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글이 뜸합니다. 그래서 칸을 늘리려고 염치 불구하고 하나 올립니다. 귀엽게 봐주세요.>
사람을 좋아해야 한다. 그저 사람으로서 사람이 좋아야 삶의 맛과 멋이 찾아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텅 빈 공간에 홀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외로움을 한껏 만끽하고 있으면서도 습관처럼 사람을 망각하게 된다. 아무런 의식 없이 피하려는 습성이 몸에 가득한 모양이다. 산책을 하더라도 한적한 곳이 좋고, 여행을 가더라도 사람이 없는 곳을 찾고 싶었다. 멋진 사진 한 장을 찍으려 해도 사람이 방해물인 것처럼 여겼다. 처녀지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보니 사람이 사람 없이는 사람일 수 없겠다. 자연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꽃도 그렇고, 풍경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일을 마치고 해지는 정경을 보고자 송화강변에 나섰다. 만주의 8월은 우리의 9월과 10월이다. 하늘을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바람은 선선하다. 아무 거리낌 없이 내리쏟는 햇빛은 가을 벌판의 곡식을 여물리기에 적절하다.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가을 벌판이 떠오른다. 그러나 만주의 너른 벌판엔 옥수수가 가득하다. 습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청량한 바람은 모두를 말려버릴 것 같다. 사방 어디를 봐도 막힘이 전혀 없다. 제법 폭이 넓은 강변은 마음을 풀어놓기에 제격이다.
강변에는 여느 날과 같이 여가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짝을 지은 젊은이들은 나란히 앉아서든 걸으면서건 연신 그 감정을 표현하기에 여념이 없다. 만지작거리고, 히히덕대고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아직 짝이 없는 애들은 제 나름대로 멋진 자세를 취하고 다소곳이 앉아 있기도 하고, 배회하며 쉴 새 없이 눈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화강암을 덮어 만든 스탈린 공원의 광장에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 있다. 스펀지를 붓날처럼 깎아 막대기에 매단 커다란 붓으로 물을 찍어서 글씨를 쓰는 노인네들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그 솜씨가 여간 좋지 않다. 대부분 옛 시구를 외어 쓰는데, 해서든 행서든 초서든 가림이 없다. 종이에 옳기고 낙관을 찍으면 곧 멋진 작품이 되고도 남을 정도다. 곧 말라 없어질 글씨를 하염없이 써댄다. 이를 구경하는 구경꾼의 눈초리엔 호기심이 가득하다.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장사꾼들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 솜사탕, 과일, 물과 음료, 연, 풍선, 아이스크림,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간혹 구걸을 하는 누추한 노인네도 구성원의 하나이다. 나이에서 전해오는 세월의 무게와, 예와 서열을 포기해버린 표정이 서글픔을 불러일으킨다.
해질 무렵의 송화강변에서 모처럼 감정의 동요를 느낀다. 저무는 햇빛이 전해주는 아쉬움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동해 바다에 뜨는 해보다도 더욱 찬란하게 강 너머 지평선을 내려간다. 뒤돌아보면 그 빛에 붉어진 많은 사람들의 얼굴들이 한 눈에 가득 들어온다. 거의 모두 해를 향해 있다. 저 멀리 지평선에는 솟은 것이라곤 사람이 만든 굴뚝이나 케이블카 교각, 건물 등밖에 없다. 멀리 버드나무는 지평의 곡선을 건드리지 못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상식을 접어놓고라도 지평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꼭 그렇게 보인다. 문득 돌아서 바라본 사람들의 얼굴에서 듬뿍 정감이 전해온다. 누구도 말을 건네지 않는다. 각기 지들끼리 조잘거리지만 왠지 함께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온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렇기 때문에 견디고 사는가보다.
저들에게는 모두 조상이 있다. 사람에게서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니 말이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그저 세월이라 하기엔 부족하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저들의 조상들을 상상해본다. 대흥안령 산맥의 삼림, 거기에서 북쪽과 서쪽으로 끝이 없는 몽고의 초원과 시베리아, 군데군데 바다만큼이나 광활한 호수들, 남으로 거침이 없는 벌판, 여기를 터전으로 해서 흉노, 선비, 거란, 몽고, 돌궐, 타타르, 퉁구스, 회흘, 여진, 이름도 다양한 족속들이 살아왔다. 지독한 추위는 물론이고, 주위의 사람 덩어리와 싸우며, 양과 말을 길렀고, 흥안령에서 비롯된 많은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집단이 강해져 중원의 중심부를 호령하기도 했고, 유럽에까지 지배의 힘을 뻗치기도 했다. 예전의 북위, 요, 서하, 금, 원, 청 등등의 이름으로 나라를 지었다. 지금 그들의 나라는 없다. 오늘 이처럼 광대한 중국이라는 울타리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젊은이의 대부분은 돈벌이를 위해 저 남쪽 끝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언젠가 학교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종족의 용광로라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용광로는 오히려 지금의 중국에 어울린다. 그 작용이 오늘에서야 시작된 것은 아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여러 종족이 뒤섞여 오늘의 중국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근대국가의 건설과정에서 역사상 전개된 모든 종족의 영역을 한 나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더욱 그렇게 되었다.
오늘 노을을 잔뜩 머금은 저 많은 얼굴에서 흉노와 선비, 몽고와 돌궐 등등의 얼굴을 본다. 조선족도 적지 않을 것이고, 한족이 물론 제일 많을 것이다. 지금의 한족이야 어디 따로 표시가 나지 않는다. 그냥 한족이라고 하는 이들이 제일 많아서 한족이 많다. 그래서 저들에게서 한족보다는 북방의 여러 종족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족보상 난 신라의 후손이다. 어찌 알겠는가. 지금 성이나 족보가 없는 이가 없지만, 한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없는 이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우리 할아버지가 저 북방의 한 종족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저들에게서 정을 느끼는지 알 수 없다.
사람의 정감에서부터 시작되어 강 건너 저 너른 벌판이 고향처럼 다가온다. 그저 일을 하기 위해 낯선 곳에 와 있다는 생각이 사라져버린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예에 서 있는 게 낯설지 않다. 한국에 유학한 적이 있는 이곳 젊은 녀석에게 한국이 어떻더냐고 물었더니 대뜸 ‘산이 너무 많아요’라고 한다. 산이 없는 이곳과 달라 힘들었다는 말이다. 그 심정은 내가 안다. 지난 늦가을 양자강 하구의 퇴적지에 세워진 도시에서 2주일 넘게 지낸 적이 있다. 주위에서 제법 높은 호텔 위층의 창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가로지른 직선뿐이었다. 가도 직선, 와도 직선 그 단조로운 가로선이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집 앞의 개울과 앞 산, 이름 없는 산과 시내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중곡동의 용마산만이라도 잠깐 올라보았으면 소원이 더 없다고 할 정도였다. 1시간이 넘게 차를 달려 저 안쪽의 야트막한 산이 보이는 곳에 이르면 일순간에 온 피로가 사라져버렸다. 산이 보이는 곳에서 자란 놈에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산이 피로회복에 최고였다. 처지를 바꿔 보면 그 놈은 이렇게 지평선을 바라보아야 피로가 풀릴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절대’를 함부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
옹졸한 머리와 가슴에 변화가 인다. ‘나라’와 ‘민족’이라는 울타리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몽고 후른베얼의 끝없는 초원에서는 그 영역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에 살던 이들은 당장 서 있는 곳이 중요할 뿐이었을 게다. 가도 가도 항시 그러한 곳에서 영역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많이 나다니더니 내가 변했나보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쩌면 시대가 변했다는 판단을 하고 싶다. 근대에서의 민족은 대단히 중요한 테마였다. 그 가치를 누구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다. 공부하는 동안 늘상 하는 얘기가 이것이었다. 가치판단의 대부분을 여기에 기준을 두고 했다. 헌데 그 울타리를 벗어나려 하고 있다. 나다니다가 바람이 났나보다. 바람은 일정 구역을 벗어나는 것을 지칭하지 않은가. 분명 바람이 났음에 틀림이 없다. 또 한편으로 종교라는 데 집착하더니 근본적인 가치에 도달해서 모두를 하나로 보는 큰 차원에 다다랐나. 도통에 가까워졌나보다. 부처도 그랬고, 공자도 그랬고, 예수도 그런 비슷한 말을 주로 했다. 어쩌면 나도 이들에게 근접했을지도 모른다. 와! 오늘에서야 나는 엄청 훌륭한 놈이 되어버렸다. 모든 사람을 한 가족으로 여길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다 날이 어두워지니 집이 그립다. 전화를 하게 된다. 가족들의 목소리가 반갑다. 전화기를 놓고 나서, 무슨 개뿔이나 도통. 배도 고프다. 한 마리 날아든 모기도 성가시다. 그저 그럴 놈이 평온한 감정에서 읊고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화강과 만주벌판에 이는 정은 사실이다. 사람들도 정겹다. 예서 많은 시간을 보내도 될 성싶다. 지금 밖에서는 혼자 먼저 가려고 지랄하는 운전사 놈들이 제 탓인지도 모른 채 남에게 덮어씌우려고 경적을 마구 눌러댄다. 시끄럽기 이를 데 없다. 몇 년 전 쉽게 보던 장면들이다. 백화점에서는 아직 지나는 사람을 부르는 음악소리가 요란하다. 햇빛의 잔광마저 아예 사라져 어둠이 몰려왔다. 이 세상에서는 살아남아야 가치가 있다. 먹기 위해 살기도 하고, 살기 위해 먹기도 한다. 그러나 굶으면 엄청 배고프다. 이제 살기 위해 먹으러 간다. 만주고, 종족이고, 민족이고 간에 우선 먹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