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일이 모두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되는 일도 많겠으나 안 되는 일이 더욱 머리에 남는다. 운이라고 하기도 하고, 운명이라고 하기도 한다. 운이라고 하면 그래도 우연성이 개입되어 있어 심한 고통은 비교적 덜하다. 그러나 운명이라고 하면 묵직한 덩어리가 내려앉는다. 같은 의미를 가지겠으나 다가오는 감은 전혀 다르다.
청간정 기둥 옆에서 해가 솟기를 기다린다. 겨울이다. 언덕 위에 정자 밑은 새벽 찬바람의 길목이다. 마음이 급하여 너무 일찍 올랐다. 행여 짧은 순간의 해돋이를 놓칠새라 서둘렀던 것이 몸의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심한 고통이라면 오기라도 부려보겠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견뎌지는 어중간하게 낀 상황의 고통이 더 더럽다. 온몸이 서서히 식어가고, 땅으로부터 전해지는 냉기는 발을 앗아가버린다. 제자리의 뜀박질도 소용없다. 제 발이 아닌데 뛰어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무 짓도 하지 않은 늦은 해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크는 도중 어느 때인가 세상은 법칙으로 짜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찾아들었다.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기울고, 봄이 지나 여름이 오고. 태양계의 운행법칙을 송두리째 이해하고도 이 법칙에 대한 생각은 끝이 없이 번져나갔다. 이 몸뚱아리에 적용되는 법칙이 있을 것 같다는 데 미쳐서 사주팔자에 관심을 가졌다. 우주의 운행에도 법칙이 있고, 사람 하나하나에까지 그렇다면 이 나라엔들 없으랴. 모든 것이 그럴 것이라는 설익은 답을 내리고, 우선 인류의 아니 인류역사의 흐름법칙부터 찾아 이해해보아야겠다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게 된 계기였다.
그렇게 30년이 더 지났다. 죽을 때까지 철이 들지 않겠다는 각오를 한 지도 꽤 되었다. 하찮은 핑계를 잡아 밤을 타고 내달려 이 새벽 동해 바닷가에서 해를 기다린다. 해는 바뀐 지 반달이 지났고, 이 날에 특별한 의미도 없다. 그냥 해가 보고 싶었다. 충동적인 이 바람에도 심한 고통이 따른다. 해가 동해에서 떠오르는 법이야 이해했지만 몸의 고통을 감안하여 시간까지 이해했으면 좋으련만. 머리가 어리석으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딱 맞다.
참으로 긴 시간이다. 얼어붙은 뇌를 굴리려도 잘 되지 않는다. 새벽 희미한 시야에 늙은 소나무가 들어오고, 갈매기 무리가 백사장 위로 난다. 일렁이는 파도가 부서지며 내는 소리가 꽤 맑고 크게 들린다. 시누대가 가득하더니 다 다듬어졌다. 종종거리며 눈알을 굴리고 머리를 굴리니 모두 종종거린다. 정자 위로 오르락거리며 멀리 금강산 제일봉을 바라본다. 여전히 해산중인 보살이다.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일만이천봉의 어머니답다.
어슴푸레한 속에서도 소나무는 역시 소나무다. 동해 바닷가의 소나무는 천하제일이다. 맑은 고고하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숙연해진다. 그 간직한 몇 백 년의 세월 동안 숱한 바람과 비, 눈, 태양빛. 품고 품은 향과 빛이 숭고하다. 청간정의 유명세는 이 소나무들을 빼고서는 되지 않는다.
물론 바다는 말할 나위 없다. 바위, 모래밭, 파도, 물과 뭍이 지어낸 경계선의 굴곡은 그림보다 더 좋다. 수평에 움직이는 흰 물결과 바닷새의 날개짓이 더욱 정적감을 북돋운다. 살아 움직이는 풍경이다. 굳이 관동팔경의 하나가 아니래도 승경이다.
아는 것은 없고, 욕심은 커진다. 법칙을 이해하기도 전에 쓰고 싶어진다. 아는 것이 다일 것이라고 한껏 호기심을 키웠는데 말이다. 순전히 욕망에 충실하고 싶을 때가 많다. 생각이나 감정도 흐름의 궤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자연과 인문으로의 구분이 구차스럽다. 건전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그리고 그 정신에 그 몸을 유지할 수 있다. 몸이나 마음이나 매 한가지다. 마음과 정신의 무언가를 위해 몸을 부자연스럽게 혹사시킬 것도 아니요, 몸을 위해 지나치게 신경 쓸 일도 아니다. 알고 나서 살고 싶었는데, 살고 나서 아는 걸 챙겨야겠다. 이제 좀 겸손해질 나이도 되었다.
종종거리는 생각과 조급한 기다림에 날은 점점 밝아진다. 멀리 수평선 위로 옅은 구름이 보인다. 물위로 바로 솟는 해알을 보기엔 글렀다. 그나마 짙지 않아 다행이다. 구름 사이로 붉은 빛이 보이는가 싶더니 차츰 그 세기를 더한다. 그리고 위로부터 붉은 호를 그려낸다. 얼어붙은 몸으로 눈만 반짝이며 모습을 지킨다. 벌겋게 달아오른 커다란 해가 있는 그대로 자태를 드러낸다. 구름도 장식에 불과하다. 해알을 온전히 보고야만다.
붉은 해는 이내 탈색이 시작된다. 크기도 변한다. 작고 하얀 해를 기다렸다가 자리를 뜬다. 냉기는 여전하다. 이미 몸 깊숙이 파고들어와 뼈까지 얼려놓았다. 피는 돌아다니는지 모를 일이다. 방향을 잡고 몸뚱이를 갖고 가는 것을 보면 아직 몸과 맘이 분리되지는 않은 것 같다.
참 세상을 사는 것이 쉽고도 어렵다. 놓아버리면 쉬울 것을 왜 그리 집착이 강한지 모르겠다. 이것은 제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놓아버리고 사는 것이 어찌 사는 것이랴. 그렇다고 쥘려고만 하는 것도 답이 아니다. 가지려고 해서 다 차지할 수도 없다. 능력도 시간도 호락하지는 않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역시 인생을 과정이라고 봐야 답이 나올 듯하다. 전생도 있고, 후생도 있었으면 좋겠다.
우주 밖에 또 우주가 있고, 모양 안에 또 모양이 있다. 법칙은 한 선이 아니다. 이리저리 뒤얽혀 만들어낸 조화물이 한 눈에 들어올 수는 없겠다. 이러하고 함수를 가르쳤나보다. 보이는 저 놈이 문제가 아니라 이 놈의 눈이 문제다.
좋다. 운도 있고, 운명도 인정하자. 그렇다고 다가 아니다. 하찮은 것은 하찮은 대로,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대로. 내가 할 일은 그와 별개다. 내 운명을 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나는 나다. 해는 어제도 떴고, 내일도 뜰 것이다. 그것을 기다리는 조급함과 추위에 난 엄청 고통스러웠다. 꽤 긴 시간을 참고 견디며 하루가 시작되는 처음의 해를 안았다는 것이 내 것이다. 난 내 안의 조물주인 것으로 충분하다. 사실 이도 버겁다.
아랫녘의 따뜻한 커피가 참 향기롭다. 햇살을 받은 여러 소나무가 정겹다. 느릿한 곡선이야 말할 나위 없고, 나무마다 몇 개 되지 않은 가지 하나하나에 깊은 정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