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제법 굵다. 촉촉한 봄비다. 별다른 일이 없어 사무실에 나왔다. 춥지 않을 만큼의 온도다. 잠잠한 공간에 홀로 앉아 비를 구경하는 모습이 스스로 쓸쓸하게 여겨진다. 차분해서 좋긴 해도, 외로움이 서글프다. 이제 봄이 막무가내로 몰려들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더욱 감상의 대상이 자연인 경우가 많아졌다. 해마다 같은 현상이 반복되고, 날씨의 변화도 경험에서의 것 이상을 뛰어넘는 경우도 별로 없다. 이제 더 특별할 것이 없는 자연현상에 자꾸 마음이 머문다.
마음을 두드리는 일이나 노력이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뒤돌아보면, 자신의 안에서 이는 복잡한 것들에 시달려 잠깐이라도 밖에 관심을 가질 틈이 전혀 없던 적도 있었다. 관심의 결과가 기대 밖이어서 안타깝고 고통스럽기도 했고, 어쩌다 그리 될 때는 환호성을 지른 적도 있었다.
언뜻 커 올라오는 아들놈을 보면 세월이 흐르는가 싶어도, 대부분 나이가 늘어가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내 힘이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말자고 다짐을 하며, 그 범위를 한껏 넓혀보자는 혈기방장한 때도 있었다. 부처가 그랬듯이, 내 존재에 대한 가치가 최고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마음에 무엇인가가 항상 들어차 있어 버겁고 무거웠다.
지금은,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바둥거리며 살았던 시절이 있었나 싶다. 아무것도 아닐 것들이 그때 왜 그리 절실했는지. 그토록 경멸했던 어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점도 있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분명하다.
지난날에 비해 나이를 꼽아보고, 이해의 폭이 좀 넓어졌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마음이나 감정이 달라진다는 점도 보인다. 마음에는 허전함이 자리를 넓혀가고, 굳이 목숨을 걸고 화를 낼 기회도 드물어진다.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잦아진다. 해야 할 일은 의무감으로 여겨지고, 흥미나 열정은 뒤따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풍선과 같은 빈 가슴을 껴안고 있다. 그 가슴에 지금 촉촉한 봄비가 젖는다. 날은 어둡고, 천둥소리도 들린다. 정말 차 한 잔에 담배 한 대가 잘 어울리는 분위기다. 복잡하고 무거울 때는 이러한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뒤엉켜진 여러 가지를 정리할 수도 있고, 찰진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지 않다. 차분해진 데 더 차분해질 것도 없고, 밑도 끝도 없는 외로움이 더해간다. 담배와 차는 여전히 어울린다. 세상은 너무 넓고, 나는 너무 자그맣다. 봄이 오면 그저 봄을 맞고, 비가 내리면 아무런 저항 없이 맞아야 한다.
굳이 따지면 자연은 자연이다. 내가 아니어도 해는 뜰 것이고, 계절은 바뀐다. 아무런 인공이 더해지지 않아도 제 스스로 그러해서 자연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자연의 현상에 빗대어 자신을 드러낸 경우가 많다. 시의 주제가 그렇고, 지금은 볼 꺼리나 찍을 꺼리다.
실제는 사람에게 비참하게 치여 보아야 자연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했다. 전원작품의 대부분이 그렇다. 아무런 말없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자연이 대화의 상대이고, 관찰의 대상이다. 마음을 풀어놓아도 비난하거나 욕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바라보는 자신의 편일 것 같은 착각에 빠져도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는 맛은 자연의 멋진 장면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것보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데서 더 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은 사람에 의해 더욱 크게 피어난다. 말 없는 꽃보다 치장한 여인이 더욱 좋다. 천둥과 번개보다 아버지의 벼락같은 화풀이가 심신을 떨게 한다.
아직 사람 속에서 살아야 할 나이인데, 자꾸 자연의 현상에 마음이 가는 것을 보면 분명 나이 탓이다. 사람 속에서 크게 상처를 받은 것도 없는데, 비의 영향이 적지 않다. 자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위기로만 역할을 해도 충분하다. 그런데 전적으로 상대가 되어버리니, 이 상황이 더욱 서글프다.
봄비는 이별과 인연이 있다. 노래에도 그렇고, 옛 시에도 그렇다. 실연을 당하고 이슬비를 맞으며 홀로 걷는 이의 처절한 마음이 전해오고, 떠난 임을 그리며 눈물짓는 모습도 연상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봄은 역시 봄이다. 차가운 가을비는 더욱 처절할 것이다. 봄비에서는 상황에 불구하고 따스함이 전해온다.
이 비가 그치면 세상의 때깔이 변할 것이다. 대동강 둑에 푸른 풀들이 자라날 뿐 아니라, 온 세상 생명들이 모습을 드려낼 참이다. 땅에는 보일 듯 말 듯한 꽃들이 피어나고, 매마른 가지에는 꽃망울이 맺히겠다.
비가 오는 지금, 천박한 여인의 향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더러 사람들이 움직이지만 나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 마음이 비워지면 너그러움이 그에 따라 커져갔으면 좋으련만, 자존의 응어리는 더욱 굳어진다. 쉽게 수작을 하지 못한다. 비를 바라보면서도 가라앉은 마음이 피어나지를 않는다.
치장을 한다고 창가에 늘어놓은 몇 개의 난이 생생하다. 비에라도 내놓고 싶은데 자리가 없다. 꽃대가 오를 때이다. 창밖의 비를 보며 흠뻑 젖어서 여러 개의 대가 피어났으면 좋겠다. 제 스스로 피어나지 못하고, 애먼 난들에게 기댄다. 비는 하염없이 이렇게 내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