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부터 정의 수고가 시작되었다. 우리 모두는 그에 모두를 맡기고 지시를 기다리기만 했다. 일주일 동안의 우리 행불행을 그가 쥐고 있었다. 젖은 공항에서부터 약간의 서성거림은 일종의 징조였다.
알마티에서 가장 좋다는 알라타우 호텔에 짐을 풀었다. 석유로 먹고사는데 값이 떨어지면서 사정이 어려워져 이런 호텔에 묵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단다. 낯선 이국의 풍취가 느껴졌다.
세계지도를 떠올리며 지금의 위치를 찾으려 애를 썼다. 정확하게 자리가 잡히지 않았다. 동서남북이 뒤얽혀 안정감을 잃었다. 하던 일을 잊고 즐기기에는 좋았다.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선녀를 찾아 온 것이다.
낯설음, 설렘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 세 시간의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서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 지금 거기에는 새벽이 다가오는데, 여기는 한밤이다. 고급호텔의 커다란 방 하나를 차지하고, 구석의 침대 위에서 뒤척이는 모습이 제 모습은 아니다. 어느 하나라도 가닥을 잡아 생각을 이어가려 해도 되지 않는다. 전전반측이 이 모양새다.
환하게 날이 밝아온다. 얇은 커튼으로 강렬한 빛이 쏟아진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어리둥절이다. 방의 창이 서쪽으로 난 줄로 알았는데, 거기로 태양이 보인다. 해가 서쪽에서 뜰 리는 절대 없다고 자신을 억누르지만 생각은 바뀌지 않는다. 세상과 내가 완전히 엇갈려 제가 제인 줄도 모르고 첫날을 맞는다. 이 나라가 이상한지, 내가 이상한지 모르겠다.
최고의 호텔이라 해서 진수성찬의 아침을 기대했다. 정말 헷갈린다. 이 나라는 내 생각과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는 창고 같은 곳에 몇 조각의 빵과 건과물이 전부였다. 그나마 달걀 후라이가 있어 다행이었다.
조금 뒤에 올라온 선의 커다란 비닐봉지가 일류였다. 떠나기 전부터 준비할 게 많다고 하더니, 이것인 모양이다. 온갖 먹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김치에서부터 장아찌, 생된장, 컵라면, 현미햇반 등등. 뒤늦게 자리한 윤과 오의 손도 바빠졌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배가 차니 주변이 보인다. 허름한 식당 창으로 낯선 장면이 들어온다. 멀리 눈 덮인 높다란 산이 가로로 뻗어 있다. 천산산맥이란다. 더위가 있는 아랫녘에서 바라보는 만년설이 정말 이국의 정취를 뽐낸다. 윤이 카메라를 눌러댄다.
오전에 골프가 예정되어 있다. 채비를 갖추고 내려왔다. 정이 이국적인 아가씨와 함께 와서 기다리고 있다. 통역이란다. 뭐라고 이름을 알려줬으나 모르겠다. 금빛 머리와 시원한 생김새, 그리고 그럴듯한 몸매가 잘 어울렸다. 여기에서의 공식적인 첫 여인이다. 호텔 데스크와 식당의 아가씨는 역시 밭이 아니라서 그런지 김태희는 아니었다. 통역 아가씨는 밭을 매기에는 아직 자격을 덜 갖추었다고 해야 하나. 우리 모두의 머리에는 수건을 동여맨 밭의 김태희만 들어 있었다.
제기동 개천과 중랑천을 세느강과 템즈강으로 고쳐 부르고, 팀을 이뤄 하는 골프는 더위 반 짜증 반이었다. 공기는 맑고, 태양은 강렬했다. 땀을 흘리며 허둥대는 정은 거의 정신줄을 놓았다. 골프장 여기저기에 있는 웅덩이와 연못에는 황소개구리 같은 커다란 놈이 계속 울어댔다. 더러 뱀도 풀 속을 누빈다.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네 명의 캐디는 몽고, 중동, 서양 애들을 하나씩 불러놓은 듯했다. 인종도 다르고, 하는 짓도 다르고, 쓰는 말은 러시아말인지 카자크말인지 분간하지 못하겠다.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의 아가씨들이다. 밭을 맬 듯한 복장을 갖추었다. 그러나 역시 김과는 거리가 멀었다.
파란 하늘에 흰구름은 둥실 떠 있고, 저편에는 눈을 짊어진 천산산맥이 늘어져 있다. 포플러 나무 사이로 보이는 만년설, 두텁게 깔린 잔디, 어설픈 캐디, 솜이불 위에서의 퍼팅, 짜증을 머금은 땀, 그저 오가는 일 달러짜리 지폐, 양어장의 커다란 송어, 낮은 음의 개구리 소리, 이게 전부였다. 오기 전에 그렸던 세느강과 템즈강은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해가 기울면 만나기로 한 머릿속의 김이 아니었으면 더욱 힘들었을 라운딩이었다. 순간순간, 우리를 보기 위해 호미를 던지고 손을 씻는 모습을 상상했다. 가녀린 허리, 하얀 피부, 다소 풍만한 무덤, 금빛 긴 머리, 환한 미소. 적당히 골프를 하면서 힘을 아껴둬야 했다.
팔의 길이만한 우람한 송어요리의 점심도 더위를 다 식히지는 못했다. 곁들인 맥주는 열기를 보탰다. 몇 홀을 더 돌아야 하는데, 이제부터는 여름날 논매기다. 캐디는 캐디가 아니라 짐꾼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뭐하는지, 지들도 뭐하는지 서로 모르고 이리저리 오갔다. 흰구름과 만년설이 없었으면 개구리에게 가방을 던져주었을 것이다.
싼값에 사서 그런지 담배는 왜 그리 피워대는지. 윤과 나야 그렇다 하더라도, 오의 입에도 항시 담배가 물려 있다. 나름대로 집중을 해서 템즈강의 명예를 세우려 하는지 심각한 얼굴이다. 그러나 속은 나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구르다 마는 솜이불 그린 위의 공을 퍼터 한 쪽으로 찍어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좋다던 양고기의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갈비살을 뜯으며 억지로 맛있는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창으로 들어오는 저녁공기가 더 좋았다. 밀의 질이 고급이었다. 면이 맛있었다. 신부를 기다리는 신랑마냥 설렘이 가슴에 가득한데, 음식 맛이 느껴졌을까.
어둠이 내려왔다. 어스름한 알마티 외곽을 돌고 돌았다. 어느 길가에 멈춰서서 초조하게 기다리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불이 반짝이는 하얀 건물 앞에서 서성거렸다. 기대와 부끄러움을 감추면서. 마치 고삐리의 미팅과 같았다. 행여 지나는 사람들이 볼까봐 살짝 몸을 나무 밑에 숨기기도 하고, 인기척에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았다. 나이를 먹어도 고삐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하얀 건물의 큰 방으로 안내되었다. 태연한 척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런 짓이 부담스러워 낮에 선에게 난 빠지고 싶다고 했더니, 살기어린 눈빛으로 쳐다본다. 좀 뒤에, 같이 하기로 한 일에서 빠지는 놈은 패죽여야 한다나. 맞아 죽는 것보다 어여쁜 여자와 같이 지내는 게 훨씬 낫다.
곧이어 익숙한 장면이 이어졌다. 늘어선 아가씨들 가운데 제 눈에 김태희를 고르는 일이다. 카자흐 스타일이 아니라 중국식이었다.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이런 일은 수없이 겪었다. 삼십 여 명씩 몰려온 아가씨 중에서, 아니면 뒤에 두 개 조를 보태면 백여 명의 아가씨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 내 방으로 몰려오는 아가씨들의 구둣발 소리는 군대 군홧발 행군 소리보다도 우렁찼다. 바닥 타일에 부딪히는 수십 여 아가씨의 뾰죽구두소리는 수십 개 타악기의 합주보다도 감동적이다. 뛰는 심장을 억누르고, 태연한 척하며, 처음에는 아가씨들과 눈을 맞추기도 힘들었다. 반복하면 익숙해진다.
카자흐에서는 행군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용하게 몇 명의 아가씨가 들어왔다. 모두 미소를 지으며, 지금 막 밭을 매고 왔다고 뽐을 냈다. 내 눈에 김태희가 안 보였다. 정말 밭만 매는 아가씨들이었다. 이렇게 날이 어두워졌는데,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나. 오, 윤, 선은 눈보다 아래가 급했는지 망설임이 없었다.
심술이 났다. 다들 나간 큰 방에서 정과 커피를 주문했다. 여전히 정은 이랬다저랬다 정신이 없다. 낮에 나간 정신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며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김을 기다리고자 했다. 농사일은 때가 있다. 밭은 다 매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 곧 오겠지 하며 씁씁한 커피를 입에 적셨다.
결국 난 잠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입가에 점이 귀엽게 박힌, 길쌈하는 아가씨를 만났다. 서양과 동양의 피가 적당히 배합된, 중앙아시아의 여인이었다. 김은 밭 일이 끝나지 않아 길쌈하는 아가씨가 대신 왔다. 오늘은 이렇게 하고, 자고나면 내일이 또 오지 않는가. 기대와 희망은 이래서 좋다. 늦은 밤을 서로 통하지 않는 언어로 베 짜는 얘기를 하며 보냈다. 선, 오, 윤은 논을 갈았는지, 산나물을 캤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