필이면 내 대에 이르러 이렇게 갑작스러운 변동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여기에 태어나 자라다가 저 건너 마을 순희와 어쩌구 저쩌구 짝을 지어 살면서 그렇게 살아갈 자식들을 그냥 낳고 앞서 살던 분들과 똑같이 그렇게 살 것을. 인생이 뭔지, 팔자가 뭔지.
논두렁 밭두렁, 오가는 길가엔 억새가 피어나 바람에 흔들거린다. 햇빛은 따가워도 철은 가을인지라 바람은 마르고 칼 기운이 가득하다. 벌겋게 하늘을 물들이고 지는 해가 서럽다. 터도 잃고, 세월을 잃어버린 부평초 나그네의 인생이 또한 서글프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