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글이 좀 뜸한 것같아 재미삼아 잡글을 하나 올린다. 내용도 없이 좀 길다. 심심하거나 한가할 때 그냥 한가하게 천천히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 꽃잔치의 시기에 즈음하여 타령을 아니 읊조릴 수 없다. 네 개의 계절이 다 감정을 뒤흔들지 않음이 없으나, 봄꽃에서 이는 야릇한 감상은 봄 나름의 고유성에서 말미암아 나머지 셋과 전혀 다른 맛을 가진다. 화사하고, 한껏 밝아지다가, 곧 우울해지고, 나른한 게으름까지 찾아들면 때론 짜증스럽기도 하다. 찬바람 속의 낙엽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무상함보다 봄꽃에서 자아내는 그것이 더욱 서럽다.
이놈의 감상은 봄의 날씨처럼 변덕스럽기 그지없다. 어찌 차분하게 앉아 있지를 못하겠다. 그렇다고 움직여본들 허전함은 여전하다. 처녀아이들을 설레게 하는 봄바람의 기운이 오십을 앞둔 수컷의 몸속에서도 스멀거린다. 앉았다 일어났다 걸어보다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세상이 온통 꽃이다. 모두 한꺼번에 피어나 온 세상을 덮어버렸다. 매화는 꽃잎을 거두었다. 옅은 노랑의 산수유는 제 빛을 떨구고, 진달래는 여전히 붉다. 개나리도 줄지어 떼로 피어나 노란빛으로 수놓고, 갓 피어나려는 이파리의 연초록과 어울려 더더욱 아름답다.
목련의 고고한 자태도 한창이다. 울타리 밑에 다소곳한 앵두꽃도 재잘거리고, 향이 짙은 살구꽃은 마음을 흔든다. 구색에 빠지지 않으려는 듯 분홍의 복사꽃이 사랑스럽다. 곁에 심어진 조팝나무의 하얀 꽃떨기들도 청량한 향을 품고 있다. 지금 무엇보다도 주름잡는 놈은 벚꽃이다. 그 커다란 몸집의 모든 가지에 뭉게뭉게 꽃을 달고 있으니, 양에서도 비길 것이 없다. 오월에야 피어나는 라일락까지 그 보랏빛을 내보인다.
어디 하늘에 걸린 꽃뿐이랴. 키 작은 풀꽃들도 땅에 붙어 잎새와 다른 빛의 꽃을 피웠다. 수선화는 제법 일찍 선을 보였고, 제비꽃, 양지꽃 등등이 햇빛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성급한 나무들은 잎을 내놓고 있어 옅은 초록까지 보태었다.
달포 전의 회색빛 세상은 각기 제 모습의 때깔을 띠우면서 천연색으로 채워지고 있다. 하얗고, 노랗고, 붉고. 늘어진 버들가지의 새잎도 보기 좋다. 소나무의 의젓한 자태도 이때에 이르러서야 구색을 맞추는 듯하다.
찬 겨울에서의 화신은 누구나 매화를 꼽는다. 이는 자그마한 화분에서도 생장이 가능해 방안에서 꽃을 피울 수 있어 아주 이른 시기에 볼 수 있다. 입춘이 지나면서 꽃을 핑계하여 술을 기울이던 멋스런 선인들이 제법 있었다. 그림으로나 시로나 너무 다루어져 더 이상의 찬사가 필요 없다. 그래도 구태여 방안이 아니더라도 일찍 피어나기는 마찬가지다.
매화의 화려함과 향을 꽃의 우선 서열에 두는 것에 주저할 것은 없으나, 산속에서 피는 하나를 들지 않으면 안 된다. 발밑에 바삭거리는 소리를 벗삼아 이른 봄 산속을 헤매어보면, 회색의 나무 무더기 속에서 점점의 노란 꽃을 간간히 찾을 수 있다. 생강나무꽃이다. 다소 비릿한 매화향과는 달리 은은하고 달가운 향을 가져 봄의 화신으로서는 최고라 하겠다. 돋보임이 좋기는 하다만 어디 혼자로 가능한가. 바탕과의 또렷한 대비가 으뜸이다. 이것은 그리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부지런함으로 인한 우선으로 그 가치를 가진다. 이 즈음에 이어 피어나는 것이 산수유다. 좁쌀같은 작은 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그 역시 눈요기의 하나라 치더라도, 고고한 간결함의 미덕은 생강나무에 미치지 못한다.
개나리와 진달래에 이르러서야 봄을 만끽할 수 있다. 이 둘은 어릴 때부터 마음에 들어앉아 해마다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어릴 때 생각에 뒤에 아이를 낳으면 꼭 둘 이상을 낳아 그 이름에 나리와 다래를 꼭 넣을 것이라고 마음먹기도 했다. 이것도 어린 생각이었는지 지금 하나만을 두었고, 이름도 그리 하지 못했다.
개나리는 어딜 가나 울타리를 짓듯이, 아니면 밭에 기르듯이 무더기로 심지만, 개나리는 묵은 나뭇가지 울타리 사이에서 피어나야 제 맛이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이른 봄 울타리의 개나리와 막 까나온 병아리는 하나로 여겨져 눈과 귀를 동시에 울렸다. 병아리가 울타리 밑에 숨어 있거나 개나리가 삐약거리며 돌아다녔다.
개나리에의 토속적 정서는 고등학교에 와서 흐트러졌다. 정문에서 교사에 이르기까지 오른쪽 언덕에 줄지어진 떼거리의 개나리는 마음속의 개나리와 같지 않았다. 그래도 그 또한 옛일이라 새까만 모자와 교복과 함께 젊음의 생기를 상기시킨다. 삼학년 봄 그 노랑 속에 파묻혀 찍은 교복입은 모습의 낡은 사진을 보면, 따사로운 봄햇살과 공부만 빼고 나머지는 다 하고 싶었던 약간 삐뚤어진 마음자리가 떠오른다. 이렇게 좋은 봄에 꼭 이렇게 갇혀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미치면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지금도 그 모양으로 살고 있지만 말이다.
개나리의 짝은 역시 진달래다. 진달래도 피는 자리가 제격이라야 멋이 있다. 앞산 바위 절벽 위에 그저 붉은 빛만 살짝 내보일 정도면 된다. 뒷마을 순희 같기도 하고, 수줍움을 가득 머금은 채 그렇다고 쉽게 접할 수도 없는 곳에 다소곳한 모습은 내를 건너려 저편 물가에 나뭇짐을 가득 재운 지게를 바치고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는 아버지와 어울린다. 그 나뭇짐 위에 몇 가지 붉은 진달래는 꼭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아버지의 애정표현이었다. 아니 어머니였는지도 모른다. 해가 뉘엿뉘엿 산을 넘으려 하고, 산과 마을 사이의 평야에 옅은 연무가 가득해질 무렵 이쪽 언덕에서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를 기다렸다. 모습이 확연해질 양 치면 우선 갈색의 나뭇짐 위에 붉은 빛깔이 있나 없나를 살피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빛을 보는 순간 환호성을 지르며 한걸음에 내달려 저녁을 짓는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진달래를 꺾어온다고 소리를 치곤 했다. 흑백 무성영화와 같은 추억이다.
집 앞 공원에 진달래가 한창이다. 누가 그랬는지 소나무 숲을 만들고, 그 밑에 진달래를 가득 심었다. 보기에 그만이다. 지루하지 않은 곡선의 소나무 줄기와 참으로 잘 어울린다. 한참을 머물며 그 분홍 꽃잎에서 아버지와 엄마를 보고, 철들기 시작할 무렵 마음에 들어온 순희를 떠올린다. 그럴수록 자꾸 세월이 잡힌다. 아버지도 없고, 엄마도 없고, 순희도 사라졌으며, 나는 이렇게 전혀 다른 놈으로 늙어간다.
봄꽃에서 벚꽃을 빼면 아니 된다. 역시 벚에서도 어린 추억이 묻어난다. 벚꽃은 봄소풍과 짝을 이룬다. 일제시대에 지은 낡은 국민 학교 주변에 유난히 벚나무가 많았다. 화려하게 피어나면 봄소풍을 갔다. 시골에서 다른 시골로 가는 소풍이지만 벚꽃 그늘 아래 자리한 엿장수와 번데기 장수가 요란했다. 가위소리, 내지르는 소리.
벚꽃은 눈에만 좋은 것이 아니다. 은은한 향이 아주 좋다. 제법 코가 좋아야 맡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이 향은 정말 에로틱하다. 벚꽃 아래에 서면 춘심이 절로 일어 자지가 먼저 움직인다. 구태여 꾸며보자면 요즘 같은 달이 밝은 저녁 자리에 앉아 사랑스런 겨집을 두고 술을 마셔야 한다. 왁자지껄 떠들 정도가 아니고 단촐해야 좋다. 눈에도 꽃, 코에도 꽃, 입에도 꽃, 손에도 꽃, 꽃꽃꽃. 하찮은 얘기가 향기에 실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마냥 좋게만 들리는 그런 속에서 독하지 않은 술을 마셔야 한다. 은은한 빛, 은은한 향기, 은은한 분위기에 은은한 취기가 제격이다. 가벼운 웃음이 향기보다 더욱 예쁘게 느껴질 때마다 한 모금씩 가볍게 술을 마시고 싶다.
세상이 꽃 천지다. 봄이 무르익었다. 갖가지의 꽃을 보며, 눈으로 꽃을 보며, 코로 향을 맡으며 참 좋기는 한데 말이다. 꽃 속에 폭 빠지지 못하는 건 무슨 까닭인가. 마음에는 자꾸 막연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더욱 커진다.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봄꽃이 화려하다가 이내 지고 말아 세월의 무상함이 먼저 전해져서인지 모르겠다.
제 마음을 제가 모르는 혼수상태다. 꽃에 취해버렸다. 선경에 복사꽃이 빠지지 않듯 지금 선경에 와 있는 게다. 환각에 빠져 있다. 제정신이 없는 놈이 어찌 세월무상과 같은 고고한 생각을 할 수 있으랴. 분간하기 어려운 여러 감정은 나이 들어가는 수컷의 동물적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다.
아무리 봄꽃이 온 세상에 가득해도 역시 수컷에게는 사람꽃이 최고이다. 세상에서 제일 고운 꽃이 사람꽃이다. 스물을 앞뒤로 한 계집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립다. 깔깔거리는 소리는 이 세상 최고의 시이고, 음악이다. 사람꽃은 오감을 모두 즐겁게 한다. 보아도 예쁘고, 맡아도 향기롭고, 만져도 보드랍고, 야릇한 감정까지 교환이 가능하다. 어디 음양의 교접을 반드시 자지로만 하랴. 눈으로도 하고, 귀로도 하고, 손으로도 하고, 입으로도 하고, 몸으로도 하고, 온몸 하나하나를 다 동원하여 그렇게 그렇게 주고받음이 그립다.
꽃으로 가득 한 세상 달까지 차올라 놀기에 적격이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고 어떤 요상한 가수놈이 불러대더니만 이러자고 한 것인가 보다. 달이 차올랐다. 벚꽃 그늘 아래 자리를 하고, 달빛에 비치는 꽃으로 하늘을 가리고, 예쁜 처녀애를 곁에 두고서 아무 뜻도 없는 말을 다소 큰소리로 주고받으며, 그냥 최대한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얼굴을 활짝 펴고, 같이 옅은 도수의 술을 마시러 가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조금 지나면 더욱 많은 잎들이 피어나 숲을 채우고, 뻐꾸기 한가하게 울어댈 것이고, 가끔 꾀꼬리의 맑은 소리도 들려오겠다. 그리 되기 전에, 꽃이 한창인 지금 달밤에 술이 최고일 듯하다. 꽃이 피었다. 달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