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잠시 갔다 오는 지인에게 부탁을 해 '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 (물리학자 이승헌 저, 창비 발간)를 읽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표현의 자유와 과학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길 바란다.
1972년 아폴로 17호가 촬영한, 파란 바다와 하얀 구름의 지구 사진, “Blue marble”의 아름다운 모습에 누구나 경외감 느끼게 된다. 요즘이야 지구가 도는 게 초등학생도 다 아는 상식이지만, 얼마 전만 해도 태양이 도는 게 당시의 진리였다. (물론, 태양계 이상의 Galaxy 차원에서 보면 태양도 더 큰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지동설을 설명하는 책자를 실제 저술해서 발간할 지 여부를 죽는 날까지 고뇌했다. 해가 도는 것으로 알고 있는 종교와 세상으로부터의 공격과 비난을 견뎌낸다는 것은 상상하는 것조차 어렵기 때문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주장을 적은 40쪽 논문, “Little Commentary”를 주위 지인과 동료들에게만 배포했다. 내용을 본 동료 학자(Rheticus)의 종용과 자신의 결심에 따라 405쪽의 책, “On the Revolutions of the Heavenly Spheres”를 출간하게 되는데, 1543년 책이 나오자마자 70세, 고희(古稀)의 노구(老軀), 코페르니쿠스는 사망한다. 그는 책 제목 그대로, 역사적인 코페르니쿠스 혁명(revolution)을 불러 온 혁명가였다.
출판을 도와준 사람(Andreas Osiander)은 코페르니쿠스를 나름대로 보호한다고 책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책의 가설들은 사실일 필요가 없으며, 가능성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단지 천체(天體) 운행을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수식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For these hypotheses need not be true nor even probable. On the contrary, if they provide a calculus consistent with the observations, that alone is enough.”)
코페르니쿠스가 당시 교황을 수신자로 한 별도 서문에서도, 이 이론은 물리적인 측면이 아닌 수학 산식의 측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써 놓았다. 혁명이었기에 진리를 말하되, 당대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했던, 고난의 과학사였다. 순수한 과학자들이 소설가가 아님에도, 암흑시대 분위기에 맞춰, 문장을 가다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번뇌를 했겠는가.
http://www.webexhibits.org/calendars/year-text-Copernicus.html
이어서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도 1633년 종교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고 종신 가택연금과 사후 장례식을 하거나 묘비를 세우는 것을 금지한다는 명령을 받는다.
갈릴레이가 - 고희에 가까운 68세가 되어서 - 1632년 발간한 “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는 물론 코페르니쿠스의 책도, 금서목록에서 제대로 해제된 것은 거의 300년이 더 지난 1835년이 되어서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탐험선, 비글호를 타고 5년간(1831-1836) 여행한 후,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에 의해 종(種)이 분화 발달한다는 이론을 구상하고 나서도, 이후 거의 20년 동안 책을 저술할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종교와 사회의 탄압과 매도가 당연 예상되기 때문이다.
당시 같은 분야인 생명 진화를 연구하던 왈라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가 종의 변이에 관한 논고 (1858년, “On the Tendency of Varieties to Depart Indefinitely From the Original Type”) 를 다윈에게 참고와 자문을 위해 보내게 되는데, 다윈이 이에 자극받아 비로소 저술을 착수하여 1859년 종의 기원 (초판 제목 :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을 완성한다.
다윈은 책 마지막에 '이 책은 인간 기원과 역사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줄 것이다.' 와 같이 아주 조심스럽게 언급해 놓았다. 이것 외에는 책에 인간 역사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이후 13년이 지나 6판에서, 'light' 앞에 겨우 'much'라는 단어 하나를 더 추가했다.
초판(1859년) “Light will be thrown on the origin of man and his history.”
6판(1872년) “Much light will be thrown on the origin of man and his history.”
http://darwin-online.org.uk/
요즘 언어학, 예술 분야까지도 대부분 학문에서 진화론이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는데, 이는 다윈 이론이 고통 속에 만들어진 당시에 비추어 보면 상상이 불가능하다.
정치 이데올로기도 과학을 크게 위협한다. 구 공산주의 소련에서 광범위한 학문이 탄압과 검열을 당했다. 유물사관과 전혀 관련이 없는 물리학에서조차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 등이 이상적 허구로 비판을 받았다.
위대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서양철학사' 서문에서, 역사를 통틀어 그리스 문명이 탄생한 것은 가장 놀랍고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물론 그 전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이 있었고, 그리스 문명은 그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리스에서 진정한 과학과 철학, 민주주의가 처음으로 출현했다. 분명, 과학 정신이 민주주의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비옥한 초승달의 수학은 ‘rules of thumb’에 불과했고, 과학(science)이 아닌 기술(technology)에 머물렀다. 궁극적인 과학은 왜(why)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인데, 어떻게(how)는 다음 하위의 기술적 차원이다. 동양에서도 과학은 결국 나오지 못했고, 기술이나 공학만 있었다. 동양에서 전래되었다고 하는 제지나 화약 제조는 기술이고 방법이지 과학이 아니다. 근원적 답이 없이도 기술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로마제국의 건축, 도로와 같은 엔지니어링은 지금 봐도 경이롭지만, 과학은 오히려 후퇴하였다. 그리스를 제외한 모든 문명이 자력으로 과학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리스 과학은 천년 넘게 사라졌다가, 이슬람에 남아 있는 일부 문헌을 중세 말기 유럽이 재발견했다. 당시 유럽이 그리스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는데만 거의 일백년 넘게 걸렸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없었던 그리스 문명에서 민주주의가 탄생했다. 지금 적지 않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곧 민주국가는 아니다. 자연에 대해 근본적 지식을 주는 과학정신 없이는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과학은 표현과 학문의 자유가 없이는 죽는다. 과학의 발흥은 자유를 찾아 움직여 왔다. 피타고라스와 데모크리토스가 활동했던 그리스, 수백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최대 도서관이 있었던 헬레니즘 시대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갈릴레이와 다빈치의 이태리 도시들, 데카르트나 스피노자가 살았던 자유로운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순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아인슈타인와 같이 무수히 많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유럽 나치와 구소련의 이데올로기 핍박을 피해 학문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 왔다. 그리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치르는 혼란 중에도 자유로운 토론이 활발한 민주주의와 과학을 유지했다. 남북 대치가 진실을 추구하는 과학적 양심을 억압하는 구실이 되면 나라의 장래가 없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천 오백년 전 그리스 문명보다 처진 상황이다.
탄압과 공격에 맞서 과학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저자의 용기와 노력에 경의와 찬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