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김지하, 그리고 이명박
(서프라이즈 / 엘파소 별 / 2009-05-20)
현재 한국사회의 현상을 ‘가치혼돈으로 인한 타락의 가속화’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최근 이 현상에 황석영이라는 작가가 동승하여 한국사회의 타락에 기여하기로 하면서 나온 변명과 김지하의 변호가 어떻게 이명박 코드와 일치하는 지 생각해보려 한다.
우선 김지하는 황석영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작가는 좌 우를 오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라고 변호하면서 ‘변절자’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속 좁고 낡은 인식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 정도로 무시하며 가르치려 하는 듯 하다. 황석영에 대한 김지하의 변호는 자신이 여전히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세계에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1년 대학생들의 분신에 대하여 생명의 소중함을 충고한다면서 조선일보에 기고했던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 환상을 갖고 누굴 선동하려 하나”를 기억한다. 맞는 말이다. 그가 생명사상에 심취하면서 자신의 사상에 충실하게 입장을 밝히는 것은 자유고 옳다. 후배들을 향해 죽음의 행진을 멈추라는 애정어린 호통을 할 수 있다. 그것이 본인에게 정직한 일이다. 문제는 왜 하필 조선일보에 들어가 호통을 쳤느냐가 문제였다.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상처 받은 게 아니라 조선일보를 앞세워 호통을 친 일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부분은 본인도 잘못이었음을 시인했으니 아무리 좋은 내용을 말했다 해도 방법이 흉기가 될 수 있음을 몰랐다는 점은 그의 한계였다. 그는 생명사상을 말하면서 상처투성이의 한국의 현장을 떠났다. 조선일보의 죄악에 대하여서는 묻지 않고 자신의 생명사상에 심취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강경대가 맞아 죽어도 말이다. 오늘 용산에서도 똑 같은 일이 벌어졌지 않은가? 과연 김지하는 그의 말대로 반성했는가? 과연 그는 조선일보에 썼던 자신의 원제처럼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황석영의 변호에서 그 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황석영이 주장하는 ‘알타이문화연합’ 이야기를 그의 블러그에서 읽어보니 작가적 상상력으로 쓴 글이라 아름답기가 그지 없었다. 옳다. 평화열차를 타고 세계적인 작가들과 함께 한반도의 평화에 대하여 전세계의 이목을 끌어보겠다는 문화적 발상은 작가로서 아름답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시베리아와 유럽까지 철도를 이어보자던 우리의 환상적이면서도 야무진 꿈을 지난 1년 사이에 다 짓밟아버린 이명박 옆에 서서 마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듯 선전하는 것은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들어가 운동권을 질타한 사건보다 더 충격적이다. 아닌가? 술이 취해 밤늦게 집에 들어와 기다리던 아내와 잠자던 아이들을 깨워 마구 두들겨 패놓고는 내일부터 행복한 가정을 새롭게 세우겠다고 하는 말과 뭐가 다른가? 이 정도면 정신적 질환으로 봐도 된다.
예술가들이 자기 세계에 집착하여 이기적일 수 있는 점은 이해하지만 ‘타는 목마름’을 부르며 몸을 내던졌던 80년대 젊은 피 앞에서, 고난 받는 민중 앞에서 김지하, 황석영은 예의를 지켜야 한다. 세월이 지나보니 그 때가 유치해 보이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이 아니다. 그 시절 죽음으로 저항할 수 밖에 없는 캄캄한 절망 앞에서는 그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신의 입장과 생각이 바뀌었다고 등을 돌린다면 참으로 이기적인 사람이다.
창작을 업으로 삼는 작가의 변신은 김지하의 말처럼 자유다. 그러나 그들의 가치와 사상을 같이 호흡하며 그들의 세계를 함께 만들어온 독자들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한다. 독자들에 대한 빚을 다 갚았다고 생각하는가? 정치인들이 표를 준 유권자를 배신하면 안 되는 것처럼 작가도 그 정도의 도덕성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작가의 자유를 주장한다면 독자들의 비판도 자유며 그 비판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독자들을 훈계하듯 자신들의 자유만을 내세우는 김지하는 아직 철이 덜 든 이기적 사춘기 같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의식의 얕음을 보며 이명박의 경박함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문학적 표현으로 화려하게 변명하지만 논리적 비약만 있을 뿐 고민은 없어 보인다. 황석영은 그의 블러그에서 자신이 한국사회의 금기를 깨는 선구자처럼 생각하는 듯 하다. 과연 좌에서 우로 건너감으로써 금기를 깨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선구자인가? 현재 한국의 문제가 좌우의 문제라고 보는가? 마치 좌우론이 한국사회의 요술방망이처럼 사용되는데 김지하나 황석영도 그 한계 안에 있어 보인다. 좌는 도덕성이 생명이고 우는 도덕성을 묻지 않는다. 그런 인식인가? 이명박과 함께 ‘알타이문화연합’을 성사시키면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는가? 좋다 백 번 양보해 다 잘 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방송을 머슴 부리듯 하고 연예인을 술시중 들게 하며 국민을 피지배자로 보는 검찰과 경찰과 법원도 회개하고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김지하, 황석영, 그리고 이명박은 수단과 방법을 묻지 않고 결과만 좋으면 만사 대통이라고 믿는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박정희의 과정은 묻지 말고 경제발전을 이룬 결과만으로 그 자신은 물론이고 아무 하는 일 없는 딸 박근혜까지 추앙하는 한국사회의 정서로 태어난 이명박 정부와 그런 점에서 세 사람은 코드가 일치한다. 이명박은 국민과 소통할 생각은 않고 운하를 파서 좋은 세상이 오면 그 때 국민이 이해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어째 김지하와 황석영의 인식과 일치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국민은 자신들의 높은 뜻을 이해 못하니 잠자코 따라만 오라는 투다. 세상과 단절하고 자기 세계의 동굴에 갇혀 있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시를 쓰던 소설을 쓰던 학문을 하던 가치 탐구가 아닌가? 금기를 넘고 때로는 십자가에 달려 처절하게 기꺼이 피흘리며 죽는 일도 ‘가치’ 탐구이며 가치의 실천이다. 김지하와 황석영의 변명에 가치는 무엇인가? 방법과 과정은 가치의 실현이다. 결과는 그 가치의 열매다. 따라서 방법과 그 과정이 나쁘면 결과도 정당하지 않다. 이 것이 두 세 사람 이상 함께 사는 사회의 상식이다. 그런데 황석영, 김지하는 이 상식을 뭉개버리고 사회적 타락을 부채질한다. 이명박 하나만으로도 이토록 망가지는 한국사회의 논리적 허약함을 이용하여 김지하와 황석영의 변명은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려는 노욕으로 보여진다.
사람은 언제나 변한다. 사상도 철학도 가치도 변할 수 있다 그 것은 그 사람 개인이 책임 질 인격이다. 그러나 신문에 글을 쓰며 돈을 받고 책을 내며 대통령 옆에 설 때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 황석영, 김지하, 이명박 그들의 자유와 권리는 인정하지만 책임은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국민은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자유가 있으며 독자들은 작가에 대한 비판의 자격이 있다. 그것은 가치를 지켜가기 위한 시스템이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등을 돌리면 국민도 대통령을 버릴 권리가 있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등을 돌리면 독자도 작가를 버릴 권리가 있다. 이 길이 사회의 타락을 막는 장치다.
황석영, 김지하, 그리고 이명박, 오늘 한국사회의 가치적 수준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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