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은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
(서프라이즈 / 우연히 / 2009-06-11)
경향신문은 반성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 수준이, 성향이 원래 그렇다. 이하는 내일자 경향신문 포럼이다.
[경향포럼]유월 연서
새벽녘, 열린 하늘이 두 눈두덩이에 강렬한 빛감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서늘한 기운의 궤적을 훑으면서도 차폐된 동공을 차마 열어내지 못합니다. 망연자실은 눈을 뜨면 살인적 일정으로 치달아야 하는 닫힌 형국 때문만이 아닙니다. 강희남 목사 자살. 역사적 6월은 이렇게 또다시 죽음의 행렬로 재현되는 것인지.
500만의 피눈물, 갈 길은 어디에
가지 않았습니다. 하얀 꽃무더기와 노란 리본 속 영전 앞에. 1989년, 꼭 20년 전 단병호 위원장 수배 문제로 민변 등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홀로 나와 서슴없이 따라나서던 한 변호사의 용기와 결단을 인간적으로 추념하며, 그의 죽음을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의 하나로 새겼을 뿐입니다. 거기 선 당신은 안타까우셨나요. 부분적 진실의 확인만으로도 그것을 연대고리로 힘을 합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다그치고 싶었겠지요. 그러나 인간 노무현과 노무현 정권은 별개의 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라크 파병, 공기업 민영화, 많은 노동자 구속과 억울한 죽음들. 불가피했다는 인간 노무현의 곤혹은 실은 무기력이고 배반이며, 신자유주의적 정권으로서의 자기 본질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고 역설하던 당신의 핏대를 떠올립니다. 지난해 명박산성 앞의 그 밤, 거대한 촛불의 분노 속에서 노무현 정권의 반민중적 귀결이 이 무도한 살육정치를 있게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감한 바 있지요.
잊으셨나요. 유시민이 복지부 장관 시절, 의료급여법 개악에 의한 빈곤층의 건강권 위협과 국민연금을 세계은행에 투자하는 펀드정책의 파국. 추모 열기 속에 노통의 승계자로 10% 지지율을 획득한 그 유시민을 보면서 이 500만의 피눈물이 제도권 정치의 미망에 다시 휩쓸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뇌합니다. 유시민이든 다른 제도권 정치가든 그들의 대두가 오늘의 반정부전선을 규합하고 새로운 정권 창출을 위한 어떤 작용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해결해줄 수 있는지요. 전직 대통령조차 어쩌지 못 한 이 절명의 상황, 그 절망을 함께 우는 500만의 통한을 해결할 당사자는 오늘 다시 촛불을 든 그 사람들뿐입니다. 130일이 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한 용산참사의 유가족들이 흘린 피눈물은 이 땅의 누구도 언제든 학살당할 수 있는 오늘의 참담한 지경을 절절하게 증언합니다.
통한의 시대 해결 주체는 ‘촛불’
지난 오월 촛불의 물결 속에서 문화가 정치가 되던 빛나던 광경, 그러나 그 발칙한 치열함의 미학이 진정한 주권정치의 문화혁명으로 전화되지 못하고 팬덤사이트의 기발한 ‘플짤’들로 소진되는가 했더니 다시 ‘지못미’의 문화정치를 점화시키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동행이 용산철거민 학살, 박종태 열사, 비정규직, 최저임금 그리고 미디어법 개악 등 정치적 쟁점들을 자기 문제로 부여잡고 박투하는 새로운 정치공간을 열어낼 수 있을까요. 수억 개의 그래피티로 뒤덮인 거리를 꿈꾸는 저 엄청난 창신력을 민중주권의 정치동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문화정치학을 열어내는 길은 무엇인지, 나의 아침은 생경한 언더힙합의 외침 속에 어정거립니다.
“이 판에 불을 붙일 무장된 라임과 다시 판에 던진 이 새로운 싸움의 비트로 손에 잡힌 마이크와의 타는 싸움, 불타는 판은 나를 만들 나의 싸움(가리온의 <무투>).”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6101751195&code=990509
<백원담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굳이 지금 입 아프게 윗 글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차후에 저들의 논리에 하나하나 답해 주겠다. 그 구역질 나는 얘기들을 하나하나 지적해주겠다. 그들의 속좁고 비뚤어진 정신세계를 하나하나 분석해주겠다. 지금은 그저... 진정한 반성문이라 보이는 글 하나를 퍼놓는다. 오마이뉴스의 어느 댓글에서 펌한 것을 발견한 것인데, 모 방송국 pd가 쓴 글인 것 같다.
[노무현의 귀환]
김진혁 PD | 눈 2009/05/26 14:20
아이러니한 일이다. 정말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를 비판했던-나를 포함하여-소위 '진보적'이라고 하는 이들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왜일까? 그저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에 인간적인 미안함이 느껴저서? 그저 그게 다일까?
아니다. 결코 그것이 다가 아니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은 그의 '정책'을 비판했다. 사실 '인간 노무현'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은 한나라당과 조중동이었지, 우리가 노무현이란 '사람'을 비판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그랬다는 것이지, 사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 '사람 노무현'에 대해 '의심'을 한 것이 사실이었다.
맞다. 우리는 그의 진정성을 은근히, 하지만 그가 눈치채기에는 충분한 수준으로 의심했다. 그도 별 수 없는 정치인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가 가졌던 '가치', 노무현이란 인물이 우리에게 주는 '상징'을 부지불식간에 폄훼했다. 그러니 우리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인 것이다.
'세상이 다 그런거지'
세상이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면서도, 세상이 그래서는 안된다고 핏대를 세우며 목청을 높였으면서도 사실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미워하는 이들과 같은 배에 승선했다. 그리고 그 배는 '정책'에 대한 비판이라는 행선지를 티켓에 써 놓았을 뿐, 그 배가 가는 곳은 그저 노무현의 심장 속, 혹은 우리의 심장 속에 있는 선한 가치를 향해 돌진하는 그러한 배였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적어도 '대략적으로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있다고 해서 그가 신자유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었고, 개혁이 결과적으로 만족할 만한 수준이 못 되었다고 해서 그저 다 무의미한 실패는 아니었음도 알고 있었다. 그의 언행이 거침이 때로 눈쌀을 찌푸리게 했으나 그것이 '소탈함'이라는 동전의 뒷면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가 모든 권위를 놓아 버림으로써 우리가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몰랐다. 아니 몰랐다기 보다는 '그거야 당연한거 아냐?'라며 히히덕 거렸다. 감사할 줄 몰랐고, 감사할 줄 모르니 오만했다. 그 오만함은 심지어 '이명박'이란 인물을 대통령의 자리에 앉히기 까지 했다. 그리고 우리는 기대했다. 노무현이 이뤄 놓은 것은 당연한 거니까, 그건 그냥 그대로 두고, 돈만 많이 벌게 해달라고...
진정성을 하찮게 여기고, 욕망에 심취한 결과는 우리안의 노무현을 죽이는 결과가 됐다. mb가 죽인 것이 아니다. mb를 뽑은 우리들이 죽인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노무현은 죽음으로써 이제 만신창이가 된 가치, 그 '진정성'을 다시 회복시켰다. 우리의 눈물이 어디 그저 인간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뿐인가? 아니다. 우리 안의 노무현, 우리가 그토록 믿고 사랑했던 '가치'를 외면했던 자신에 대한 속죄의 눈물이다.
그래서 노무현은 죽음으로써 다시 귀환했다. 그가 이런것까지 다 알고 그랬을까? 승부사니까? 웃기는 소리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저 상황에 맞게 적절한 승부를 띄웠던 승부사가 아니다. 그는 오직 진정성이라는 가치를 위해 항상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을 뿐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 이상의 승부란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 가치를 지키기 위해 개인적 이익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행위.
다름 아닌 '희생'이다.
나는 노무현이 그저 정치적 승부사이고, 그의 자살마저 그렇게 보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러면 세계 최고의 승부사는 '예수'인가? 더 길게 말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켰으며, 그래서 다시 우리에게 되돌려 준 '진정성'이라는 가치를 우리가 지켜내는 것이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상식'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이상 사사로운 이견으로 반목해서는 안된다. 그저 반사시익을 통해 연명하려 해서도 안된다. 진정성의 가치 아래 하나로 뭉쳐야 하며, 그를 통해 그가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지켜낸 가치를, 이제 하늘나라에 가 버린 그를 더이상 외롭게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반 mb가 아니라, 노무현의 이름 아래 뭉쳐야 한다. '정치인' 노무현이 아니라, '진정성'의 상징인 노무현 말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흘린 눈물이 그저 소금기가 섞인 물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다.
만약 며칠 눈물 흘리고 또 다시 뿔뿔이 흩어져 이해관계 속에서만 움직인다면, 우리에겐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아무리 상상을 해 봐도 또 다른 노무현이 우리에게 나타날지는 기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에게 유일한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확신한다. 그는 반드시 돌아올 것을 말이다. 비록 그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가치는 온전히, 아니 더 뚜렷하게 우리 안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조각으로, 아주 작은 흔적으로 하지만 그 무엇보다 거짓없이 우리 안에 노무현은 살아 있다.
그러니 우리가 다시 뭉친다면, 우리 안에 아주 작게 흩어져 있던 노무현이 다시 온전한 하나의 노무현이 될 것이다. 마치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저 수많은 추모 인파의 마음 속에 있는 노무현의 조각들이 조금씩 맞춰져 온전히 활짝 웃는 그의 얼굴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니 그저 슬픔으로 이 모든 시간을 끝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저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으로만 보내서도 안 될 것이다. 그가 다시 돌아 왔을 때, 그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주저 없이 그의 손을 잡고 반갑게 악수를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몫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의 귀환, 노무현의 완전한 귀환을 기다리며...
*출처 : http://blog.daum.net/jisike/7891811
ⓒ 김진혁 PD의 e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