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그늘(6)
좀 긴 듯했던 머리 모양이 컷트 머리로 짧아졌었다. '영미' 를 처음 만났을 때, 단발머리의 그
녀였으나, 그녀에게 떠난다는 연락도 없이 외할머니 댁으로 잠수하기 전, 그러니까 영미를
이 맘모스 커피숍에서 다시 만나기 전까지 내 기억 속의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깨를 약간 덮
을 정도의 생머리였다. 내가 그녀에게 "난 긴 머리 여자가 좋다" 고 했기에 영미는 층지게
다듬기만 하고 머리를 계속 길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 길었던 머리를 자르고 그녀가 나타났다. 한 달여 전에 만났을 때보다 짧은 머리
여서 그런지 한결 앳되 보였지만, 그녀의 어두운 표정으로 인해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마저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면, 어색한 분위기로
흐를 테고, 그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닐 거였다. 난 억지로라도 이야깃거리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화제를 찾으려 할수록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았다. 서로 물컵만 바라보
는 어색한 순간이 계속될 때, 주문을 받으러 웨이추레스가 왔다.
- 뭘 주문하시겠어요?
나를 보고 물었다.
- 날씨가 더우니까 오렌지쥬스요.
그녀에게 주문하라는 뜻으로 턱을 내밀었다.
- 같은 걸로 주세요.
한 달여 만에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여기에 들어와서 나와 눈이 잠깐 마주쳤을
뿐, 한 마디도 안 하는 거였다.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동생은 잘 지낸 것 같은 목소리였는데, 비록 전화 목소리지만. 영미, 너도 잘 지냈니?
- ……
머리 컷트 했구나! 아주 보기 좋은데?
- ……
밖에 날씨 무지 덥지? 입추가 낼모렌데 늦더위가 기승이네?
- ……
- 미안해. 정말 잘못했다. 사실은 나도 네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지 모르겠어.
- 용건만 얘기해. 길게 만나려고 나온 것은 아니니까.
그녀의 첫 마디는 아주 차가왔다.
- 그냥, 고민 좀 하고 싶었어. 외할머니 댁에 한 달 조금 넘게 갔다왔어. 네 생각 많이 했
다.
- 그러셔. 어련 하실려고. 그런 사람이 전화 한 번 없어? 그걸 하기 어려운 말이라고 꺼내
고 있니?
- 내가 들으면, 그 동안 한 달이 넘게 내게 연락도 안 한 이유를 알 거라고 말한 것부터 이
야기해봐. 내가 들어서 타당하다고 느낄 이유를 말하라고.
나는 순간 이 늦은 여름에 입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녀에게 내가 시골에 가서 한 달을 지낸
까닭이 '은경' 이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함이 첫째 이유였음이 사실일 것이나, 도저
히 이 상황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만약, 사실을 말한다면, 영미와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 아닐까? 영미를 만나기 전까지는, 최악의 경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아주 조금은
하고 있었으나, 막상 이렇게 그녀 앞에 앉으니 영미에 대한 미련으로 나는 거짓말할 생각부터
했다. 머리를 한참 굴리다가 나도 어이가 없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 사실, 나, 재수를 하려고 시골에 내려갔던 거야. 교과서와 참고서를 싸들고. 실제로 하루
15 시간정도 공부에 매달렸었지.
- 그런데?
-우리 집 이외에는 연락을 끊고, 공부에 전념해 봤지.
- 그래서?
- 한 달을 열심히 해 본 결과, 지금보다 결과가 나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거라는 판단이어서
그냥 학교 다닐려고 올라온 거야.
- 그렇다고 전화도 한 번 안 하니?
그녀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다르게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거짓말 한 것이 마음 한 곳에 양
심의 가책은 되었지만 절반은 성공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 너도 짐작할 수 있을 걸?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하다가 재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너
한테도 물론 연락을 안 했지만, 니가 잘 아는 내 단짝 용흥이에게도 전화 한 번 안 할 정도
로 정말 한 달여를 무섭게 공부에 매달려 봤었어. 너도 알다시피 시국이 겉으로나마 안정되
고 그래서 휴교가 얼마 안 있으면 풀린다고 하기에 짐 싸들고 다시 돌아온 거야.
- 난 네가 마음이 변한 걸로 알았어. 그리고 네가 나를 정말 마음 속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나를 대하지는 않았을 거야. 이번 기회에 우리의 만남이 얼마나 가볍고 별
볼일 없는 인연인가를 맘 속 깊이 깨닫게 된 거야.
- 영미야, 그렇지 않아. 외할머니 댁에 아무와도 연락 안 하고 공부하면서도 늘 니 생각만
했어. 믿어 줘.
나는 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길만이 그녀의 존재를 존중해주고 돌아서려는 그녀
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으며 또한 내 친구 용흥이를 위한 길이라는 판단이 머릿속 떠올랐
다.
- 그런데 왜, 영미, 니 친구하고 용흥이도 자주 안 만난 것 같던데?
- 얘는 우리가 지금 남의 관계를 신경 쓸 계제냐?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확실히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이제는 좀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서 분위기도 한결 어색함이 사라져갔다.
- 니 친구는 잘 있니? 용흥이는 어제 만났는데 잘 지내고 있더라. 네 친구를 많이 보고 싶
어 하는 것 같더라.
- 내 친구도 잘 있는 편이지. 그런데 너하고 비슷한 입장이야. 걔가 서울 보건 전문 대학이
맘에 안드나 봐. 4 년제 간호학과를 가려고 재수 준비를 하고 있어. 나도 만날 시간을 내기
가 어려울 정도야. 아마 용흥씨로부터 데이트 신청도 거절했을 거야.
난 그제야 영미의 친구와 용흥이가 왜 잘 안 되는 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참, 누구는 진
짜 재수 공부를 하고 있고, 나는 위기를 모면하려 재수를 준비했노라고 거짓말로 둘러대야
하다니 세상 일이 참 우습다는 생각도 했다.
커피숍의 스피커에서는 한 때 잠깐 떴다가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을 쉬었던 '조용필'의 노래
'창밖의 여자' 라는 애처로운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 노래를 들으며 또 은경이가 떠올랐다.
'은경이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건강은 완전히 회복이 됐겠지? 휴교가 끝나면 다시 밝
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까? ' 멍하게 잠깐 잡념에 빠졌다.
- 너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니? 아직도 재수냐? 그냥 다니냐? 를 고민하는 중이니?
- 아니, 지금 들려오는 노래가 너무 좋아서, 시골에 무슨 문화시설이 있냐? 그냥 라디오 들
어가며 지냈었는데, 이 노래가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였어. 아마 '배명숙' 이라는 드라마 작가
가 직접 드라마 줄거리에 맞게 가사를 쓰고 조용필이 곡을 붙였을 거야. 노래가 하도 좋아
서 일부러 노래 들으려고 드라마 시간에 맞춰 라디오를 틀곤 했었는데, 이번 조용필이 판을
내면서 타이틀곡으로 붙인 모양이야.
- 그건 그래. 요즘 온통 조용필 바람이야. 라디오, 텔레비젼, 가리지 않고 조용필의 노래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들을 수 있지. 저 곡이 확실히 힛트한 다음에도 같은 판에서 '단발머리'
'돌아오지 않는 강'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슬픈 미소' 등등 물론 방송 금지 당하기
전에도 불렀던 '돌아와요 부산항에' 도 저 판에 있지. 한 마디로 모든 곡이 전부 히트곡이라
고 보면 맞아. 그런데 너, 공부하고 왔다는 사람이 최신 곡을 다 알고, 거짓말 한 건 아니겠
지?
- 라디오밖에 들은 게 없다고 그랬잖아. 그 시골에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술집도 한참을
차 타고 나가야 있는 곳이야. 그러니 기껏해야 라디오나 들을 수밖에 없었고 저 노래를 잘
알게 된 것 뿐이야. 저 판 하나 사야겠다. 너도 하나 사 줄까?
- 거절하진 않을게. 하지만 니 괘씸했던 행동을 벌써 모두 용서하는 건 아니야.
- 알았어. 내 진심으로 사과할께.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 우리 더운데 시원한 냉면이나 먹으러 갈까?
- 이 근처 냉면 잘 하는 집이 있어?
난 그 순간에도 고 1 때, 눈 내리는 날 은경이와 태능 스케이트장에 갔다가 청량리 미도파
에서 피자와 잡채를 사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약속 장소를 청량리로
정한 것도 무의식 중에 은경이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영미에게 정말
미안한 느낌을 가졌다.
- 백화점 지하가 무난하지 않을까? 청량리 미도파 말이야.
- 너 거기 가봤니?
- 아니, 그냥 백화점 지하에 음식코너가 있다는 상식쯤은 알지. 밖에 나왔다가 특별히 먹을
메뉴가 떠오르지 않고 혼자 끼니를 때워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백화점 지하로 가곤 해. 어릴
때부터 어머님을 따라 백화점을 다니다가 붙은 습관이야.
나는 참 거짓말을 잘도 둘러대고 있었다.
- 그래, 그럼 니 말대로 나도 '아점'을 먹은 상태라 시장끼가 도네. 청량리 미도파로 가볼
까?
- 그러자, 거기서 내가 조용필 판을 선물하지. 나도 한 장 사고. 좋은 노래가 그렇게 많다니
한 장씩 사도 돈이 전혀 안 아깝겠다.
맘모스 호텔 커피숍을 나오기 위해 문을 열자, 가게 안의 냉방된 공기와 밖의 더운 공기가
가래떡 썰듯이 나누어지면서 늦은 여름의 축축하고 더운 공기가 확 느껴지고 아직도
더운 계절임을 실감하게 했다.
우리는 청량리 미도파 지하에서 물냉면을 사 먹었다. 냉면을 먹는 그녀를 보며 또 은경이
생각을 했다. 긴 머리를 계속해서 귀 뒤로 넘기며 잡채를 먹던 그녀가 떠올랐다. 짧은 컷트
머리의 영미가 긴 머리의 은경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년 전에 이 곳, 바로 이
곳에서 그 해 겨울, 은경이와 나는 나란히 앉아 잡채를 먹었었지. 그 날의 기억이 한 편의
색 바랜 동화책의 그림처럼 떠올랐다. 그래, 크리스마스 무렵이었어. 팻분의 감미로운 노래
가 아이스 링크를 가득 채웠었고, 우리 둘은 고 1, 고 2 의 꿈 많은 소년 소녀였지. 그런데
지금은 이게 뭔가? 나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는데. 물냉면을 먹으며, 끊임없는 잡
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물론 은경이 생각이었다.
- 무슨 남자가 물냉면 한 그릇을 그렇게 오래 먹니?
- 응, 난 찬 거를 빨리 먹으면, 소화가 잘 안돼. 어릴 때 젖 배를 곯아서 그런가봐. 우유도
꼭 뎁혀서 마셔.
- 그렇구나. 그래서 그렇게 빼짝 말랐니?
- 나 이래봬도 강단 있다. 왠만해선 감기도 안 걸려. 너 마른 장작이 화력이 센 거 모르니?
- 얘는 국어국문학과에 다니는 애가 말을 마구 갖다 붙이네. 거기서 말랐다는 것은 물기가
없다는 뜻 아니니?
- 참 이과 출신은 다르다니까? 넌 고등학교 때 '중의법', '함축적 의미' 뭐 이런 것도 안 배
웠냐?
- 냉면도 빨리 못 먹으면서 화력 운운하기는 쯧쯧...
- 어쨌든 보기보다는 건강하다는 뜻이야.
우리는 그렇게 저녁을 일찍 먹고, 디저트로 아이스 크림을 먹었다. 그리고 극장에서 '미키
루크'가 나오는 '오뎃사 파일' 이라는 영화를 한 편 보았다.
꽤 늦은 시간이 되었다. 그녀의 집, 전농동 해바라기 아파트까지 그녀를 바래다주었다. 머릿
속에는 은경이 생각으로 가득하면서도 얇은 옷 속의 영미의 육체를 떠올렸다. 빨간 민소매
에 몸에 꽉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샌들을 신고 있었는데, 이 더위에 팬티 스타킹
을 신었을 리는 없고, 흰색 판탈롱 스타킹을 신고 있어서 스타킹 속으로 보이는 그녀의 발
가락에 시선이 가자, 나의 젊음이 느껴졌다. 엄지 발가락에는 빨간색 패티큐어를 칠했었다.
아! 나란 인간은 왜 이리도 마음 따로, 생각 따로 일까? 나는 오늘 그녀를 바래다주며, 키스
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해바라기' 아파트는 이미 가 보았고 이미 그녀의 입술을 두 차
례 훔친 경험이 있는 나였기에 오늘도 자신이 있었다. 우리는 전농동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
다. 그녀의 흰색 스타킹으로 살짝 가려진 발 뒷꿈치와 아킬레스건이, 접어 입은 청바지 밑으
로 나의 시선을 자극했다. 또한 버스를 먼저 탈 때 눈에 띤 알맞은 크기의 그녀 엉덩이에
시선이 고정되면서 그녀에 대한 건강한 나의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계속)
2004. 4. 18.
※ 요찬아,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어떨까? 그 시절 대단한 힛트곡이었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