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추문사이의 거리는 이승과 저승사이만큼 아득한 것일까...
욕망을 사랑과 추문이라는 대립물에 가두지 않고 욕망이 구체적으로 접속하는
그 다양한 결들의 진심에 주목한다면 어쩌면 그 거리는 동전의 양면처럼 자웅동체일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에 있어서 예기치 않은 만남(접속)에 의한 새로운 관계(배치)는 얼마나 역동적이고 새로운 기쁨을 가져다 주는가...
그것은 결코 젊읆만의 특권이나 선물일 수는 없고 노년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음을 영화 은교는 보여주고 있다.
영화 ‘은교’는 국민 시인이라고 불리울 만큼 명성을 쌓은 이적요라는 노시인이 17살 여고생 은교와 우연히 만나면서 빚어지는 사랑,
그 설렘과 번뇌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이적요의 분신 같은 젊은 제자 서지우가 끼어들며 갈등의 불씨는 커져간다.
그것은 젊음과 늙음이라는 이항 대립을 통하여 끊임없이 변주되어지다가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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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요와 은교가 만나는 영화의 첫 장면에 들어 가보도록 하자.
이적요는 외출 후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창가 흔들의자에 곤히 잠들어있는 은교를 발견하게 된다.
소나무 잔가지 흰 그늘이 정물같은 은교의 얼굴위에서 그네를 타고 있었고, 음푹 들어간 발목에 흙먼지가 아무렇게 묻어있고,
손등위로 수맥 같은 연푸른 핏줄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이적요의 심장은 뛰기 시작했다.
평생을 그리워했으나 얻을 수 없었던 욕망이 거기 있음을 단 한 순간의 찰나에 느낀다.
불온한 시대에 리얼리즘과 서정시를 동시에 성취했다는 칭송을 듣던 시인 이적요는 자신의 시는
다다를 수 없었던 사랑을 노래했던 것이라고 여기고 은교의 쌔근거리는 숨결에서 우주와의 소통을 느낀다.
별의 이미지를 박제화된 감수성만으로 느끼고 있던 제자 서지우에게 별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별뿐일 뿐이고,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별은 제각각 느껴진다고 가르친다.
이 영화의 모티브는 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별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하듯, 사랑을 바라보는 시각도 통념화 할 수 없는 법이다.
70 노인의 17살 소녀에게 품는 사랑은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고 환타지속에서만 아름답게 형상화 되기에 아련하다.
봄 날 나뭇잎이 제 각각의 빛깔로 눈부시게 흔들리듯 세속의 사랑 또한 제 빛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랑에는 인종이나 종교나 신분이나 나이로 인한 어떠한 편견도 허용해서는 안될 고유성이 있는 법이다.
나이 많은 노인의 사랑을 추문 혹은 더러운 스캔들이라고 폄하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영화 ‘은교’에서 이적요의 사랑을 로리타 콤플렉스에 빠져 미소녀에 집착하는 변태적 행위로 보거나,
노인에게도 엄연히 존재하는 성적인 코드로만 해석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다시 은교가 이적요에게 헤나 – 헤나는 문신과 달리 지워진다. 헤나의 한시성은 이별을 암시한다 -
을 그려주는 영화의 장면으로 들어가 보자.
노오란 스웨터를 입은 은교는 할아부지에게 헤나를 그려준다며 자신의 무릎위에 이적요의 머리를 눕힌다.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무릎에 품고 가슴팍에 창을 그려주는 은교를 바라보는 이적요는 황홀한 무릉도원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가슴을 구부릴 때 그녀의 머리칼이 이적요의 이마를 간지럽혔고, 그 사이로 언뜻 비치는 은교의 입술은
이른 봄 햇살에 곱게 피어 난 동백꽃처럼 관능적이다.
은교의 가슴에서 불어오는 간지러운 바람과 향기는 이적요를 아득한 환타지의 세계로 이끄는데,
어느새 이적요는 환희에 찬 젊은이로 환생하여 은교와 숲 속에서 나 잡아봐라 사랑 놀이를 한다.
발 뒤꿈치를 들고 유리창을 닦는 은교를 카메라는 역광으로 눈부시게 묘사하는데 무채색의 자연빛은
환상의 피아노 선율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우리들을 감성의 원형질로 도달하게 한다.
은교의 입에서 쉐쉐 거리는 풀무소리를 들으며 이적요는 새로운 문학적 영감을 얻으며 그녀와의 합일을 꿈꾼다.
한편 단단한 근육질의 젊은 제자 서지우는 스승이 쓴 소설을 자기 이름으로 출판하여 베스트 셀러 작가로 유명세를 타는데,
그 또한 은교의 싱싱하고 날 것 그대로의 매력에 빠져들고 만다.
그러나 서지우의 은교를 향한 욕망은 젊음으로서의 육체적 욕망과 그에 따른 유희이고, 자기 스승과 은교의 관계를
용납할 수 없는 더러운 스캔들로 인식하는 데서 비롯된 질투심일 뿐이다.
이적요 시인에게 문학적 영감을 주어 집필하게 만든 소설 ‘은교’를 서지우가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며 본격문학
작가로서의 평판도 얻게 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적요는 분노에 몸서리를 치고...
영화 ‘은교’는 문학, 정체성, 사랑이라는 3가지 요소가 뒤얽혀 세 사람에게 펼쳐지며 갈등의 정점을 향해 달려간다.
자 이제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가보자.
파멸을 예감한 이적요는 곡기를 끊고 술을 통해 죽음을 영접하려 하고 있는데 은교가 찾아 온다.
소설 ‘은교’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은교는 움크려 누워 있는 이적요가 죽은 줄 알고 곁에 누워 비 맞고 찾아
온 날을 회상하고 자신을 예쁘게 써 주어서 고맙다고 고백한다.
하얀 안개꽃 아래 이적요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영화 ‘은교’는 소재의 파격성 뿐만이 아니라 주제 의식과 연출도 돋보이는 수작이다.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와 그것을 형상화하는 카메라의 앵글, 조명, 미장센 그리고 음악이 탁월한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영화이다.
70세 노인의 사랑도 충분히 서정적일 수 있어서, 그리고 그것이 아직은 리얼리즘이 아니라 환타지여서 아련하다.
대중 문학도 인간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성찰하듯이, 대중의 통속적 사랑은 언제나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