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그늘(5)
그 날, 저녁을 먹고 영미에게 전화를 했다. 송수화기를 잡기 전에 전화 걸어 말할 내용을 미
리 머리 속으로 그려보았다. 참, 갈등의 연속이었다. 내 진정 누구를 사랑하는가? 은경이의
아픈 마음을 계속 위로하며 만나야 하는가? 아니면 은경이는 그녀의 운명에 맡기고, 영미를
만나야하는가? 은경이를, 건수와 이미 건너서는 안 되는 길을 간 그녀를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받아들인다 해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우선은 친구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영미에게 다이알을 돌린 후에 그녀의
반응에 따라 대처하기로 마음먹었다.
- 여보세요?
- 여보세요?
- 아하, 오빠 목소리네요. 그렇지 않아도 언니가 무척 궁금해하셨어요. 언니 바꿔드릴까요?
영미의 여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여고 1 학년인 그녀는 딸만 둘인 그 집이기에 영미의 유일
한 여동생이었는데, 전에 영미와 함께 숙대 앞 파리제과에서 만난 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
었다.
그 때 전화기에서 잠시 소음이 들리더니, 그녀의 여동생이 다시 말을 했다.
- 언니가 있다가 전화한데요.
- 알았어. 내가 한 시간쯤 뒤에 다시 건다고 전해 줘.
그럴 것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할 때, 거의 매일 만났었는데, 아무런 사연도 말하지 않고 소
식 없이 한 달 이상을 잠적했다가 그것도 방학이나 마찬가지인 휴교기간 중 30 여 일을 연
락 한 번 없다가 뜬금없이 불쑥 전화를 걸어오는 남자 친구에게 반갑게 전화를 받을 여자는
많지 그리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영미의 마음을 이해했다. 정말로 정확히 한 시간을 기
다린 후에 8 시 30분쯤 전화를 다시 했다.
- 여보세요?
-……
- 영미구나. 영미 맞지.
- ……
- 여보세요. 대답 좀 해.
- 왠일이야? 아주 잊은 줄 알았는데.
- 미안해. 사정이 그렇게 됐어. 만나서 이야기하자.
- 난 할 이야기 별로 없다고 생각해. 자연스럽게 이대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정말이야. 내 사과하지.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 만나서 이야기하면 날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다급해서 불쑥 이런 말을 뱉었지만, 아차 싶었다. 그럼 영미에게 은경이 이야기를 한다는 말
인가? 그럼 은경이와의 사이는 끝이 아닌가? 영미와 은경이, 물론 영미가 싫지는 않았지만,
은경이에 대한 미련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영미에게 만나면 모든 걸
이해한다고 말한 거에 대해 후회했다. 그러나 말이란 한 번 뱉어버리면 끝이 아닌가? 솔직
히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영미와의 만남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절
친한 친구 용흥이와의 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였다. 아니 좀더
솔직해지자. 은경이를 맘속 깊이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지만, 영미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
었음이다.
- 네가 한 달 이상 소식이 없었으니 내게도 시간을 줘. 생각해보고 3일 뒤, 이 시간에 정확
하게 내가 너에게 전화할게. 그 전화 없으면 우리 그냥 좋은 인연으로 기억을 남기고 끝내
기로 해.
- 영미야. 내가 잘 못했어. 그러지 말고 낼 만나서 이야기하자. 내가 너희 집 가까이 갈게.
약속 시간을 네가 정해. 청량리 맘모스 호텔 커피숍이 어떨까?
그녀의 집은 전농동이었다.
- 제발 부탁이야. 나를 만나면 지난 날들을 이해하게 될 거야.
- 영미야! 대답 좀 해.
- ……
- 좋아. 하지만 옛날 같은 기분은 아니야. 일단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나갈게. 오
후 세 시에 맘모스로 나가지.
- 알았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그럼 내일 만나. 먼저 수화기 내려.
잠시 후에 송수화기에서 그녀가 전화를 끊는 소리를 들은 다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수화
기를 내려놓고 담배 두 대를 연속으로 피었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
을 것 같았다. 소주가 마시고 싶었다. 용흥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녀석은 집에 있다
가 내가 영미와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쏜살같이 내게로 와서는 한 잔 하자고 했다.
우리는 만리동 고개의 포장마차에서 꼼장어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 짜식 선수는 달라. 영미씨가 그래, 순순히 만나겠다고 하던?
- 임마, 그럴 리가 있냐? 심지어 만나기는커녕 이대로 끝내자고 아는 걸 통사정해서 만날
약속을 받아 놓기는 놓았지.
- 그럼 됐지. 뭘 걱정해.
- 은경이 때문이야.
- 참, 넌, 그 문제도 있지. 내 생각이 짧았다. 미안하다. 하지만, 내 입장만 생각하는 거 같아
서 안 됐다만, 나와 영미씨 친구 관계 AS 확실하게 해 주고 고민해라. 알았지.
- 햐, 이거 친구란 놈이 내 코가 석 잔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죽어라죽어라 하는구나.
- 미안타 짜샤, 어쩌다 보니 내 몰골이 이렇게 됐는지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다. 하지만 어
쩌냐? 언제나 머릿속엔 그녀 생각뿐인데. 만나본 지 두 주나 지났잖아? 정말 내 심정도 말
이 아니라구.
우리 둘이는 안주도 별로 먹지 않으며 소주 두 병을 순식간에 비우고, 한 병을 더 주문했다.
화제의 내용상 술을 계속 마실 수밖에 없었다.
- 야, 내 발등의 불이 우선 급하다만, 너 은경이한테는 병원에서 집에 바래다준 이후로 전
화 안 했었지?
- 시골 내려가기 전에 그냥 여행 좀 간다고, 며칠 걸릴 거라고 전화한 적은 있어.
- 너 은경이에 대한 미련은 정말 대단하구나. 나 같으면, 영미 씨 쪽으로 확 기울었겠다.
- 나는 네가 아니니, 어쩌겠니.
- 그거야 그렇지. 다 제 눈의 안경이고, 운명의 장난 아니겠니? 어찌 고민과 방황이 없는
청춘이 있으리오.
- 사실은 아까 낮부터 내가 네게 묻고 싶은 말이었어. 혹시 네게 전화 안 왔었니? 나 찾는
전화 말이야.
- 왔었어. 니네 집에 전화 거니 시골 내려갔다고 니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더라 면서 니 소
식 아냐고 물어보는 전화가 왔었지.
- 그럼 내게 바로 연락해 줬어야 하잖아!
- 니가 부모님께 너의 소재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해 놓고선 이제 와서 딴소리네. 븅
신.
- 아참, 그때 그랬지. 어쩔 수 없었겠구나. 미안타.
은경이가 나를 찾았다는 용흥이의 말에 은경이에 대한 궁금함으로 당장 전화를 걸고 싶었
다. 시계를 보니, 9월 3일 밤 11 시를 넘고 있었다.
- 지금 전화할까?
- 너 내일 영미 씨 만나러 간다며.
- 그건 그렇고. 은경이 목소리라도 들어야 잠이 올 것 같은데?
- 참아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거야. 너무 늦었다. 그리고 연락을 끊은 지 한 달도 훨
씬 더 됐으면서 이제 와서 이 늦은 시간에 전화하면, 그리고 너 지금 거의 만취한 상황에서
괜히 전화했다가 후회하게 돼 있어. 일단 영미 씨 만나는 것부터 먼저 하고 그 다음 전화해
도 늦지 않다는 게 내 판단이야. 이 엉님 말씀을 들어라.
하긴 용흥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둘의 판단이 서로 다를 때, 대체로 녀석의 판
단이 옳을 때가 더 많았던 기억이 났다. 형제가 많은 집의 막내로 태어난 녀석은 나보다 상
대적으로 판단이 신중하고 정확한 편이라는 것은 어릴 때부터 느껴오던 터였다. 생각 같아
서는 당장 전화로 은경이의 안부라도 묻고 싶었지만, 내일 영미를 만난 뒤에 은경이에게 전
화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소주 세 병을 나누어 마신 후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한 잔 더 하자고 제의했으나, 용흥이가
내일의 영미 씨와의 약속도 있고 하니 그만 들어가라고 했다. 옳은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술이 꽤 취했음에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결국 한 달
여의 잠수로 일은 더 복잡해진 듯했다. 취중진심이라고 은경이에 대한 그리움이 더 앞서는
것으로 보아 내일 만나서 영미에게 해야할 말과 행동을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일단 잘 안 돼고 있는 용흥이와 영미의 친구 사이를 회복시켜야하지
않은가?
새벽까지 잠 못 이루다가 오전 11 시쯤 일어났다. 마치 어제의 일이 꿈인 듯 싶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네 시간 남았다. 입맛도 없고 약간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라면을 끓여 먹
었다. 집에는 나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집에 계셔야할 어머니도 어디론가 외출 중이었다.
이 징검다리 같은 시간을 어떻게 보낸다? 책이 읽어질 리 없었고, 음악도 듣기 싫었다. 어떻
게 시간을 보낼까 궁리하다가 결국 용흥이에게 전화를 했다. 녀석은 자신의 일신과 관계 있
기 때문인지 한 달음에 우리집으로 달려왔다.
- 술은 다 깼냐?
- 어. 괜찮아.
- 어제 세 병 중에 니가 두 병은 마셨을 걸?
- 그래?
- 내가 따라주는 대로 병나발 불 듯이 마시고 홀아비처럼 니가 또 따라 마시고 그랬잖아.
- 어쩐지 머리가 좀 아프다.
- 설마, 오늘 약속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겠지?
- 알았어. 오늘 내가 영미를 만나는 건, 내 자신의 문제라기보다는 네 사정을 생각해서야.
- 고맙다. 짜샤.
- 우리 당구나 치러 갈까?
- 그래 시간 죽이는 데는 그게 최고지.
우리는 만리동 고개의 당구장으로가서 징검다리 같은 시간을 건넜다. 삼판 양승을 치고 약
간의 시간이 남았다. 용흥이가 말했다.
- 같이 갈까?
- 아냐, 오늘은 나 혼자 가는 게 좋겠어.
- 하긴 그래. 내가 끼면 일을 그르치는 수가 확률상 더 많을 거야.
-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오늘 만나서 일단 예전에 다시 그랬듯이 더블 데이트 분위기로 만들
어야 겠지.
- 짜식. 이제 더 이상 부탁할 것도 없네. 네 머리에 로드맵이 이미 잘 그려져 있구나.
- 어째 마음이 많이 무겁다.
- 단순하게 생각해. 우선 영미에게 최선을 다하는 거야.
- 니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하지만...
- 잘 알아. 그만 해라. 나도 네 맘 다 안다. 영미 친구랑 만나게만 해 주면 그 땐 내가 잘
할게.
- 글쎄 오늘 일도 나가봐야 알겠지.
약속 시간에 맞추어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인 청량리 맘모스 호텔 커피 숍으로 나갔다. 언
제나 그렇듯이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청량리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이 많아서
더욱 더운 느낌이 들었다. 저 수많은 사람들이 다 사연이 있어서 거리로 나왔을 거다. 그 중
에 나도 하나인데, 나처럼 기구한 사연의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층의 커피
숍으로 들어갔다. 냉방이 잘 되어서 시원했다. 약속시간 5 분 전이었다. 10 분 정도를 기다
리자 무표정한 얼굴로 영미가 나타났다. 나는 애써 속 마음과는 달리 밝은 표정으로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2004.4.14.
* 요찬아 Rock well 의 'Knife'를 부탁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