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엔진소리가 커진다. 앞에는 엄청 큰 산이 가로막고 있다. 옆에도 산이다. 말티재나 한계령과는 견주지 못하겠다. 마냥 오르기만 한다. 굽이굽이 돌고 돌아 올라간다. 우람한 전나무들이 즐비하다. 소나무도 터를 잡았고, 자작나무의 흰빛이 무늬를 놓았다. 계속 오른다. 그리고 또 돌아서 오르고 오른다.
한참을 그러고서야 평지에 닿는다. 고도 삼천삼백미터라는 안내다. 여기가 샹그리라란다. 아직 도시에 이르지 않았다. 밭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풀밭에는 소와 말들이 노닌다. 도로를 따라 줄지어선 전봇대가 유독 많아 보인다. 더욱 멋진 데가 있겠거니 기대를 갖고 비가 내리는 고원의 평지를 내달린다. 피로가 몰려온다.
초라하더라도 침대에 눕고 싶다. 그러나 놔주지를 않는다. 정해진 일정에 따라 사원에 들러야 한단다. 장족은 오랜 동안 불교를 신봉해왔다. 중앙에서도 여기의 종교생활에 많은 배려를 해주는 모양이다. 겉에서 보기에 꽤 큰 절에 들어선다. 티베트의 파쿨라궁을 연상시키는 금색의 기와를 두른 화려한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다. 안에는 부처가 모셔져 있고, 여기의 이름난 중이 또 배향되었다. 정갈하게 정돈되지 않아 어수선하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더 이상 관람이 짜증스러워 밖으로 나왔다. 잔잔한 비를 맞으며 주위를 돌아본다. 익숙한 꽃들이 심어져 있다. 제법 먼 거리에서 사원을 바라보니 역시 티벳의 궁을 닮았다. 거의 같은 모양으로 흉내를 내고 있다. 찾아오는 이에게 볼거리 하나를 더하는 것이다.
여기는 이제 이상세계가 아니다. 어디를 가나 서있는 성황당 비슷한 종교물들이 즐비하고, 멀리에서도 금빛으로 빛나도록 짓고 있는 사원에서 혼란을 일으킨다. 그 밖의 지역과 괘를 같이 하면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여기의 생활로는 부족해서 이렇게 종교가 필요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쯤에서는 어지간히 결론을 내려도 되겠다. 샹그리라에는 샹그리라를 그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박물관으로 굳이 발길을 옮겼다. 장족의 민속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특히 전통의학에 대한 설명이 길다. 박물관 2층에 온통 인체해부도가 걸려 있다. 아니나 다를까. 원하면 진찰을 받을 수 있단다. 커튼을 제치고 작은 방으로 들어서니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의 남자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얼굴을 한참 바라보고 손바닥을 유심히 살핀다. 몇 가지가 좋지 않단다. 당연히 치료방법을 물으니 특별히 생약으로 조제한 약이 있단다. 박물관이 약을 파는 곳이다. 중국 중앙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상술의 하나이다.
어둑해질 무렵에야 밥을 대한다. 해가 시간보다 늦게 지는 곳이라 아홉시에 가깝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간 허름한 식당에서 온갖 지저분함을 극복하고 밥을 먹어야 했다. 차라리 굶는 것이 낫겠다. 옆 가게에서 컵라면을 사들고 역시 너저분한 호텔에 들어섰다.
추위가 몰려온다. 피로가 겹친다. 배도 고프다. 추위와 기아에 시달린다. 생각하기조차 힘들다. 쓰러지기에 바쁘다. 다행스럽게 전기장판이 침대에 깔려 있어 추위를 면한다. 애꿎은 담배만 계속 피워댄다.
여기가 이상세계다. 듣기만 했던 이상세계는 지금까지는 춥고 배고프다. 하늘이 가까워 별구경이나 했으면 하련만 그도 허락하지 않는다. 아직 비가 내린다.
새벽같이 일어나 라면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 약속장소에 모였다. 어디론가 가더니 안내원의 긴 연설이 시작되었다. 가려는 곳이 너무 고도가 높아 산소가 필요하다는 얘기이고, 파카를 빌려 입어야 추위를 견딜 수 있단다. 여교수가 나가더니 한참 뒤에 에프킬라통을 닮은 깡통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온다. 산소란다. 한 통에 50원이라 하니, 우리 돈으로 만원에 가깝다. 겁에 질려 연신 산소를 들이마셨다. 고혈압 환자는 훨씬 많은 양을 들이쉬어야 한다니 어쩔 수 없다. 행여 이국땅에서 쓰러지면 병원 사정이 걱정이 되어서다. 그래도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고 여기고 있는데.
25원에 빌린 빨간 파카를 걸치고 입장을 기다린다. 날이 새지도 않았는데 수만의 사람이 북적인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이 고통이다.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짜증스럽다. 모두가 빨간 파카를 걸치고, 파란 산소통을 들고 있다. 지리적 조건을 핑계로 생명에 지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협박을 받으면서까지도 이렇게 아우성인 것은 샹그리라의 본 모습을 보고 느끼려는 열망이 있어서다.
가까스로 빠져나와 이미 내부에 마련된 순환버스에 올랐다. 배치된 안내원의 긴 장광설이 또 시작된다. 얼마를 가서야 아침 안개에 싸인 비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산 사이에 펼쳐진 초원과 개천이다. 그리고 고지에 오르면서 보았던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모습을 보인다. 오르기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연신 산소통을 코에 댄다. 누구나 그렇다. 행여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감이 떠나질 않는다.
전나무 숲을 지나는가 싶더니 멈춰 선다. 모두 내려서 구경을 하고, 되는 대로 차에 올라 돌아보란다. 아침 햇살을 받은 자욱한 안개는 이승과의 연결을 끊는다.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전나무 숲이며, 아래쪽으로 꽤 넓은 호수이다. 원시에서부터 그대로 인 듯한 숲에서는 오랜 세월이 느껴진다. 호수가로 내려와 멀리까지 눈을 돌린다. 역시 천고의 적막함이 전해온다.
원시림과 원시호수 사이에서 숨을 쉬기 어렵다. 높아서가 아니다.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도, 비좁은 화장실 이용의 불편함이 상당한데도, 저 아래 도시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묻혀 정리를 못해서다. 사람 하나하나가 속세에 찌든 오염물로 여겨지기도 하고, 오지 못해도 괜찮을 만큼 자신의 자격이 따져진다.
다시 십여 분을 올라 하차를 권한다. 바로 옆에 호수가 보인다. 벽탑해(碧塔海)라고도 하고, 보달조(普達措)라고 부른단다. 둘 다 장족의 음을 한자로 차음한 이름이고, 배가 바다로 나아간다는 뜻이란다. 저 만치 몇 키로 멀리 끝이 아른거린다. 거기까지 호숫가를 따라 걷는 거란다. 나무로 다리를 놓으면서 십 리 정도의 산책길을 꾸며 놓았다.
안개는 걷히고 태양의 열기가 감지되면서 두터운 파카가 거추장스럽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계속 입을 수도 없다. 이쯤해서 산소통까지 함께 상술에 놀아났다는 것을 알았다. 산책로 곳곳에 마련된 쓰레기통에는 파란 산소통이 가득하다. 여행객을 상대로 불필요한 지출을 강제한 셈이다. 심하게 말하면 사기다. 이 숲 속에서 무슨 산소인가. 폐가 씻길 상쾌함이 저절로 이는데.
그래도 산책은 일품이다. 잔잔한 호수면이 거울과 같고, 그 너머 저편에는 산줄기 사이마다 푸른 초원이 금빛으로 펼쳐져 있다. 물이 닿지 않은 산에는 원시림이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가득하다. 성글게 얽힌 실타래처럼 나무마다 걸려 있는 것은 기생식물 같은데 이슬을 머금어 꼭 흰수염처럼 보인다. 어떤 평원에는 소와 말들이 한가히 풀을 뜯는다. 나무가 빈 자리에는 커다란 튜울립같기도 하고, 칸나같기도 한 요상한 식물이 담배밭을 연상시킨다. 이 또한 작은 구경거리의 하나다.
길을 따라 젖가슴 아가씨도 가끔 마주치고, 옆에서 조잘대는 여인의 소리도 정겹다. 아까워 버리지 못한 산소통은 파카와 함께 짜증을 유발하더라도, 하늘 가까운 곳에 거침없이 쏟아지는 햇볕을 인 채로 줄지어 걷는 것이 흥미롭다. 예가 이상세계의 진수인 모양이다.
얼마쯤 걷다 버섯을 파는 아이들을 만났다. 방금 따온 것이란다. 송이다. 향도 제법이다. 모두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에 이방인이 관심을 갖는다. 송이를 씹고 싶어서다. 묵직할 정도의 한 봉지를 사들었다. 옆에서는 비싸다고 나무라지만 우리의 값에 비하면 부담이 없다. 보기 좋은 놈 하나를 호수에 씻어 입에 넣었다. 영락없는 향 그대로의 송이다. 이제 입도 심심하지 않다. 이처럼 통째로 송이를 배가 부르도록 씹을 수 있어 행복하다. 주위의 누구도 감히 따라하지 못한다.
눈과 입이 즐겁다. 다리야 천상 종인지라 받들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어쩌다 의자에 앉아 쉴 양이면 여인에게 바짝 들러붙어 그 수고를 위로한다. 혹 송이가 힘을 발휘하여 그냥 잠을 이루지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야릇해서 좋다.
원시세계에서 나올 무렵에는 한여름이다. 샹그리라의 본 모습을 본 것이다. 역시 샹그리라는 원시시대다. 원시공동체사회가 아닌 인간의 손에 때묻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자연이다. 인간에 의한 이상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사회가 아니라 자연이 이상이다. 그래서 모두가 비경을 찾아 헤맨다.
자본주의를 지나 사회주의 거쳐 이상사회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정치적 희망도 유효하다고 믿고, 죽어서 되던 살아서 이루던 종교적 이상사회도 희망으로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아직 원시를 그린다. 자연은 극복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자연을 극복한 인간의 탐욕이 자연스러움을 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두고 볼 일이고, 원시보다 사람은 불어나서 모두가 마냥 자연에 파묻혀 뛰놀 수는 없으니, 사람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야 할 틀이 무엇이고, 그 실현과 운영의 방법에도 골치를 앓아야 할 것같다.
정해진 여정이라 반드시 들려야 한다고 해서 간 곳이 또 다른 불교사원이고, 승마장이다. 사원이라야 굿당과 같은 수준이고, 너른 승마장에는 풀을 뜯는 말들뿐이다. 햇빛을 피할 그늘이라곤 하나도 없고, 말을 탈 기력도 부족하다. 샹그리라는 이처럼 관광지의 하나일 뿐이다. 장가계나 계림과 같이 말이다.
올랐으니 내려와야 한다. 오르면서 보지 못한 주변의 경관이 눈에 들어온다. 높은 고원에 익어가는 보리밭의 때깔이 멋쩍다. 그 멀던 길을 단숨에 내려온다. 장강의 상류변을 지날 무렵 멀리 눈에 덮인 산이 보인다. 히말라야 산봉오리와 비슷한 자태다. 시야에 사라졌다 나타났다 몇 번을 반복한 뒤에서야 그것이 옥룡설산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여강의 명소 중 하나인 옥룡설산의 뒷모습이 틀림없다.
가까운 곳에 노란빛이 유독 빛난다. 누런 보리와는 전혀 다른 생노랑이다. 정체를 알고자 눈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보았다. 유채꽃이다. 기울기가 완만한 산자락마다 노랗게 유채밭이 펼쳐져 있다. 차마고도라고 여기고 말을 탄 채 올라 바라본 그곳이 여기다. 인근의 방향과 산세가 손에 잡혔다. 납시해에서 보였던 그 그림이 바로 유채밭이다. 그 너머로는 눈 덮인 설산이고. 차 안에는 에어콘 바람이 더위를 달랜다.
샹그리라를 거의 빠져나와 여강에 이를 즈음에야 샹그리라가 보였다. 직접 다가가본 샹그리라는 그리던 그곳이 아니었다. 신선이 살고 있지도 않았다. 돈을 모으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이 여느 곳과 다름이 없이 바쁘게 살고 있었다. 노예제사회일 적에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당의 지배를 받는 사회주의, 아니 자본주의로 이행되어 있었다. 출발하면서 안내자가 말한 안정은 경제적 안정이었다. 언제 될지 알 수 없는 경제적 안정.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극복해야 가능하리라고 믿는 시각으로 샹그리라는 아직 샹그리라가 아니었다. 언제 샹그리라가 될 수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어쩌면 그 밖의 세상이 먼저 될 수도 있겠다. 샹그리라는 지리적으로 다가가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그런데 나오는 차안에서 샹그리라가 보였다. 예로부터 선경은 사시장춘이라 했다. 옛 비결에 그리 되어있다고 들었다. 김일부의 <정역>에서도 그랬다. 언젠가 지구축이 바로 서고, 사시사철 봄인 세상이 열릴 거라고.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신선과 선녀가 꽃놀이를 하고, 불로초를 안주삼아 술을 기울이는 세상이다. 그 사시장춘의 샹그리라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저기 옥룡설산에는 눈이 가득하고, 유채꽃이 만발하여 노랗게 수를 놓았으며, 매미소리가 귀를 울린다. 온 계절이 한 눈에 모여 있으니 예가 선경이 아니고 무엇이랴.
선경은 어느 한 곳에 있는 것은 아니나보다. 흩어진 것을 모아 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지, 다리로만 움직여서는 아니 되는지. 그러고 보면 안 가고 갈 수 있는 선경이 분명히 있겠다. 오봉산의 설화가 맞기는 맞다. 굳이 먼 데까지 가려고만 할 필요는 없다손 치더라도, 이 세상에는 하나만이 맞는 게 없다. 분명 먼 데를 가보아야 가까이에 있는 것이 보이니 반복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어찌 정답으로 바로 가겠는가. 정답이 끝이 아니라 가는 과정이 답일 수 있으니 말이다. 파장이 그래서 출렁이고, 파도가 또 그렇고, 세월이 역시 오르락내리락 한다.
아무리 샹그리라가 현실이라 해도 현실은 더더욱 현실이다. 떠나기 전날 꺼놓은 전화기를 켜니 수없는 기록이 떠오른다. 급하게 연락을 달란다. 교육부 감사가 나와서 내가 맡은 기구의 책임자가 없어서 난리란다. 다소 짜증스럽더라도 느슨해진 마음이 갑자기 다급해진다. 약간의 연착을 해서 아침 아홉시 쯤 공항에 내려 급하게 학교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뒤 열흘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꼬박 열흘을 세 사람의 취조에 시달려야 했다. 샹그리라를 들여다본 죄치고는 엄청 큰 벌을 받았다. 강요되는 죄책감을 견디기 힘들어 빌어야 했다. 그리고 반성을 한참 해야 했다. 현실과 이상의 격이 커야 대비가 멋지겠다. 희망도 크겠다. 있는 것 가지고 장난하지 않고, 진정한 샹그리라를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