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도자료
유통기한을 넘긴 시인의 죽음
―장승욱 유고시집 ≪장승욱 시≫
도서명: 장승욱 시
지은이: 장승욱
분 야: 문학(시)
출간일: 2013년 3월 29일
가격: 11,250원
규격: A5, 제본: 무선제본, 쪽: 166쪽
너는 나를 툭
내 가슴이 툭
별 하나가 툭
내 눈물이 툭
온 세상이 툭
이 시에서 느껴지는 감상은 어떤 것일까?
어쩌면 중고생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시의 형식을 흉내 낸 언어 유희를 떠올릴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가, 말기암으로 시한부 생명을 선고 받은 시인이 병상에서 남긴 유고 시라면? 더구나 그 시인이 평소 우리말과 특히 단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수많은 관련서를 펴낸 전문가라면?
그만한 비상한 언어 감각과 그만한 절박함이, 말하자면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으로 만나지 못했다면 태어날 수 없었을 한 편의 절명시(絶命詩)로서 새삼스럽게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시인 장승욱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중적 시인은 아니다. 정작 시인으로서보다는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토박이말 일곱 마당≫, ≪국어사전을 베고 잠들다≫ 등 잊혀졌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우리말(토박이말)을 찾아내고 다듬은 저서들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그를 가까이 알았던 지인들에게 그는 평생 술과 함께 살아온 이력을 ≪술통≫이라는 산문집으로 펴낼 만큼 ‘주당’의 이미지로 남아 있기도 하다. 술과 글을 사랑한 그의 삶은 지난 2012년 1월 25일 만 50을 갓 넘긴 나이에 갑작스럽게 종지부를 찍었다. 별다른 자각증상도 없이 그저 소화가 잘 안 돼 찾은 병원에서 말기 췌장암 진단을 받은 지 불과 1년 만이었다. 췌장암의 원인이 그토록 마셨던 술 때문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어쩌면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고나 있었던 듯이 병상에 눕기 불과 2년여 전에 쓴 <유통기한>이라는 시에서 요절에 대한 예감을 노래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단짝 친구에게 단언했다
내 나이 마흔
그때 나는 지구에 없을 거라고
요절은 꿈이었고 당위였고
손금에 새겨진 운명이었지
이상이 내 아저씨였고
기형도가 내 친구였다
기형도 20주기 모임에 가자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 오늘
2009년 2월 10일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유통기한은 얼마나 지났는지
굳이 말하자면 50의 나이는 ‘요절’을 운운하기에는 말 그대로 유통기한이 다소 지났을 수도 있겠지만, 이상 시인이 요절했던 시절보다 평균수명이 몇십 년이 늘어나 ‘환갑이 청춘’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지금의 시대를 감안하면 그 역시 자신이 꿈 꿔왔던(?) 요절의 숙명을 이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장승욱은 조금 게을렀는지도 모른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너무 일찍 피어 걱정된다’는 평을 받았던 그가 그간 냈던 시집은 달랑 ≪중국산 우울가방≫ 한 권뿐이었고, 시보다는 우리말 찾기와, 그리고 술 마시기에 더 몰두해왔다. 그런 그가 병상에 누워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죽음을 불과 두 달도 채 남기지 않은 때부터였고, 그때부터 더 이상 시작(詩作)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기까지 한 달도 되지 않는 동안 하루 한 편꼴로 아름답고도 가슴 먹먹한 20여 편의 유고시를 남겼다. 마치 죽음 직전에 그의 속에 갇혀 있던 시들이 난파선에서 빠져 나오듯 그로부터 탈출해 나오기라도 한 듯이.
시인 장승욱의 황망한 죽음을 맞아 그를 그리워하던 지인들이, 생전에 시인이 준비하던 두 번째 시집을 그의 유고시집으로 정리해 대신 펴내게 됐다. 그의 학창 시절 동기들은 백방으로 수소문해 그가 남긴 시들을 고등학교 때부터 찾아 모으고 그를 대신해 편집을 했고, 생전에 그가 근무했던 출판사가 흔쾌히 시집 발간을 떠맡았다.
무엇보다 이 시집의 의미는 단지 요절한 시인과 가까웠던 지인들의 사적인 추모를 넘어서, 탁월한 언어 감각 속에 삶을 관조하는 자세를 녹여냈던, 대중적으로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 시인의 재발견이라는 데 있다.
시집의 구성은 크게 3부로 나뉘어 있다. 먼저 1부는 그가 병상에서 쓴 유작 시들이다. 오랜 시간 예감해온, 그러나 갑작스럽게 준비도 없이 닥쳐온 죽음 앞에 한편으로는 투병의 의지와,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고뇌와 분노, 체념과 순응의 과정이 이토록 절절하고도 때로는 유쾌하기까지 하도록 표현된 시들을 찾아보기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2부는 그의 첫 시집이었던 ≪중국산 우울가방≫이 나온 이후에 썼던 시들을 모았다. 이 시들은 그가 언젠가 낼 두 번째 시집을 위해 직접 정리해둔 것들이다. 특히 일본의 하이쿠를 연상시키는 한두 줄의 짧은 단형시들이 눈에 띄는데, 싯구가 짧을수록 그의 언어 감각은 더욱 현란하게 드러나고 있다..
살려줘, 살려줘
내 온몸이 눈물 한 방울에 매달려 있다
―역전
눈물이 몸에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몸이 눈물 한 방울에 매달려 있다는 발상의 전도로 우리의 상황은 순식간에 목숨이 급박한 극도의 위기로 ‘역전(逆轉)’되어 버린다. 그보다 더 짧은 또 다른 시 한 편을 보자.
사월이 된 삼월이 벗어두고 간 키높이 구두
―ㅁ
3월에서 4월로, 시간의 흐름을 받침 하나 차이로 표현하는 발상은 앞서도 말했듯이 얼핏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평생 단어와 씨름해온 그만 한 내공을 지닌 수준이 아니라면 누구나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감각은 분명 아닐 것이다.
3부는 그가 자신의 시를 처음 사람들 앞에 내놓았던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썼던 초기작들 가운데 남아 있는 것들을 모았다. 고등학교 때 그의 은사였던 문학평론가 전영태 교수(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가 당시 그의 시에 대해 ‘너무 일찍 피어 걱정된다’고 평했을 만큼, 이 시절의 시들도 이미 습작의 수준은 훨씬 벗어나 있는 것들이다. 물론 지금 다시 평가해보자면 그 가운데 더 좋고 덜 좋고를 굳이 나눌 수는 있겠지만, 나름대로 시인이 성장해온 흔적을 밟아보는 것도 그의 지인들에게는 추모의 의미에서, 그리고 새로운 독자들에게는 장승욱의 재발견이라는 면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특히 전영태 교수는 이 시집의 발문 겸 평도 기꺼이 맡아주었는데, 말하자면 시인 장승욱에 대한 최초의 평자가 이제 최후의 평을 하게 되었다는 것도 이 특별한 시집에 특별한 의미를 더하는 일이 될 것이다.
끝으로 덧붙일 것은, 이 시집이 두 가지 형식으로 제작된다는 점이다. 이번에 선 보이는 첫 출간분은 시인이 생전에 ‘지식을 만드는 지식’(지만지) 출판사의 편집주간으로서 작업해온 고전 시리즈 판형에 맞춰서, 말하자면 이 시집 또한 시리즈의 일환으로 고전이 되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대중적인 시집의 형식을 통해 되도록이면 좀더 많은 독자들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인을 재발견하고, 감동을 나누어 가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생전의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지인들을 위해 특별한 소장본으로서 수제본으로 제작되는 별도의 시집이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다.
■시인 장승욱은…
1961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우신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마쳤다. 고등학교 때는 수업시간만 되면 잠자는 것으로 유명했으나 대학교 때는 아무것으로도 유명해질 기회를 못 얻었다. 졸업하기 전인 1986년 가을 조선일보 입사시험에 합격해 23기 수습기자가 됨으로써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91년 5월까지 조선일보에서 근무. 퇴사 당시에는 편집부 기자로서 외신면 편집을 담당했다.
조선일보 퇴사와 동시에 경력기자 공채를 통해 SBS에 입사했다. 1998년 그만둘 때까지 줄곧 보도제작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다큐멘터리, 심층 취재가 필요한 고발-추적 프로그램, 시사 토크 프로그램, 대통령 후보 초청토론회, 삼일절이나 육이오 특집 같은 계기 특집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초기에는 ≪시사기획≫이라는 보도프로그램을 매주 제작하느라 전국에 안 가본 데가 없다. 이후 프리랜서 PD 겸 작가로서 KBS 1TV의 '한민족리포트'를 다수 연출, 집필했고, 출판사 대표, 여행 가이드, 5급 공무원 등으로 밥벌이를 했다.
토박이말로만 된 시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서 대학시절 도서관에 있는 사전을 뒤지며 토박이말 낱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으나, 1998년 토박이말 사전인 한겨레말모이로부터 시작해 우리말에 관한 책들을 꾸준히 써왔다. 한글문화연대에서 주는 우리말글작가상과 한국어문교열기자협회가 주는 한국어문상(출판 부문)을 받았다.
이후 최근까지 출판사 ‘지식을 만드는 지식’(지만지) 편집주간으로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던 2천 종 가까운 전 세계의 고전들을 펴내는 작업을 해왔다. 시간이 나면 틈틈이 소설과 시를 썼고, 외국 취재도 풍부하게 경험해 다녀 온 나라가 50개쯤 된다. 여행을 좋아해서 죽을 때까지 백 개의 나라를 채우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으나, 소망을 채우지 못하고 2012년 1월 25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중국산 우울가방≫(시집), ≪술통≫(산문집), ≪한겨레 말모이≫, ≪토박이말 일곱 마당≫, ≪국어사전을 베고 잠들다≫, ≪경마장에 없는 말들≫,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사랑한다 우리말≫, ≪우리 말은 재미있다≫, ≪도사리와 말모이, 우리말의 모든 것≫이 있다.
(※이 소개글은 고 장승욱 시인이 가장 마지막으로 썼던 자기소개에 최근 내용을 추가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