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여인의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 말을 타잔다. 20여 분을 달려 또 산에 오르니 너른 호수가 나타난다. 호수 주변 하얀 구름을 걸친 산들이 이국적이다. 납시해(拉市海, 나쓰하이)란다. 그리고 여기 여강의 토착민은 납서족(納西族, 나시주)이라고 한다. 발음과 관련될 것이다. 납서족의 인상이 좋다. 모두 시골의 외삼촌들이다.
호수변 너른 들에 마장이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수십 마리의 말들이 지친 모습으로 사람을 기다린다. 가는 거리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옛 차마고도를 갈 수 있다는 말에 비싼 값을 치렀다. 검은 말과 밤색 말이 차례인 모양이다. 햇빛에 그을린 시골 친구같기도 한 마주인이 우리를 맞는다. 이 역시 순박한 모습을 지녔다.
말 위에 올라 주인의 안내를 받아 길을 나선다. 물기를 머금은 질퍽한 바닥에 발길이 미끄럽다. 홀로 이방인이요, 말이 통하는 두 사람의 대화가 소란스럽다. 힘겨워하는 말의 숨소리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 전쟁터에서의 숱한 말들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으려 해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수없이 오갔는지 굳이 고삐를 쓰지 않아도 제 알아서 길을 찾는다. 조그만 마을을 가로질러 산으로 오른다. 차마고도가 시작되는 길이란다. 주변에 작은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우리 여느 시골 산길로 착각한다. 온통 바위와 돌만 보이는 고도의 굽이치는 길이 아니라서 차마고도라는 말에 의심이 든다. 마음은 만년설이 뒤덮인 고갯길을 힘겹게 오르는데, 바로 아래는 빗물에 이겨진 진흙탕이다.
고개를 오르내리는 한 시간 여의 말타기는 감동을 끌어내지 못했다. 차라리 산허리에서 바라보는 호수와 그 건너 높은 산봉오리들이 보기 좋다. 산허리를 감싼 노란 빛깔이 봄을 연상시킨다. 이름 모를 꽃이 만발한 듯한데, 저기가 혹 이상세계가 아닌가 싶다. 잔잔한 물에 비친 고산의 풍경이 볼만하다.
말에서 내려 잠시 숨을 돌리려다 익숙한 작은 나무에 눈이 멈춘다. 무궁화다. 대여섯 송이의 꽃을 피운 키만한 무궁화가 길가에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다. 반갑기 그지없다. 세뇌된 머리로 제 나름의 해석이 이루어진다. 제자리에서 자라는 나무를 보고 이방인의 모습과 같게 여겨진다. 그러다가 생각은 순전히 주관이라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사람은 어디에나 있고, 나무도 어디에나 있다.
여기의 곳곳에도 삼이다. 손바닥만큼 커다란 잎을 햇빛에 내놓고 대마가 자라고 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곧 씨를 맺겠다. 호기심에 자꾸 눈이 간다. 선경에 직접 가지 못할 바에야 이의 도움을 받는 것이 빠를지 모른다. 집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나 제 위치를 가늠하기 힘들다. 샹그리라로 가는 길에 그 목적이 도중에서 녹아버렸다.
천애 고도의 작은 도시가 비에 젖는다. 추위를 느낀다. 멀리 옥룡설산(玉龍雪山)이 구름에 감겨 있다. 사철 눈이 녹지 않아 명소로 알려져 있는데, 올해는 눈이 없단다. 찬 습기를 들이마시며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오직 한 사람과 얘기를 나눌 뿐이고, 너무 멀리 와 있다는 생각에 미쳐서는 외로움을 느낀다. 여인을 옆에 두고도 찾아드는 외로움은 좀 처절하다. 뜨거운 커피로 달래려 해도 추적추적 내리는 비까지 분위기를 더해줘 벗어나기 힘들다. 옆에서는 계속 조잘댄다. 지는 좋은 모양이다.
허기는 어김없이 찾아온다. 옛 고성의 거리는 대리와 비슷하다. 개미굴처럼 이리저리 구불구불 이어진 좁은 골목길 양쪽은 모두 가게이고, 가는 비를 맞으면서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버섯 샤브샤브로 배를 달랜다. 좁은 식당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가게 어디를 들여다봐도 구미를 끌 것은 없다. 시장기보다 외로움이 더 커서 그럴 것이다.
다만 벽면을 꾸민 납시족의 글씨가 이채롭다. 누가 봐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으리만큼 사실적인 그림문자다. 그냥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이다. 원색으로 꾸며놓은 벽이 유치원 아이의 스케치북과 다름없다. 예전에는 이런 글씨를 쓰고, 그들만의 말을 하면서 살았을 텐데 말이다. 동화처럼 맑은 글씨와 귓전에 시끄럽게 와 닿는 말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다. 여강의 납시족은 오늘 이처럼 전설로 남아 있다.
여기 종족은 전통적으로 모계사회란다. 지금도 아가씨가 씨모르는 애를 배더라도 흉이 아니란다. 어떻든 자식을 낳으면 된다고 하니, 혹여 아가씨가 있으려나 관심이 쏠린다. 남자들의 순박한 표정은 산수의 탓만이 아닌 듯하다. 여자가 중심인 곳에서 굳이 남자들끼리의 세력다툼이 무의미했을 것이다. 사회적 욕망이 제거된 남성의 얼굴이 정감어린 외삼촌으로 보였나 보다.
빗소리를 들으며 얇은 이불을 감싸고 잠을 청한다. 장마철 초가집 처마 밑에서 빗소리를 듣는 기분이다. 눅눅한 잠자리가 피로를 더한다. 가라앉은 기분에는 향기도 찾지 못하나 보다. 오로지 안으로만 안으로만 생각이 뻗혀 밖으로 내뿜을 의욕이 일지 않는다. 아직 샹그리라가 목적지로 남아 있어 기대를 품고 그대로 눈을 감는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말이다.
샹그리라로 가는 아침은 번잡하기 이를 데 없다. 아직 가는 비가 뿌리는데 약속장소에 지정된 버스가 나타나지 않는다. 한 시간 여를 기다리고 나서야 전화를 받는다. 택시를 타고 다른 곳으로 오라는 얘기란다. 두 번째 약속장소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옆에서는 전화소리가 시끄럽고 짜증스럽다. 그곳으로 가려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수십 대의 버스가 내뿜는 배기가스에 숨쉬기조차 힘들다. 이상의 세계로 탈출하려는 피난민의 모습으로 보여서 여기 여강의 값어치가 헐다. 지금 나는 전쟁을 피해 도망치는 피난민이다. 행여 놓칠 새라 안내인의 손을 꼭 부여잡고.
어렵사리 버스에 오르니 이틀 동안 동행할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삼십 여 명이 되는 듯하다. 두서너 명으로 이루어진 팀들이다. 안내를 맡은 장발의 총각이 사람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지 않은 두 사람을 포기하고 움직인다.
장거리 운행에 앞서 검사를 받는다고 한다. 하기야 도중에 고장이나 사고라도 만나면 큰 낭패다. 그 동안 타지 못한 두 사람이 택시로 오고 있단다. 잠이 덜 깬 모습으로 차에 오른 이들은 어여쁜 아가씨들이다. 앞선 아가씨는 가슴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의 야한 옷을 걸쳤다. 저녁 늦게까지 술을 먹고 늦잠을 잔 듯하다. 우리 뒤에 자리를 잡는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옆에 젊은 안내자를 두고도 풍만한 가슴에 벌써 마음을 빼앗겼다.
차가 출발하면서 안내자의 장광설이 시작되었다. 옆의 도움을 얻어 그 말뜻을 헤아려본다. 샹그리라의 거주민인 장족이라는 것, 관광객이 아주 많다는 것, 해발 삼천미터라 비등점이 팔십도여서 음식 익히기가 쉽지 않다는 둥 등등이 많은 얘기를 쏟아 붇는다. 모두 통역을 부탁하지 않았지만 대충 의례 하는 주의사항이나 개괄적인 내용들이다. 소란스러워 애써 무시하려던 차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단어가 들려온다. 급하게 동시통역을 부탁했다.
샹그리라는 오랜 동안 고대노예제사회였다가 중국의 영역에 들어오면서 사회주의로 되었단다. 노예제사회에서 사회제로 이행된 아주 드문 예라고 덧붙인다. 장족이 대부분이고, 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이들의 꿈은 안정이란다.
갑자기 학구적인 머리로 모드가 바뀐다. 많이 듣던 단어들이 정겨운 한편 혼란스러워진다. 유물론에 입각한 역사발전단계론으로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봉건사회, 식민지정체성론, 반봉건식민지론, 부르조아혁명 등등의 단어들이 담배연기 자욱한 연구실의 분위기와 함께 떠오른다. 지금은 넋을 놓고 풀어놓은 채 이녁을 헤매는 이방인이 아니다. 샹그리라조차도 인류 역사의 흐름에 포함시켜 이해해야 했다.
어수선한 차 안에서 심각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우선 드는 생각이 그렇다면 샹그리라는 뭐야? 지친 마음을 달래려 이상향인 거기를 찾아나섰는데 말이다. 그곳이 최근까지 노예제였다가 이제 사회제로 바뀌었고, 거주민의 대부분이 안정을 원한다니. 지금까지 그토록 불안정한 사회였단 말인가. 어느 계급의 사람들에게 샹그리라였는가. 하기야 풍경을 대상으로 사고했던지라 사회구조에 대해서는 별개로 하자고 스스로 달래면서도, 발레의 무대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로 꾸며 그리던 샹그리라의 빛이 금새 퇴색해버린다.
나이 오십이 되면서 여러 가지의 변화를 실감한다. 몸이야 당연히 늙어가고, 그 동안 가졌던 관념의 내용들이 흩어져 뒤엉킨다. 그래야 된다고 믿었던 것에 대한 신념도 옅어지고, 하나에 매달린 광적인 태도에서도 멋보다는 회의를 갖는다. 과연 역사는 발전하는 것일까. 종교에서 추구하는 절대선의 경지는 있을까. 자연과 분리된 인문이 하나의 영역으로 자리할 수 있을까. 계속 팽창한다는 저 넓은 우주는 무엇이고, 이 짧은 삶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끊임없이 이는 욕망의 출처는 어디이며, 이는 에너지일까 아니면 경계의 대상일까. 모든 의문을 깨뜨릴 수 있는 해탈의 경지는 절대적일까, 상대적일까.
한 평생 사는 동안 내가 볼 수 있는 세계는 어디까지이고, 생각의 범위는 얼마 만큼이며, 생활의 반경은 얼마이고, 얼마의 시간 동안 존재할 수 있나 등등의 뜬금없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미약한 존재감에 허탈해진다. 달과 별을 보며 멀미를 느끼니 말이다. 아울러 강한 집착력도 흐려진다. 그저 그렇겠거니 하고 만다. ‘부질없다’는 말이 그래서 생긴 듯하다.
어쨌든 좋다.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둘러보자. 사회주의로 이행된 샹그리라의 풍경과 사회는 어떨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나서는 곳에 분명 매력이 있을 것이다. 뒤에 앉은 아가씨의 젖가슴도 잊혀졌다. 옆에 다소곳이 앉은 여인네의 향기에도 관심을 잃었다.
샹그리라로 가는 길이 촉촉이 젖었다. 창에 스치는 사선의 빗줄기를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다. 밖의 풍경은 이렇다 할 만한 게 없다. 그저 우리의 시골길을 느린 속도로 달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강원도 횡성이나 평창의 국도를 연상하면 거의 틀림이 없다. 유독 소나무가 많고, 밭에는 대부분 옥수수이고 간혹 담배가 자란다.
한참을 달리고서야 잠시 멈춘다. 길가에는 몇 가지 과일과 군옥수수를 늘어놓은 아낙들이 손짓을 한다. 아래로 누런 강이 흐른다. 그래도 이름을 물었다. 이외다. 장강(양자강)이란다. 중국의 지도를 떠올리며 강줄기의 궤적을 더듬어본다. 장강의 상류이겠다. 상해 인근에서 보는 장강 하구의 모습, 남경 철교 아래의 풍경, 중경 어귀에서 두 줄기가 만나는 하구와 연결해서 전체의 구도가 잡힌다. 조각배라도 띄우고 상해로 가고픈 객기가 꿈틀거린다.
다리 하나를 지난다. 장강을 건넜다. 여기가 샹그리라란다. 행정구역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저쪽을 바라본다. 저기와 전혀 다를 바 없다. 강 하나를 두고 이승과 저승의 이름을 가졌다. 옛 이야기에 그 경계가 강인 것은 맞다. 그러나 맨 몸과 맨 정신으로 저승으로 건너왔다. 몸까지 가지고 왔으니 그저 행정적인데 그치고 말 일이다.
조금 지나서 모두 차에서 내리란다. 무슨 구경거리가 있겠거니 했다. 다리가 낡아 승차 상태로 건널 수 없다는 것이다. 관광객을 위한 국가의 특별한 지시라고 한다. 가는 비를 무릅쓰고 다리를 지나며 장강 상류의 위아래를 훑어본다. 비에 불어서인지 누런 황하와 진배없다. 그런데 줄지어 걷는 사람 무리 옆으로 버스들이 지난다. 웃음이 난다. 타고 가면 무겁고, 옆에 나란히 가면 가벼운가. 버스로 통째 떨어져 한꺼번에 죽는 것보다는 무더기로 떨어져 살 놈은 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강 저편 커다란 판석에 새져진 금빛 글자가 빛난다. 모택동의 글씨다. ‘團結起來, 爭取更大的勝利 毛澤東’(단결해 떨쳐 일어나 다시 커다란 승리를 쟁취하자!) 정말 샹그리라에 어울리지 않은 구호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샹그리라의 참 모습을 그려본다. 그의 말대로 이상세계는 소수의 누군가를 대상으로 삼아야 가능하다. 공자의 진정한 대동세계도 그렇고, 공산주의 사회도 매 한가지다. 왕도정치를 통해서나 아래로 다수의 혁명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데, 바람이 많아서일까 아직 요원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
샹그리라 입구에서 우리는 투지를 불태워야 했다. 자연인지, 노예제사회의 상류계급인지, 아니면 오늘의 부족한 모든 현실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대상으로 우리는 싸워서 이겨야 한다. 이쯤에서 보면 샹그리라는 아직 샹그리라가 아닌 것이다. 싸우다 지친 사람들이 끝내 찾아올 곳이라고 여기는데. 돌아갈 수도 없는 길 가볼 수밖에 없다.
차라리 길을 가로막은 아치 기둥 벽면의 몇 글자가 무의미한대로 낫다. 山峽長江九回百折促壯觀 雲錘雪岭萬壑千峰還姸媚. 내린 김에 내차 걸으라 한다. 호랑이가 뛰어 건넜다는 호도협에 가잔다. 양 절벽을 뚫고 지나는 장강의 위용이 그래도 실감난다. 더욱이 수직의 바위절벽에 마차가 오갈 정도의 길을 낸 공이 가련하다. 십여 미터가 넘는 폭으로 몇 키로인지 바위를 파냈다. 강을 뛰어넘던 그 큰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그냥 강은 무심히 흐른다. 별다른 감흥을 찾지 못하겠다. 오던 길을 되돌아오는 다리가 수고로울 뿐. 인력거는 수없이 오간다.
허름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다들 주린 배를 채우려 허겁지겁이다. 참으로 빈약한 식사다. 몇 가지 요리래야 요리랄 것도 없다. 입을 무시하고 배만 생각한 음식이다. 샹그리라의 음식은 아직 속세에 미치지 못한다. 이미 떠날 때의 커다란 기대는 다소 줄어들었던 차고, 그 예단의 신빙성을 더욱 높인다.
지루하다 싶을 시간에 차안에서의 영상노래가 위안이 된다. 가락이 마치 몽고 초원에서의 풍이 같다. 가사에도 초원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풍치가 말이나 음률에도 그대로 작용되는 모양이다. 그림 속에 있다는 사람들의 이별 얘기가 대부분이다. 아름다운 초원에 홀로 남아 떠나간 임을 무작정 기다린다. 멋진 곳을 찾아 카메라에 담은 녀석의 수고가 가상하다. 바람은 나부끼고 외로운 처녀는 먼 데를 바라본다. 음색이 피로를 앗아간다. 샹그리라의 괜찮은 풍경을 미리 본다. 희망도 다시 가져본다.
무료함을 달래려 노래에 빠져있는데 뒤에서 어깨를 두드린다. 급하게 고개를 돌리니 꼭지만 살짝 가린 젖무덤이 눈에 들어온다. 늦게 올라탄 아가씨가 생글거리며 말을 건네 온다. 어여쁘다. 풍성한 얼굴에 눈이 맑다. 덕스러움이 넘친다. 눈에 눈을 맞추려 해도 자꾸 눈길이 무거워 가슴으로만 향한다. 어디서 왔느냐기에 한국이라 했더니, 지는 한국을 아주 동경한단다. 친밀감이 더해져 사소한 말들을 주고받으니 옆자리 안내인의 눈초리가 매섭다. 화사해진 마음으로 달리는 시골길이 그런대로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