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거세다. 어제는 비와 함께 바람이 거칠더니, 이제 비는 그치고 바람만 남았다. 이른 아침 오월의 싱그러운 새 이파리들이 센 바람에 나부낀다.
솔고개는 청평호에서 설악면으로 넘어가는 그리 높지 않은 고개다. 이차선 포장도로가 완만한 곡선을 그으며 올라왔다 내려간다. 이 고개 마루에서 커피 한잔과 담배 하나를 즐기는 날이 많아졌다. 몇 년 전 시작한 골프 때문이다.
고개마루에 조그만 휴게소가 있다. 허술한 음식점 두어 개가 전부이다. 이른 시간에는 항시 닫혀 있다. 문 옆에는 낡은 커피 자판기가 있다. 수십 년은 지난 듯하다. 동전 몇 개를 넣고 단추를 누르면 대부분 반응을 한다.
식당 건물 한쪽에는 우람한 느티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아래에 놓인 평상과 몇 개의 의자가 잘 어울린다. 자리를 잡고 앉아 물끄러미 앞을 보면, 오가는 자동차의 수가 많지 않아 아늑하고 한가하다. 눈 아래 자동차가 주변 분위기를 크게 해치지 않는다.
여기에 오늘 바람이 세차다.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 바람에 싱그러움이 잔뜩 배어 있다. 신록의 나뭇잎이 사방에 가득하다. 머리 위의 느티나무도 잎을 가득 채웠다. 굳이 예찬을 할 것도 없이 바야흐로 오월이다. 오월의 새잎은 사월이 꽃에 견줄 만하다.
초가을의 푸른 하늘에서도 그렇듯이, 지나친 맑음 앞에서는 약간의 슬픔이 느껴진다. 공허한 감정에 빠져들기도 한다. 너른 이 세상에 혼자 있는 듯한 외로움도 찾아든다.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지면 더욱 고독해진다. 아마 공자의 애이부상(哀而不傷)이 맞는 표현일 듯 싶다. 슬프지만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 정도다. 지극한 평상심이다. 고요하게 마음이 잠긴다.
그 자리에 애잔한 것들이 스친다. 늙은 여가수와 옛 여인이 닮은 모습으로 담긴다. 그들에게서 세월이 강렬하게 느껴져 숨을 쉬고 있는 이 순간이 오롯이 감지된다.
청소년기에 좋아 했던 가수 중의 한 사람이 박인희다. 가락과 노랫말, 그리고 목소리가 잘 어울린다고 여겼다. 몇 년 전부터 그 노래가 그리워 운전하면서 자주 들었다. 유튜브라는 것이 있어서 아주 쉽게 대할 수 있다. ‘방랑자’와 ‘모닥불’은 너무 유명해서 그렇다 치고, 이월 중순을 넘어 듣는 ‘봄이 오는 길’, 익어가는 가을에는 ‘끝이 없는 길’, ‘하얀 조가비’등 많은 노래들을 모두 들을 수 있다. 그러면 됐다는 안도와 믿음, 수줍은 시골 청년의 사랑 고백 등을 담은 노랫말이 참 맑다.
그 노래가 흐를 때마다 한창 유행하던 그 시절 주변의 여러 가지가 같이 전해온다. 사춘기 때의 교복, 옆의 친구들, 돌아올 수 없는 세월의 양, 그리고 지금의 나까지. 세월에 묻힌 지난 일들을 오늘에 다시 떠올리는 일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감상에 깊이 젖을 수는 있어도, 흐뭇함보다는 애잔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언제부터인가 볼 수 없었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그녀를 며칠 전 현재의 모습 그대로 보았다. 지난 텔레비전 프로에서다. 시간이 나면 다시보기로 보는 프로그램이 둘 있다. ‘불후의 명곡’과 ‘복면가왕’이다. 제 시간에 보는 일은 거의 없고, 한참 지난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목록을 살펴보다 박인희라는 이름을 보았다. 흥분이 졸음을 앗아갔다.
모두 잠이 든 시간을 골라 편안한 자세를 잡았다. 얼굴에서 역시 세월이 보였다. 70년대에도 지금처럼 실제 모습을 자주 본 것은 아니다. 그저 라디오에서 목소리만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역시 세월 속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항상 그대로라는 말이 다가온다. 몸짓과 수줍은 표정이 그대로다. 화면에 옛 앨범의 표면을 자주 보여주어,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지금의 모습에서 시간의 양을 헤아리게 한다. ‘끝이 없는 길’을 차분하게 부른다. 목소리에서도 시간이 전해졌다.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안경을 쓴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준다. 옆모습이 누군가와 꼭 닮았다. 여러 날 전에 오랜만에 다시 보았던 여인이다. 이십여 년 전 아주 가깝게 지냈었다.
벚꽃이 필 때면 유난히 떠오른다. 몇 번을 보채서 잠깐 동안 몇 마디를 나눌 수 있었다. 불교 사상에 빠져 있다. 여승이다. 그 동안의 안부와 지금의 몇 가지를 주고받으니 더는 할 말이 모자란다. 이미 봄꽃은 다 지고, 새 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역시 바람이 상큼했다.
속세의 욕망에 따라 헤매고 있는 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도 많이 늙었다. 소녀다운 몸가짐과 눈빛은 그대로다. 난 이미 속물에 푹 젖어버렸다. 삶의 근원을 찾는다는 몇 마디에 공감을 하지 못하였다. 말보다는 앞에 앉아 있는 모습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말에 가볍게 반박을 해보기도 한다. 이내 그만두고, 옆 커다란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이름 모를 꽃으로 화제를 돌렸다.
꽤 긴 시간 동안 둘이 지었던 업들이 떠올랐다. 인연이라는 말도 어울리는 듯했고, 부질없다는 말도 바람결에 스쳤다. 젊은 몸들은 이렇게 초라하게 늙어가고, ‘존재’에 대해 새삼스럽게 머리를 굴려본다. 그때의 생생한 신체와 지금의 마음은 무슨 관계나 있는 것일까 더듬어본다. 욕망은 물거품이라더니, 욕망뿐이겠는가. 몸이 늙어 사라지면 마음과 영혼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답이 없는 일에 매이기를 피했다. 시간을 재촉한다. 아쉬움이 커지면서 평정을 잃겠다. 세속에 오염된 스스로의 눈빛이 느껴졌다. 더 이상의 말과 행동이 맑은 그녀를 더럽힐까 두려웠다. 그래도 한번 안아 봐도 되겠느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던졌다. 그냥 산책이나 하잔다. 같이 걸으며 저미는 외로움을 달랬다. 시원한 바람이 스친다. 세월을 머금은 바람이다.
솔고개에서의 싱그러운 풍경 속에서 상큼한 바람을 맞는다. 태풍에 버금간다는 날씨예보의 말이 맞다.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더러 오가는 자동차를 무심히 바라본다. 두 여인의 모습이 빈 가슴에 찾아든다. 연기를 채워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존재가 어쩌지 못하는 ‘시간’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새로 피어나는 싱싱한 생명들 속에서 희망과 꿈을 떠올리지 못하겠다. 이들의 여름과 가을이 먼저 앞당겨 다가온다. 푸념하듯이, 이렇게 나서 그렇게 가는 것이지 뭐. 달관이 아니다. 서럽다. 이렇게 화창하고 깨끗한 날에 ‘애이부상’일까. 외로움 때문에 마음이 좀 상한다.
‘낙이불음(樂而不淫)’이 낫겠다. 음탕하지 않을 만큼의 즐거움이 가득했으면 좋을걸. 하루가 시작되는 이른 아침에, 더구나 무르익어가는 봄날에, 외로운 서글픔이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세월이 있어서, 아쉬움이 더해지고, 여러 감상도 일어난다. 바람아, 불어라. 세월도 불어라. 나부끼는 이파리처럼 온갖 상념도 흩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