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결혼 기념 여행으로 갔었던 전주로 목적지를 잡는데 일단 합의했습니다.
전주 한옥 마을의 풍경이 좋았던 느낌이 남아 있는데 눈 내린 한옥 마을과 성당이 문득 보고 싶어졌습니다.
세밑에 호남 고속도로를 천천히 달리며 우리는 고속도로 같은 우리 삶에 눈이 내려 천천히 가는 것도
이제는 좋을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적지가 완전히 정해진 것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지도를 펼쳐놓고 길 위에서 길을 묻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내는 전남 장성군에 있는 백양사가 가보고 싶다고 합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눈 내리는 날 백양사라는 이미지는 어쩐지 제법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향일암에서 일출을 보는 것을 포기했지만 백양사에서 하얀 태양을 맞이하는 거라고 애써 우기며 우리는 좋아했습니다.
고속도로 인터체인지에서 국도로 빠져 나오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헤드라이트 불 빛으로 드러나는 세상은 설국입니다.
다방과 식당 그리고 편의점등이 정겹게 불을 밝히고 있지만 그 모든 빛깔이 흰색처럼 여겨집니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듯한 도로를 우리가 길을 내며 조심조심 백양사를 향합니다.
사르륵 사르륵 내리는 눈처럼 시간도 천천히 흘러갔으며 가로등불 아래에서 눈꽃들은 화사하게 춤을 춥니다.
관광지도를 보니 우리 길 옆으로는 저수지가 있을 듯 한데 창문을 열고 보면 온통 먹빛입니다.
그렇게 8km 남짓 설금설금 기어가는데 가끔씩 우리 옆을 까만 세단차가 쓔욱 쓔욱 추월해 갑니다 .
백양사 근처에 다다르니 드디어 모텔의 화려한 불빛이 오아시스처럼 희망으로 비쳐집니다.
모텔로 들어서는 길 쪽으로 운전대를 틀자 식당과 민박집이 보였습니다.
2012년 마지막 날은 민박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백양사에 왔는데 민박을 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식당에 들어서니 눈 때문인지 아니면 일출을 보러 다들 바닷가로 가버렸기 때문인지
손님이 우리 말고 다른 한 팀만 있을 뿐 한적했습니다.
하지만 식당 아주머니는 아는 지인이라도 온 것처럼 무척 친절했습니다.
매운탕과 녹두전을 안주 삼아 우리는 막걸리 한 잔을 주욱 들이켰습니다.
어둠이 내린 이후에 눈 길에서 체인도 없이 운전을 한 까닭에 긴장을 했었나 봅니다.
긴장이 해소된 뒤 마시는 한 잔 술은 그야말로 무릉도원주입니다.
아내는 청하를 특히 좋아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막걸리도 제법 마십니다.
밤 사이 폭설이 내리면 혹시 고립되는 건 아닌가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러면 더욱 멋진 추억이 되는 거라며 1월 2일 출근 따위는 잊기로 했습니다.
식당 주인이 함께 하는 민박집 방은 소박하지만 자연스런 맛이 느껴졌습니다.
지붕을 형성하고 있는 통나무와 한 지가 자연스레 어울어져 있는 것이 운치있었습니다.
민박집의 가장 큰 매력은 뜨끈뜨끈한 방바닥인데, 집 사람은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 좋아 어쩔 줄을 모릅니다.
대학 시절 엠티를 가면 새벽녘부터 차가워졌던 시멘트로 만들었던 구들장 민박방이 생각났습니다.
구들장을 만들 때 흙을 두텁게 바르고 큰 돌과 작은 돌을 조화롭게 깔아 놓아야 온기가 오래도록 유지된다고 하는데
이 방은 온 겨울 내내 따뜻할 것만 같습니다.
혼곤해진 몸을 눕히자 온 돌의 열기가 골고루 온 몸에 스미어 오는데 나는 그만 저항할 틈도 없이 까무룩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새해를 맞이하며 하는 유치한 카운트 다운도 못 해 보고, 괜한 흥분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계사년 첫 해 백양사에는 밤 새 소록소록 눈이 내렸나 봅니다.
백양산 숲 속 마을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순결하도록 아름다웠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인가 봅니다.
마음씨 좋은 주인 아저씨 도움으로 앞바퀴에 체인을 매고 우리는 평화 모드로 백양사를 향합니다.
차창 앞 유리는 스크린처럼 설국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소나무가지위에 쌓인 눈 꽃들의 조화와 연못 위에 쌓여진 눈 밭의 평등함이 새해의 메시지로 전해져 옵니다.
아침 식사를 하러 갔던 백양사 앞 식당 아줌마도 반갑게 인사를 건넵니다.
우리는 새해 첫 손님이었는데 카드대신 현금을 건네자 그렇게 고마워할 수 가 없습니다.
첫 손님이 좋아야 그 해 장사가 잘 된다며 덕담을 주고 받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수북히 쌓인 눈 길을 걷습니다.
겁이 많은 아내가 눈 내린 겨울 산행을 무서워하는 까닭에 이렇게 깨끗한 숲 속 눈 길을 걷는 것은 새해의 첫 선물입니다.
동해 바닷가에서 보았던 파도의 하얀 포말들이 이렇게 내륙 어느 산사에 눈 꽃으로 내립니다.
마음이 간절하면 인연(因緣)으로 이어지겠지요.
여행은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는 것 일텐데, 나는 올 해 가난하고 게으르게 살아볼까 합니다.
빗물로 빠르게 내리다 눈으로 천천히 떨어지며 때론 춤을 추기도 하고 때론 나뭇가지 위에서 꽃으로 피어나기도 하고
강물위에서 그대로 쌓이기도 하고 혹은 소리없이 사라지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