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어느 날, 느닷없는 카자흐스탄 여행 제안을 받았다. 선(계은)이다. 윤(문식)과 함께다. 스탄은 대체로 이슬람국가를 지칭한다고만 알고 있던 차에 강한 유혹을 느꼈다. 정(일창)이 사업차 알마티에 머물고 있다는 기회를 틈탄 계획이란다. 오(세창)도 동참을 했다. 얼마 뒤에야 날이 정해졌다.
꼼꼼하기 이를 데 없는 선의 요구에 따라 송금을 하면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물론 강한 희망이 꿈틀거려 설렜다. 주변에 넌지시 말을 꺼내면 예쁜 여자로 응수한다. 아들 녀석까지 휴대폰에 있는 카자크 여자 배구선수를 들이대며 부러워한다. 밭 매는 미녀 얘기는 우즈벡의 것으로 들었는데, 카자흐도 그렇게 알려져 있나보다. 간다고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은 정하고 나면 곧바로 닥친다더니, 뚜벅뚜벅 다가온다. 그 사이 아카시아꽃이 세상을 채우고, 아팝나무꽃이 서럽게 바람에 흔들거렸다. 어느새 뻐꾸기 소리도 오월을 꾸몄다. 싱그러움이 가득 찬 공간에 꽃향기가 넘실거리고, 향수를 자아내는 음향도 곁들여진 시간에는 가벼운 외로움이 찾아든다. 비릿한 밤꽃향이 강하게 퍼지며, 장마가 닥쳐야 그칠 감상이 카자흐스탄에 밀려난다.
부처님께서도 미리 오셔서 절차를 도와주신다. 그리 어렵지 않게 직장의 허락을 받았다. 선의 준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편의를 위한 요구도 구체적이다. 많은 경험에서 나온 제안이라 그대로 따라야 했다.
예비모임을 가졌다. 손쉽게 정한 값비싼 음식점이다. 아직 카톡을 쓰지 않는 오를 다그쳐 억지로 가입을 시키고, 공동의 의견교환 공간을 만들었다. 공금을 미리 얼마로 해야 하고, 필요한 음식물을 미리 구한다고 의견을 묻는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카톡 소리가 기대와 설렘을 돋운다.
더욱이 어떤 취향의 아가씨를 좋아하냐고 묻는다. 그저 예쁜 아가씨를 바라면서도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대답하니, 구체적으로 말해달란다. 김태희, 송혜교 등이 이름이 거론되더니, 전지현까지 나온다. 머뭇거리는 나에게 선의 요구가 거세다. 잘 아는 배우가 없어서다. 직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설현과 강소라가 예쁘단다. 선이 둘을 원하냐고 되묻는다.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대단히 예쁜 아가씨가 지천으로 있구나 하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미인의 천국으로 우리는 여행을 가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닥친다. 5월은 정말 좋은 달이다. 출발하는 날은 유난히 맑았다. 공항버스 안에서 몇 차례 전화를 받았다. 모두 도착한 모양이다. 공항에서 보는 친구들의 모습이 반갑다. 다소 흥분된 분위기였다.
표를 받으면서 출발시간이 한 시간 늦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다려야 할 지루함이 흥분을 이기지 못했다.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다. 밖에 나가 담배를 즐기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가만히 있어도 안에서는 즐거움에 솟는다.
면세점에서의 담배구매는 필수다. 갑자기 오른 값에 대한 분노를 삭일 수 있다. 이미 십여 보루가 남아 있어도 다시 다섯 보루를 산다. 옆에서도 덩달아 움직인다.
지루한 시간을 때우는 데는 먹는 것이 최고다. 시원한 냉면을 제안했다. 넷이서 같이 하는 일이라 하는 일마다 웃음으로 이어진다. 서로 내뱉는 말이 흥겹다.
개찰구 앞에 다가선 선이 제법 큰 소리로 항의한다. 한 시간이 늦어졌으면 그 시간을 때울 꺼리를 제공하라는 것이다. 농이라고 금새 이해할 수 있으나 맞는 말이다. 어영부영 공항의 여기저기를 오가며 한 시간을 억지로 보내야 했다. 말을 받는 아가씨의 얼굴이 벌개진다. 습관적으로 죄송하다고 하지만 그녀가 해야 할 대답은 아닌 듯했다.
기다림은 설렘을 증폭시킨다. 그래서 늦어지는 시간이 그리 괴롭지 않다. 이미 밭의 미녀를 찾아가는 놀이인지라 부담도 없다. 넷이서 함께 하니 잔 재미가 있다.
비행기에 올랐다. 넷이 나란히 앉았다. 기우는 볕이 따가웠다. 비행기가 균형을 잡으면서 오른쪽 끝에 앉은 선의 목소리가 커졌다. 오가는 멋진 제복의 아가씨들과의 시야까시가 시작되었다. 앉아 있는 자의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음흉한 속내가 내비쳤다. 밥이 나오기 전 이미 몇 개의 땅콩 봉지를 원했는지 모른다. 왼쪽 끝의 나도 덩달아 움직여졌다. 우리들 때문에 긴장감에 엄숙했던 분위기가 깨졌다.
식사 시간은 거의 난장판이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분위기다. 연거푸 포도주와 맥주를 주문했다. 쉴새없이 오가는 아가씨들의 얼굴에서도 장난기가 보였다. 정상적인 서비스의 범위를 벗어난 것을 누구나 알았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은 엇갈렸다. 부러운 표정으로 동참의 욕구를 참는 사람, 그리고 차마 내뱉어버릴 수 없는 짜증스러움을 숨긴 사람이다. 바로 옆의 윤도 장단을 맞춰 거든다.
여섯 시간을 가야 하는 비행기가 고급 카페로 변했다. 제복의 멋진 아가씨들의 어여쁜 미소와 포도주가 잘 어울렸다. 더 주문을 해도 가격에 변화가 없는 홀가분함 때문에 더욱 자유로웠다. 훈련된 미소라 하더라도 마냥 좋다.
카페의 종업원으로 탈바꿈한 승무원들도 같이 즐기고 싶어 했다. 우리 같은 놈들이 있어 지루함을 잊었을 것이다. 한국인 승무원들 틈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서양아가씨가 있었다. 당연히 카작크인이라 여겨 말을 건넸더니, 어설픈 한국말로 지는 우즈벡이란다. 그녀의 얼굴에도 장난기가 보였다. 취향의 아가씨가 아니라 수작을 멈췄다. 도착지의 밭에 있을 이보다 예쁜 아가씨들을 그리면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몇 잔의 포도주를 들이켰는지도 셀 수 없다. 웃고 떠들었다. 내 옆에 앉은 오가 허벅지에 쥐가 난다고 일어나 통로를 서성거렸다. 완행열차 입석표를 산 셈이다.
중간 관리자인 듯한 노숙한 승무원이 오더니 짜증을 숨긴 억지 웃는 얼굴로 이제 준비한 포도주가 거덜나서 더 이상 줄 수 없단다.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조용히 하라는 경고였다. 귀여운 아가씨들의 표정에도 서운함이 또렷했다. 내 옆을 오가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던 슬기가 제일 귀여웠다.
캄캄해진 카자크 알마티공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리는 우리에게 건넨 노숙한 승무원의 인사가 걸작이다. ‘안녕히 가세요’가 아니라 “고맙습니다.” 그냥 받기엔 서운해서 응수했다. “더 난장판을 만들었어야 하는데.” 살짝 미소를 보낸다. 혀만 보이지 않았을 뿐 ‘메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