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덕-정세균 승부로 유권자의 현주소를 볼 수 있다
(서프라이즈 / 화씨911 / 2012-03-13)
홍사덕(洪思德). 그의 이름을 한자음으로 풀이하면, 큰물洪 생각思 큰德.
큰물은 넒은 바다일 수도 있고 깊은 강일 수도 있으나 큰 비가 내리면, 즉 洪水가 나면 ‘큰물이 졌다’고 한다. 亂離도 불난리, 전쟁, 지진, 화산폭발, 물난리 등 여러 난리가 있으나 가장 흔한 난리가 물난리다. 태풍도 비구름을 동반하지 않으면 큰 피해가 없으나 비구름과 함께하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다. 일단 큰물은 자주 지고 그 난리는 누군가를 괴롭게 한다. 이 난리통에 생각(思)은 어떤 것을 할 수 있으며 무슨 큰 덕(德)을 세울 수 있을까? 홍사덕 의원이 서울 종로로 지역구를 옮겨 국회의원 7선을 노린다고 하여 생각해 본 것이다.
1. 홍사덕은 중앙일보 기자출신으로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2. 전두환의 정계개편 기획에 따라 민정당 2중대로 불렸던 민한당에 영입되어 자신의 고향인 영주 영양 봉화 지역구에서 1981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므로 국회의원이 된다. 당시 민한당은 박정희 시절 강성야당이던 신민당의 주력 정치인들 대부분을 전두환이 정치규제로 묶어버린 뒤 남은 이들로 창당된 관계로 관제야당으로 불렸다.
3. 이 유치송의 민한당에 대항, 1885년 정치규제에서 풀린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가 주축이 되어 신한민주당을 창당한다. 홍사덕은 바로 이 당으로 말을 갈아탄다. 그리고 신민당 돌풍과 함께 다시 자신의 지역구에서 당선되므로 2선 의원이 된다.
4.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하다. 1985년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민한당을 몰락시킨 신한민주당은 전두환의 민정당과 건곤일척 싸움을 벌이며 국민직선 대통령제를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한다. 그런데 이 건곤일척 싸움을 벌이던 신민당이 다시 통일민주당으로 변하는 과정이 있었다. ‘이민우 구상’, 즉 당시 신민당 총재이던 이민우 씨가 민정당 측과 내각제를 밀실에서 합의하고 “민주화 조치가 선행되면 내각제도 수용할 수 있다”는 발표를 한 때문이다. 그런데 이 구상의 핵심이 홍사덕이었다고 당시 언론들은 보도했다. 결국, 당은 통일민주당으로 쪼개지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 정치의 현주소를 보게 하는 깡패들의 창당 방해사건, 이름하여 ‘용팔이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5. 1987년 6월 민중항쟁이 성공하고 대통령 직선제가 된 뒤 치러진 대선에서 민정당의 노태우가 당선된다. 그리고 야당은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으로 양분되었다. 1988년 총선, 홍사덕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도 김대중의 평화민주당도 부름을 받지 못했다. 내용인즉슨 그의 양김(김영삼-김대중)정치 타파 운동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 슬로건을 들고 무소속으로 서울 강남을구에 출마했으나 민정당 이태섭 후보에게 패하면서 낙선한다.
6. 1990년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은 신민주공화당 김종필과 함께 여당이던 민정당과 합당을 하는 3당합당을 단행한다. 당시 3당합당을 거부한 이기택은 노무현 김광일 박찬종 등과 민주당을(꼬마민주당) 창당하는데 이때 홍사덕도 참여한다. 그리고 1991년 이 민주당은 김대중이 이끄는 신민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이 되는데, 이에 합류하여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강남을에 당선된다. 이로써 3선.
7.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 김대중이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으로 떠났다가 귀국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이에 반발한 이기택 이부영 노무현 등은 민주당으로 15대 총선에 임했다. 그러나 홍사덕은 이때 민주당 당적이 아닌 무소속으로 다시 강남을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된다. 어느덧 4선 의원이다. 이 선거에서 노무현 이철 유인태 등은 모두 낙선하였고 이부영은 당선된다. 이후 이 세력 중 노무현 김원기 등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하지만 이부영 이기택 김홍신 등은 조순과 함께 이회창의 신한국당과 합당, 한나라당 창당멤버가 된다.
8. 김영삼 정부 말기 홍사덕은 무소속 의원 신분으로 정무장관이 되어 김영삼 정부의 각료로 변신한다. 그러나 당시 여당의 당적은 갖지 않은 무소속 정무장관이었다.
9. 김대중 정부 당시인 2000년, 무소속 의원인 홍사덕은 장기표와 함께 신당 ‘무지개연합’을 창당한다. 그런데 갑자기 이 신당에서 이탈하고 돌연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비례대표 2번을 받으므로 장기표를 또 낭인으로 만든다. 그렇지만 그 자신은 다시 국회의원이 된다. 이제 5선 의원이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 홍사덕은 박근혜와 함께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한나라당의 총선 승리를 이끈다.
10. 여기가 또 중요한 대목이다. 한나라당 비례대표 2번을 받아 당선된 홍사덕은 국회부의장이 된다. 2년 후 국회부의장 임기가 끝난 뒤에는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된다. 그리고 당시 당 대표이던 최병렬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키는 주역이 된다.
11. 2004년 탄핵 후폭풍 속에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거, 홍사덕은 한나라당 공천으로 고양시 일산갑구에 출마하나 한명숙에게 지면서 낙선한다. 두 번째 낙선이다. 하지만 1년 후 경기도 광주시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공천을 강력히 요청했음에도 ‘탄핵주역’이란 이름 때문에 공천을 받지 못했다. 이에 홍사덕은 한나라당을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하지만 낙선, 그의 세 번째 낙선 이력이 또 생긴다.
12. 2007년 대선 과정.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홍사덕은 박근혜 후보 경선 선대위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이명박과 전쟁을 치른다. 하지만 박근혜는 패퇴하였고 그도 2008년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서청원 이규택 등과 친박연대를 급조, 대구에서 출마 당선되므로 현 의원 중 최다선인 6선 국회의원이 된다. 이후 곧바로 친박연대를 탈당, 한나라당에 합류하므로 현재는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이다.
13. 이번 총선에서 홍사덕은 한나라당의 영남 다선의원 물갈이 여론에 따라 대구지역구 공천을 신청하지 않고 당에 일임한다고 했다. 하지만 당은 그를 종로에 전략공천했다. 하여 이번에 당선되면 7선 의원이 된다. 그러면 우리 역사상 국회의원 생활을 가장 오래 한 인물로 남을 수 있다. 또 한나라당이 1당이 된다면 19대 전반기 국회의장직은 거의 따놓은 당상이다.
뱀발) 지금까지 7선 의원으론 전 민정당 대표를 지낸 故이재형 씨와 전 신민당 부총재 등을 지낸 故정일형 씨가 있다. 하지만 우리 정치 역사가 격변기였던 탓에 임기 1년 또는 2년이었던 시기가 부지기수다. 1958년에 당선된 4대 민의원들은 1960년 4.19혁명으로, 4.19 혁명 3개월 뒤인 1960년 7월 치러진 선거에서 당선된 5대 의원들은 1년 뒤 5.16 쿠데타로 의원직을 잃어 각 2년 또는 1년 남짓만 국회의원 생활을 했다.
또 1971년 5월 총선에서 당선된 8대 의원들은 1972년 10월 단행된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로, 1978년 12월 치러진 선거에서 당선된 10대 의원들은 1980년 전두환의 5.17 쿠데타로 각각 1년 또는 2년 남짓의 국회의원이었다. 따라서 현재 우리 정치사에서 4년 임기를 7선이나 한 정치인은 없다. 그러므로 현재 6선인 정몽준 홍사덕 등이 가장 긴 국회의원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대단한 정치적 운을 가진 사람들이다.
물론 홍사덕도 임기가 3년 남짓이었던 12대 때 의원이었다. 하여 6선이지만 23년간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 그래도 이번에 당선되어 7선이면 국회의원만 27년이다. 1943년생이니 올해 그의 나이는 우리 나이로 딱 70세, 만으로 69세다. 생애 69년의 1/3인 23년 동안 국회의원, 유년기와 학창시절, 군대생활을 빼고 보면 그의 생애 거의 전반이 국회의원이었다는 거다.
그의 정치적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탁월한 선택을 잘 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의 정치인 자질이 그만큼 훌륭한 것인지는 각자가 평가하기 나름이다. 그러나 민한당-신한민주당-무소속-통합민주당-무소속-한나라당-무소속-친박연대-한나라당까지 홍사덕의 당적변경 역사를 보면서 드는 소회는 정치인을 선택하는 국민들의 심리를 알 수 없다는 것.
그래서다. 이번 종로선거의 결과를 보면 우리 정치의 미래를 볼 수 있다. 과연 홍사덕은 또 국회의원 배지를 달 것인가? 또 홍사덕 국회의장이 나올 것인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화씨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