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에 이은 두 번째 걸작을 세상에 선보인다. 그들의 판결은 국회에서의 의결 절차와 과정에 문제가 있지만, 그 결과물인 미디어 법은 유효하다고 한다. 시장판에서 자릿세, 보호세 뜯어먹는 양아치들도 지들 나름의 규칙이라는 것이 있다. ‘면적 몇 평 이상 가게는 얼마, 손님 몇 명 이상 가게는 얼마.’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규칙과 대한민국의 법이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만들고 고치는 과정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양아치 규칙은 양아치 왕초가 만들고 싶을 때 만들고, 고치고 싶을 때 고친다. 쉽게 말해 양아치 왕초가 용돈 궁해지면 자릿세, 보호세는 무조건 올라간다. 양아치 규칙 개정과정은 왕초가 ‘내일부터 삥 뜯는 현찰 120% 올려!’라고 한마디 질러대면 그게 바로 시작과 끝이 된다. 논의 과정 필요 없고, 표결과정도 똘만이들 ‘ 예!! 형님.’ 복창이 전부이다. 대리투표, 부정투표 이런 거 아무 의미 없고, 아무 상관없다. 일사부재리 원칙? 왕초가 나가기 전에 ‘참, 계산 잘못했다. 125%로 올려!’라고 덧붙여 한마디 하면 만사 오케이, 일사천리이다.
법이라는 논리체계의 대가들이라는 헌법재판관들에게 묻고 싶다. 과정의 적절성이 담보 되지 않은 상태로 의결된 법률이 효력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법 논리상으로 타당한 결론이라면 양아치들의 규칙과 대한민국 법의 정당성과 권위에 대해 헌법재판관 나리들은 과연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믿고 생각하는지 정말로 궁금해진다.
더 나아가 미디어법의 이해 당사자인 조중동, 재벌, 이명박, 한나라당과 헌법재판관들과의 관계와 지들 멋대로 규칙 만드는 양아치 왕초와 복창으로 의결해주는 똘만이들의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그들의 터진 주둥아리에서 나올 단어들이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어느 분야에서나 권위는 어떠한 권력에도 종속되지 않고 해당 분야의 고유한 원칙에 충실할 때 빛을 발한다. 그리고 권위는 짧은 세월, 단판 승부로 만들어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기나긴 세월, 수많은 상황에서 일관된 원칙을 고수할 때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본질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 헌법재판관들은?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은 헌법재판소와 구성원인 헌법재판관들에게 법에 대하여 최고의 권위를 향유할 수 있는 자격과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언제나 법 고유의 원칙이 아닌 권력에 충실한 판결로 주권자들이 그들에게 부여한 숭고한 자격과 기회를 유린하고 능멸했다. 노무현 탄핵 심판에서도 그들의 판결은 그저 촛불로 불타오른 민심이라는 힘을 두려워해서 굴복했을 뿐이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헌법재판관들은 단 한 번도 법을 우선해서 판단한 적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대한민국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헌법재판관들과 시장 양아치 똘만이들과의 차이점을 도저히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헌재의 판결을 접한 대한민국의 모든 재판관들이 과연 검찰에게 과정의 적절성을 이유로 검찰이 제기한 사건의 증거능력을 거부할 논리가 남아 있을 수 있는지도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4대강 삽질 따위로 국민 혈세는 흥청망청 낭비하면서도 입으로는 작은 정부를 씨부리는 이명박에게도 주인인 국민의 한 사람으로 제안한다. 우리나라 CSI는 미국 CSI처럼 개고생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증거는 대충 만들어 내놓아도 검찰이 제시하면 모두 증거가 될 테니까. 그냥 과학수사본부 해체하고 그 예산도 4대강 삽질에 쏟아 부으면 좋지 않을까? 아울러 헌재도 해산하고 그곳에 들어가는 예산도 4대강 삽질에 털어 넣길 바란다. 헌재의 기능을 대신할 기구? 그건 내가 우리 동네 시장 양아치 조직 하나 소개한다.
서기 33년경.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끌려온 예수를 보고 처음에는 ‘저자는 내 관할이 아니다.’라는 냉소적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다시 사형을 위한 재판을 청하자 빌라도는 ‘저 자는 그저 정신이 나간 놈이지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는 일차 판결을 내린다. 거기까지가 로마법에 의한 순수한 법리적 판결이었을 것이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를 왕을 사칭하는 역모자로 몰아 빌라도에게 반드시 그를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빌라도는 자신의 법리적 판단을 지키고 유대인도 무마하고자 엽기적 방법을 선택한다. 예수를 고문하여 사람들의 동정심을 사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는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말한다. ‘ 난 왕이 아니라고 해, 난 미쳤다고 해, 그럼 널 살려주마.’ 예수는 빌라도의 제안을 거절하고 흥분한 유대인의 폭동으로 인해 자신의 총독 근무 기록에 오점이 남을까 두려운 빌라도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내린다.
빌라도의 판결은 ‘법의 민족’이라는 로마인의 속성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이다.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는 20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독교인들의 기도문인 사도신경에 그의 이름을 욕되게 남기고 있고 있는지 모른다. 하기야 빌라도의 판결마저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고 기독교 신앙으로 이야기한다면 기독교 신앙이 없는 나로서는 할 말은 없다.
예수는 아직 재림하지 않으셨지만, 본디오 빌라도는 21세기 대한민국에 헌법재판관이라는 존재로 화려하게 재림했다. 자신이 깨지고 다칠 걱정이 없을 경우에만 법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과 안위에 한 점이라도 금이 갈까 두려운 상황에서는 법전을 내던지고 철저하게 힘을 가진 편에 맹종하는 모습은 자신이 무죄라 선언한 예수를 고문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빌라도의 선택과 판에 박은 듯 닮아 있기 때문이다.
“관습헌법”에 이은 제2 탄. “ 법제정에서 과정은 불법이어도 결과물은 적법하다.”는 설치류에게나 통용될 해괴한 논리와 헌재의 판결은 앞으로 영원히 법을 공부하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법관의 확실한 사례로 인용될 것이다. 마치 빌라도가 그 이름을 사도신경에 영원히 남긴 것처럼. 하기야 민주주의 신앙에 관점에서 보자면 헌재의 이번 판결도 모든 불의와 모순을 딛고 이 땅에 영원히 뿌리내릴, 원칙과 상식의 민주주의를 위한 다시 하나의 반면교사로 준비되고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신앙이 없는 자, 그리하여 오늘 내가 헌법재판소와 헌법재판관에게 내리는, ‘빌라도의 저주’에 그 어떠한 이의도 달지 말지어다.
(cL) 내과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