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 위에서의 하룻밤은 드문 경험이다. 난방기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의 기온, 도시의 내음에 물들지 않은 청량감, 이국에서의 밤이라는 약간의 설렘 등등이 어우러져 여행과 휴식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미녀가 옆에 없어도 즐거움은 충분했다.
아침은 대단히 요란스러웠다. 두 아가씨가 동참해서다. 잠자리는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조잘조잘 쉴새없이 떠들어댄다. 두 쌍에게 탁자 하나를 주고, 윤과 나는 따로 앉았다. 친구 집에 놀러온 기분이다. 식탐이 강한 선의 요구에 따라 음식물이 즐비했다. 오의 표정에서 저녁의 장면이 그려졌다. 피곤한 기색이 또렷하다.
새 날이 밝아도 정의 정신은 어디로 갔는지 돌아올 줄을 모른다. 밑에서 일을 보는 정과의 통화로 말미암아 한적한 산상의 아늑함이 사라져갔다. 말을 타기로 예정되어 있는 날이다. 그런데 가려고 했던 마장이 휴장이란다.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모두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선에게 얘기를 전하니 첫마디가 ‘**’이다. 당나귀를 탔건 어쨌건 밤에 탔으면 됐지 뭘 또 말을 타겠다고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말에 환장한 놈이다. 정신이 없는 정은 다시 정신을 놓아야 했다. 그 와중에 어찌했는지 다른 마장을 구했단다.
하산을 서둘렀다. 좁은 찦차의 긴 드라이브가 이어졌다. 천산산맥을 왼쪽으로 두고, 도시를 가로질러 계속 서쪽으로 달리는 것이다. 이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시간에 방향감각이 뒤죽박죽된 원인을 찾았다. 끊임없는 학구열의 결과다.
한반도에서는 대부분의 집이 남향이다. 뒤에는 산이 있기 마련이다. 뒤쪽의 산은 북쪽이다. 이 당연한 것이 여기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천산산맥은 이 나라의 남쪽에 늘어져 있는 것이다. 알마티는 산 북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 의문이 풀리고 나서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우리는 지금 천산산맥의 북쪽에 있다는 것을 계속 되뇌었다. 북망의 고을에, 아니 피안의 세계에 놀러왔다. 옆의 놈들이 고교 친구들이라 수학여행과 흡사했다. 삼십팔 년 만이다. 주고받는 대화의 투나 내용이 고등학생과 다를 게 전혀 없었다. 욕지거리도 다반사다. 어른들의 말에 옷과 사람은 묵은 게 좋다더니, 정말 묵은 놈들이 편하긴 하다.
얼마를 달렸는지 헤아리기 힘들다. 한참 뒤에야 시골에 도착했다. 정신이 없는 정이 처음 통역을 했던 줄라쥬를 데리고 나타났다. 마장이다. 절차를 밟느라 몇 십분 뒤에 말이 있는 곳으로 안내받았다. 차례로 각각 한 마리씩 배정을 받았다. 생각보다 커서 두려웠다. 그 와중에 오는 흰말을 고집했다. 타지 못한 백마를 여기에서라도 타야겠다는 것이다. 가슴에는 두려움이 가득한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너른 벌판을 달리는 기대를 했다. 이게 아니었다. 울타리 안을 계속 맴돌았다. 그게 다다. 어지러웠다. 말을 기어이 타겠다는 선의 모습이 어색했다. 간간이 즐기는 줄 알았다. 지나 나나 다를 게 없다. 물었다. 한국에서는 팔십 만원이란다. 싼 맛에 고집을 부렸다는 얘기다.
작렬하는 태양의 빛이 곧바로 내리꽂히는 대지에서 잠시 머무는 것도 버겁다. 말 위에서 그 빛을 맞으며, 좁은 공간을 빙빙 도는 승마가 힘들었다. 이러다 초원으로 뛰쳐나가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도 아니다. 졸라서 겨우 고삐를 잡힌 채로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그럴듯한 음식점에서 굴라쥬와의 농담이 재미났다. 한국에 일 년 정도 유학한 경험이 있다는 맑은 아가씨다. 하얀 얼굴에 금발이다. 순전한 위구르족이란다. 웃은 모습이 귀엽다. 재치도 갖추어 대화가 즐겁다. 귀국의 날이 임박해서 혹 얘가 우리가 찾던 아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과 연결되어 생각을 지우고 말았다. 맑고 깨끗함에 미안했다. 우리의 김태희는 소녀의 티를 완전히 벗은 여인이다. 그래도 카자흐스탄에서의 허전함을 달랠 수 있었다. 비비와의 저녁을 바라며, 다시 부르라고 할 때마다 살짝 질투의 빛이 보였다. 더 다그치지 못했다. 며칠 동안 알마티에 머문 시간만큼이나 몸에는 피로가 잔뜩 쌓였다. 그 피로가 약간 씻어진 듯했다.
공항으로 가는 시내의 교통사정이 만만치 않았다. 이제 친숙해진 운전사의 노련한 솜씨로 말미암아 다소 짜증스러움을 삭혔다. 묵은 피로에 약간의 짜증이 더해져 견디기 힘들었다. 급하게 찾아든 저녁 식당도 편안한 휴식을 주지 못했다.
카자흐스탄의 밭 매는 김태희를 포기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사람도 없고, 시간도 없다. 그런데 막힌 도로에서 옆의 승용차를 바라보다 놀랐다. 여성 운전자들이 모두 김태희인 것이다. 피로가 일순간에 달아나고, 눈망울도 초롱해졌다. 보면 볼수록 분명하다. 맞다! 여기에는 정말 미녀들이 널렸다. 그럼 며칠 동안 우리들은 뭘 한 것인가.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동승해서 귀국하겠다는 정에게도 물을 수도 없었다. 이미 그는 넋이 나간 채로 탈진상태다. 아무런 연관이 없는 곳에서의 아쉬움이 남았다. 잠시 몇 가지 구상을 해보았으나 짜증과 피로가 다시 솟구쳐 그만두었다.
현실적으로 생각을 바꿨다. 오던 비행기의 승무원인 슬기가 다시 오려나 하는 기대가 일었다. 내리면서 갈 때도 만날 수 있는지를 물었는데, 자주 바뀌어 아마 힘들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럼에도 순환의 주기가 되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다.
비행기에 오르면서 이제 돌아간다는 안도감에 다소 피로가 녹았다. 두리번거리며 슬기를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힘든 밤비행기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여섯 시간을 견뎌야 했다. 새로 만난 아가씨들이 오갔으나 선도, 오도, 윤도 조용했다. 몇 마디 던지면서 일을 만들어보고자 했으나 그럴 힘이 없었다. 몇 년 전 다시는 밤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중앙아시아의 미녀 얘기에 덜컹 승낙을 하고, 이 짓을 다시 한다.
어두운 공간에서 잠을 청해도 도무지 오지 않는다. 말을 건넬 사람도 없다. 엔진 소리만 들린다. 며칠을 되돌아보았다. 시간과 공간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익숙한 사람 몇이서 전혀 낯선 곳에서의 낯선 짓을 하고 다녔다.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귀국에 임박할 때까지 김태희는 만나지 못했다. 없어서가 아니다. 그 이유는 거론하기 어렵다. 그냥 접어두어야 맞을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은 곳에서 수작도 불가능했다. 세계 몇 위라는 카자흐스탄의 넓은 땅덩어리가 피로로 여겨졌다.
오전 일찍 트렁크를 끌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갑작스러움에 놀란 눈으로 쳐다보면서, 재미있었느냐고 묻는다.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정말 힘들어 보인다고 한다. 직원들의 미소가 너무 반갑다. 정말 예쁘다. 뭐 하러 그 먼 곳까지 갔다 왔는지. 오봉산이 전설이 떠올랐다.
아이고! 김태희를 찾으려면 한국방송공사나 문화방송국 앞에 얼쩡거려야지, 거기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진짜 김태희가 아니라도 좋다. 그녀보다 더 맑고 어여쁜 여인들이 옆에 있다. 한 녀석이 커피를 들고 와 다시 묻는다. 강소라나 설현 같은 애를 진짜 못 만났어요? 피곤해서 죽을 맛이다. 못 만났다. 일어서며 미소를 짓는다. 던지고 싶은 말이 분명히 있었을 게다. 바보 같은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