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홉 식구의 삶
서류상 이혼 후, 아내는 여러 대기업에 지원을 하더니 '교보 생명'에
취업이 되었다. 직책은 ‘총무’라고도 하고 ‘주무’라고도 하는, 각 지역의
영업소에 근무하는 영업소장의 회계 업무를 담당하는 거였다. 그러니
까 영업소장과 보험 아줌마 사이에서의 금전적 출납과 출퇴근을
체크하는 게 주된 업무인 모양이었다. 입사할 당시에 2년 뒤에는
영업소장으로 발령이 나는 것을 전제로 취업을 한 것이었으나 통상
여자 ‘주무’는 그 생활을 4년까지 연장할 수 있었다. 보험사 영업소장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우리 동기생 ‘최규운’이 잘 알 것이다. 월말
가까이 되면 결산으로 엄청 늦게 퇴근을 했던 게 지금도 생각이
난다. 특히 IMF 때는 새벽 두 시에 퇴근하기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1997년 그 당시 우리 집은 모두 여덟 식구가 살고 있었다. 교직
생활을 하시다가 55세(1990년)에 뇌출혈로 몸의 반쪽을 사용 못하
시고 방향감각 상실과 치매가 있으셨던 아버지와 동갑의 어머니,
그리고 나와 지금은 대학 1학년이 된 큰 아들 ‘한글’이와 작은 아들
‘한솔’이였다.
우리 식구만 해도 힘들었을 한글이 엄마가 어느 날 귀가해 보니
당시 고시 공부를 하던 동생 식구들이 우리 집으로 살림을 갖고
들어왔다.
일찍 퇴근한 나는 동생 식구 - 제수 씨와 아들 찬영이-를 보고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난 어머님께로 달려갔다.
- 어머니 주차장의 세간 살이들 ‘회일’(동생이름)이거 맞죠?
- 그래 맞다.
- 어떻게 하실려고 동생들을 우리 집으로.....
동생은 대학(서울법대 84학번)을 졸업하고 정훈 장교(해군 정훈장교 -
OCS-)로 병역을 마친 뒤, 10년 째 사법 시험에 도전하고 있었다. 늘
컷트라인 근처에서 떨어지기 때문에 30 살이 다 된 나이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계속 도전 중이었다. 군대에서 만난 제수 씨와 결혼을
하여 아들까지 있는 상태였다. 제수 씨는 벽제의 한 군병원에 간호장교,
대위로 복무 중이었다.
- 왜? 니 동생이 남이냐?
- 아뇨. 그게 아니라, 내 입장에서는 지금도 부모님과 함께 대가족으로
살고 있는데 또 동생 식구들을 데리고 산다는 것이...
- 내가 시집을 왔을 때는 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를 비롯해서 17
식구였어.
- 그래요. 어머니 하지만, 미리 제게 말씀은 하셨어야죠.
- 내가 미리 얘기 한다고 달라질 건 또 뭐냐?
- 어머니, 아버지 몸도 불편하시고, 요즈음 여자들은 시댁 식구들과
사는 것에....
- 그게 뭔 소리냐? 네 아버지와 나는 신혼 단칸방에서 네 사촌형과
함께 살았다. 니 큰아버지가 네 사촌형을 서울로 유학보냈기 때문이지.
그런 경우도 있는데 친동생 식구들과 왜 함께 못 살아?
- 어머니, 시대가 다르잖아요.
- 그건 니 생각이냐, 한글이 엄마가 말할 의견이냐?
난 순간적으로 더 이상의 논쟁이 소모전이라는 걸 느꼈다. 원래 어머
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한 번 결심한 것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이제 한글이 엄마
를 설득하는 일만 남았다.
앞일이 아득했다. 중풍과 방향상실, 치매로 불편하신 아버지에다가 두 아들
그리고 술 좋아하는 나, 이렇게만도 힘들어 하던 한글이 엄마를
무슨 수로 달래나? 걱정이 태산이었다. 큰아들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장가를 간 후에 처음으로 강렬히 느꼈다.
동생을 불렀다. 베란다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며 둘이서 대화를 나누
었다.
- 어떻게 된 거야?
- ......
- 일단 대답을 해봐. 형이 답답해 죽겠다.
- 아까 안방에서 엄마와 형이 주고받는 얘기를 들었어요. 난 엄마가
우리 가족이 형과 함께 사는 것을 형에게 말하고 허락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 그래서?
- 사실 작년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찬영이 엄마가 형집에 들
어가 살자고 주장을 하기 시작했었는데 엄마도 의견이 같았나봐요.
내 뜻은 아니지만 형도 아다시피 내가 엄마와 찬영이 엄마에게 이
래라저래라 말할 수 없는 처지라.....
- 알았다. 짐 올리는 곳으로 가봐.
눈앞이 캄캄했다. 이를 어쩐다? 어머니는 절대 포기를 안 하실 거고
아직 퇴근을 안 한 한글이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가뜩이나 부모님
모시고 사는 것을 여간 힘들어 하지 않았던 걸 잘 아는 처지에서
그야말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동생의 짐을 안방의 침실에 다 들여놓았을 때쯤 8시가 다 되어서야
한글이 엄마가 퇴근을 했다. 집에 들어오자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감지했는지 나를 급하게 찾았다. ( 101 번째가 이어집니다.)
2013.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