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았던 골프에 발을 담근다.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운동이라는 생각에 그저 보통인 나와는 애초부터 별개의 것이었다. 부러울 것도, 욕할 것도 없었다. 이제야 자연스럽게 관련을 맺는다. 그냥 상황에 따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골프장의 때깔이 참 좋다. 장맛비에 싱싱한 한여름의 푸르름에다 아무데나 있어도 멋진 소나무가 자리를 잘 잡아 더욱 돋보인다. 이상향을 찾으려는 일탈의 행위 뒤에나 볼 수 있는 광경의 하나로 칠 수 있겠다. 들어서서 바라보는 것으로도 어지간한 본전을 뽑는 셈이다. 꽃이 흐드러진 봄이나, 단풍이 드린 가을에도, 지금과 다를 바 없을 듯하다.
골프에 나설 수 있는 기회는 때에 맞춰 잘 찾아왔다. 그렇잖아도 운동꺼리로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약간 흥분되고 짜증난 감정으로 세상을 살아오다가 수용되지 못해 혼자 끙끙거리다 고혈압 진단을 받은 지 몇 년째다. 운동이 절대란다. 집 앞 공원을 뛰고 걸었다. 순전히 몸뚱아리를 위해 반복되는 단순한 운동은 때로 보람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정말 재미없다. 눈에 보이는 목표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골프에 관심을 가지려 했다. 그러나 전혀 내용을 알 수 없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세상을 진단하고 나아갈 방향을 거들먹거리고 할 나이가 아닌 모양이다. 내가 세상에 맞춰야지 세상을 나에게 맞추려다 내가 죽는다. 불가항력이라는 말은 여기에 어울린다. 심정으로야 수긍하기 힘들지만 내가 아니어도 세상은 잘 돌아갈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한 발을 뒤로 뺄 수밖에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문득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아닌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이제야 제가 바로 본 것이라고 해야 맞겠다.
억지도 부리고 싶다. 이렇게 청춘이 지났나 서글프기도 하다. 세련되지 못한 치기와 열정이 여물어간다고 위안도 해본다. ‘어쨌거나.’세상은 넓고 나는 좁다. 밖은 크고 나는 작다. 늙어간다는 생각에 서글프고, 여물어간다는 생각에 그래도 슬프다. 주머니 속의 조약돌을 남모르게 조물락거리듯 나 혼자 내 몸과 마음을 만지작거린다. 이렇게 되어버렸다.
지난 늦겨울 진눈개비가 가늘게 내리는 날 친구들의 모임에 부름을 받아 즐거운 식사자리에서 계기가 마련되었다. 몇 십년 만에 만나 보고 싶었던 놈(김범수)이 수없이 쏟아내는 말 중에 골프가 있었다. 하고 싶다고 했더니 당장 손목을 잡아끈다. 3월 초 그렇게 골프에 입문하였다.
이제 더 이상 골프는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나와 관련을 맺었다. 분명 내가 특별한 놈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젊은 생각이 늙었다고 해야 되겠다. 내가 골프에 맞춰야지 그까지 나에게 맞출 여력이 없다. 순응해야 살아남지 않겠는가.
이 생각은 골프에 대한 하나하나의 지도를 받으면서 확실히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뭐 대단하겠나. 막대기로 공을 쳐서 구멍에 집어넣으면 될 일을. 자치기도 많이 해봤고, 구슬치기도 해봤는데.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아닌 모양이다. 옆에서 일일이 하는 잔소리가 대단한 철학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겁이 잔뜩 났다. 초라한 자세로 그저 시키는 대로 반복되는 동작을 계속해야 했다. 내 모르는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여겨질 정도다. 마치 우주의 절대적 진리를 깨달으러 절문에 들어선 놈처럼. 뭔가 있을 거야.
열심히 했다. 걷고 뛰는 것보다 더 단순한 동작을 매일 몇 시간씩 반복했다. 손가락이 어떻고, 허리가 어떻고, 각도가 어떻고, 시선이 어떻고, 팔목은 이래라, 무릎의 각도는 이래라, 몸통은 이렇게 하고, 팔꿈치는 펴고. 날 데리고 간 친구놈까지 매일 잔소리다. 이것을 습관이 될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 내 나름의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정말 엄청난 수도가 시작되었다. 상상조차 힘든 가치와 목표가 멀리서 손짓을 한다. 대단한 것이 있을 거야.
팔목이 아프고, 등근육이 당기고, 자고 나면 손가락이 부었다. 갈비뼈가 나갈 수 있다고 겁도 준다. 옆구리가 결리는 건 다반사다. 줄줄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아 ** 이렇게 해야 되나. *같이, 그래봤자 구멍에 공 넣긴데.’ 하다가, 이내 ‘아니야 이게 내 한계일지 몰라. 그래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보자.’하고 꼬리를 내린다. 아직 거부하는 젊음이 속에 남아 있으나, 곧 찬찬히 다독거린다.
그렇게 사개월이 흘렀다. 꽃이 피었던 것도 같고, 봄인데 예년과 다르게 추웠던 것도 같고. 보직을 새로 맡아 해야 될 일이 많은 것도 같았는데. 4대강이 어떻다고 하고, 선거가 치러지고. 월드컵이 한창 벌어진 것도 같고. 장마가 오르락거린다.
머리를 올려야 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상큼한 맛이겠다 싶은 상상에 아래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는데, 나를 따먹겠다는 뜻이었다. 애라 먹어라 먹어. 한 달여 그런 소리를 듣다가 급기야 때에 이른 모양이다. 날 따먹으려고 두 녀석(김범수, 허동영)이 예약을 해두었고, 평소 주어야겠다는 놈 하나(강충형)를 내가 불렀다. 장마가 북으로 올라가 무던히도 더운 7월 중순. 나는 뻘뻘 땀을 흘리며 치마를 올리고 고쟁이를 풀어야 했다.
진짜 7월의 빛깔은 너무 좋다. 논에 가득한 짙푸름이 황홀하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까지 더불었다. ‘애인’인가 하는 영화에서 첫 경험 때의 주위 상황이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라는 따먹는 놈의 말이 떠올랐다. 내 기억에는 때깔 좋은 그림이 평생 남아 있을 것 같아 찢어지는 통증을 견딜 수 있겠다고 자위했다. 한편으로 부풀어오르는 설레임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다정한 친구 셋에게 다리를 벌리고 정말 기억에 남을 첫 의식을 치렀다. 그 동안 습관화시키려고 노력한 모든 것을 다 바치려는 자세로 임했다. 뙤약볕에 연신 땀은 흐르고, 두려움과 설레임이 반복되었다. 이를 잊으려고 가벼운 농담을 쉴새없이 해댔다. 옆에 캐디가 처녀가 아닌 것 같다고 놀린다. 진정한 아다라시라고 보여줄 수도 없고. 이 책임은 세 놈에게 있었다. 이미 늙을 대로 늙은 것들이 처녀노릇을 한다. 괜한 내가 경험 많은 놈으로 오해를 샀다.
맛을 알려면 좀 더 경험을 해야 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기회를 찾았다. 울포회 7월 행사가 치러진단다. 망설임 없이 응했다. 며칠 앞서 잘 모르는 사람들과 한 차례 다녀왔다. 비가 사이사이 내리는 시원한 날에 너른 잔디밭에서 하키를 했다. 설레임보다는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 첫 경험에 느끼지 못한 통증을 두 번째 온전히 맛보았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들을 만나러 나선다.
동이 틀 무렵 길을 나선다. 친구(김범수, 홍종원)와 셋이서 한 차에 올라 고속도로를 내달린다. 무리해서 새로 샀다는 외제차를 타고 즐거운 소풍이다. 진입로에 들어서면서 선경으로 착각한다. 몽롱한 기분에 맛본 무릉도원이 바로 이 빛이었다. 구름이 가렸다 하더라도 7월 말의 빛은 손색이 없었다.
도착하니 이미 몇 친구가 와 있다. 최병유, 이근덕, 김태선, 뒤이어 이화성, 그리고 채승진이 멋진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몇몇하고는 졸업 뒤 첫 만남이다. 기다리는 시간에 바라보는 눈앞의 잔디와 소나무, 물, 바위가 그림이다. 이미 그림 속에 들어왔다. 눈으로 뿐이랴. 맑은 공기 맛이 그만이다. 한껏 들이키면 온몸의 찌꺼기가 다 씻길 것 같은.
골프는 이래서 특별했나보다. 특별한 환경이다. 경기 내용이야 역시 구슬치기와 진배없다. 도구 하나하나의 값이 또한 예사롭지 않다. 비용도 그렇다.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다소 여유를 찾았는지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듯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릎마디에 오만함이 배어든다.
첫 홀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안정감을 잃었다. 속된 농담이 낄 틈새를 찾을 수 없고, 두 번째에서의 질퍽거린 여운이 남아 있다. 더구나 여덟 놈의 고등학교 동기들이 모여 있으니 눈과 코에는 골프장이지만 마음에는 고등학교다. 흰 머리가 희끗한 늙은 고등학생들이 몇 십년 만에 다시 시험을 치른다.
이쯤에서 내 시합의 결과는 빤한 것이다. 사실 난 고등학교에 대한 기억이 좋지만은 않다. 특히 예사로 치르는 시험의 결과가 주요인이다. 한다고 해도 그만, 안 하면 바닥이다. 재미가 없었다. 앞서 있다고 해서 재미를 더욱 느꼈을 리 만무하겠지만 서열과 경쟁이 참 부담스러웠다.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는데, 그때의 모든 것이 숨을 쉴 수 없는 옥죄임으로 느껴졌다. 이학년 말에 이르러서야 나름대로 견디는 방법을 터득해서 아직 이렇게 살아 있다.
그런데 다시 몇 녀석이 모이니 그때의 분위기인 듯하여 마음이 움츠러든다. 점수를 따져서 서열을 정하는 일이 앞에 벌어질 판이다. 녀석들 모습에서도 예사스럽지 않은 비장함이 비치니 더욱 주눅이 든다. 또다시 삼십이 년 전에 터득한 방법을 떠올려야 했다.
역시나이다. 경력은 경력이라 해도 혼자서는 그런대로 잘 한 것 같은데, 모여 있으니 내 나름의 절대적 실력을 상대성에 빗대기 힘들어진다. 마음이 움츠러드니 몸이 움츠러들어 대머리만 까게 되고, 이를 극복한다고 힘을 주니 방향을 잃고 옆으로 날아간다. 찬찬히 즐기면 될 일을 공 따라 다니느라 여름 더위에 땀이 쏟아지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공 옆에 서면 숨을 헐떡거려 자세를 잡지 못하겠다. 한 홀 한 홀 지날 때마다 제정신이 들어 숨을 가다듬어보지만 이는 졸업을 해야 다소 해소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새것을 맛보는 재미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맛을 되새김질하는 재미가 더욱 많다. 지난 맛이 어떻더라도. 젊어서 쓴맛을 나이가 들어서는 눈 하나 끔쩍거리지 않듯이, 친구들 하나하나에서 전해오는 옛맛이 좋다. 어차피 성적은 팔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삼십년 전의 팔자에서 얼마나 달라졌을라고. 성적은 팔자인데. 이 정도면 성적을 빼고 즐길 수 있는 여유는 그 동안 능숙하게 터득하지 않았겠는가. 시대와 경험을 같이 했다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만으로 늙어가면서 찾아오는 외로움이 외로움만이 아니다. 그래 이렇게 세상은 같이 살아야 맛이다.
그런데 골프의 끝은 어디야. 숭고하고 멋진 결과가 분명 있을 듯이 말들을 했는데 말이다. 그 결과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사소한 잔소리를 억지로 참아왔고, 시간이 나는 대로 단순한 동작을 지겹도록 반복하는데. 어려서부터 해탈의 맛이 정말 시원하다고 들었다. 절 문 앞에 이르러 어떤 것이라도 견디리라는 발심의 목적은 그래도 우주의 절대적 진리를 한 몸에 담겠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골프의 문 앞에서 미리 물을 수밖에.
끝나고 한적한 식당에 앉아 밥을 기다리는데, 태선이가 말했다. “골프는 100으로 시작해서 100으로 끝난다.” 이런 젠장.
역시 골프는 내 스스로 즐기는 법을 별도로 터득해야 할 것 같다. 반복동작의 목적은 구멍넣기고, 마음의 여유를 한껏 늘려 주변을 돌아보자. 경치도 즐기고, 친구도 즐기고, 세월도 갖고 놀자. 이제 골프가 특별할 것도 없고, 내가 굳이 특별할 것도 아니다. 그냥 있으니 다가가서 순응하자. 차분히 맡기는 것이 좋겠다. 친구들아 같이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