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반칙, 그리고 사기꾼
(딴지일보 / 화성 / 2010-01-07)
가카의 정부는 오는 11일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런데 이 수정안 발표를 5일 앞둔 1월 6일, 가카는 느닷없이 정운찬 총리에게 세종시에 기업 등을 유치할 때 다섯 가지 원칙을 지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미 오래전에 오뎅 국물에 말아 먹다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가카의 개념을 충분히 감안한다손 치더라도 최종안을 불과 며칠 남겨둔 상황에서 원칙을 지키라니. ㅎㅎ.
마치 결혼식을 5일 앞둔 딸에게 배우자를 고를 때는 이러저러한 원칙을 지켜서 해야 한다고 지시를 내리는 치매 걸린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랄까. 아니면 딸의 낙태수술을 위해 찾은 산부인과 대기실에서 여자는 모름지기 정조를 지켜야 하는 거라고 근엄하게 타이르던 어느 엄마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느낌이랄까. 정말 어이가 상실을 하고도 모자라서 떡실신을 할 지경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웃긴 건 그런 지시를 받은 후 자랑스럽게 언론에 떠벌리는 정 총리와 이를 여과 없이 보도하는 찌라시들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이라는 서울대총장을 지낸 정 총리는 가카가 지시하신 다섯 가지 원칙이 모두 나라와 국민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며 주인님의 명령을 충실히 받들겠노라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깨갱댔고, 찌라시는 찌라시대로 원칙을 강조하는 가카를 홍보하기 위해 혓바닥이 마르고 닳도록 빨아주셨다.
정 총리의 부르튼 이 입술을 보라!
하여, 가카가 말씀하신 그 '원칙'이란 게 도대체 뭐기에, 발표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총리와 찌라시들이 다시금 되새김질을 해대는 건지…. 언론에서 받아쓰기 한 뻔할 뻔 자의 홍보기사가 아닌 가카가 실제로 정 총리에게 지시했을 '진짜 내용'을 이 자리에서 속 시원하게 한번 까발려보고자 한다.
첫 번째 원칙 - 수도권을 포함해 다른 지역에 있거나 유치하려고 했던 사업이나 기능을 빼오지 마라.
정 총리가 요즘 수고가 많다는 얘기…. 저도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요즘엔 세종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충청도 쪽에 자주 가신다던데…. 폭설이 내린 지난 4일에도 대전에 내려가셨다고요? 제 고향 오사카에도 눈이 참 많이 내리는데, 눈 내리는 날엔 그저 오뎅 국물에 뜨거운 사케 한잔 빨고 마사지나 받는 게 최곤데…. 쩝….
근데 요즘 그쪽 수질은 좀 어떻습니까? 4대강 삽질 시작한 이후로 물이 안 좋아졌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좀 있다던데 그건 우리 국민들이 무식해서 그런 겁니다. 우리가 마사지 받을 때도 못 생긴 여자를 골라야 그나마 다른 남자 손이 덜 타서 좋은 것처럼 물도 좀 더러워야 고기도 살고 뭐 그런 거 아니겠나, 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헛소리들에 신경 쓰지 마시고 지금처럼만 열심히 하시면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참, 듣자하니 세종시에 내려갈 기업이 별로 없다고 하던데…. 사실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정 총리보고 가라고 하면 가겠습니까. 돈 안 되는데 안 가는 게 당연하지요. 예전에 그 ‘친구’라는 영화에서도 보면 유오성이가 장동건이한테 하와이 가라고 하니까 '니가 가라 하와이' 하면서 안 가겠다고 해가지고 결국 장동건이가 죽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수도권 기업들 그쪽으로 보내서 우리한테 좋을 게 별로 없습니다. 괜히 잘못하다간 우리 쪽 표만 떨어질 수 있으니까 안 간다는 기업들 괜히 보내려고 애쓰지 마시고…. 정 총리도 가만 보면 몸으로만 대충 때우려 하는 것 같은데, 지금이 쌍팔년도도 아니고 그런 걸로는 안 통하는 시대니까 머리를 좀 쓰면서 하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지역에 있는 기업은 안 보내겠다, 마 그런 원칙을 세우면 쉽게 해결되는 거 아닙니까.
두 번째 원칙 - 신규사업을 중심으로 유치할 것!
아니 뭐라고요. 그럼 누굴 보내느냐고요? 정 총리, 우리가 이런 장사 하루 이틀 합니까. 쪽팔리게 뭐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럽니까…. (점차 본래의 말투가 나오는 가카) 요즘 뻔질나게 충청도 쪽 내려가는 게 세종시 때문이 아니라 혹시 밤이슬 맞으며 혼자만 재미 보고 다니는 거 아닌가요?
정 총리, 똑바로 하시라고요.
서울대 총장까지 하신 분이 왜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요. 오세훈 시장을 보세요. 서울에 폭설이 내리니까 제일 먼저 나가서 눈 치우는 사진을 찍어서 보도자료 뿌렸잖아요. 시민들이야 폭설이 내려서 교통이 막히니까 당연히 열이 받았겠지만 그 사진 보면서 '시장이 새벽부터 나와서 저렇게 눈을 치우는데도 이렇게 길이 막히는 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어쩔 수 없었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뭐를 좋아합니까. 물건이든 사람이든 앞에 'New' 자만 붙으면 다들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기존에 하던 거를 옮겨오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신규사업을 한다고 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왕이면 이름만 들어도 새로운 느낌이 팍팍 나는 것들, 가령 예를 들면 첨단 바이오시밀러 같은 생명공학이나 LCD 같은 것들로 그럴싸하게 포장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리고…. 얼마 전에 삼성 이 회장 풀어줬잖아요. 정 총리는 장사 안 해봐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저 알다시피 장사꾼 출신입니다. 노가다 씹장에서부터 부동산 투기까지 안 해본 거 없어요. 근데 그런 제가 괜히 눈 왔다고 기분 좋아서 그랬겠습니까. 다 이럴 때 써먹자고 한 거 아닙니까. 얘기 다 해 놨으니까 가서 도장만 찍어오세요. 아 정말 대통령이 이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줘야 하나 참나….
세 번째 원칙 - 현지의 고용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 중심으로 유치하라!
정 총리는 지금 우리나라에 가장 시급한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바로 일자리 문제 아닙니까. 공식적으로는 실업자가 80만 명이라고 발표하고 있지만 사실은 330만 명이 넘는다는 건 총리도 알고 있잖아요. 서울에서 일류대학 나와도 노는 사람이 태반이란 얘긴데 충청도 쪽이야 오죽하겠어요.
그러니까 신규 사업을 하게 되면 지역 주민을 많이 고용하게 돼서 백수들을 구제해준다는 말은 꼭 넣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노인네들이야 빈둥빈둥 놀고 있는 자식들 취직시켜준다는데 그 이상 뭘 바라겠어요. 더 바라면 도둑놈인 거지, 자기들이 뭐 한 거 있다고….
뭐라고요? 신규 사업이 대부분 첨단 분야라 일자리가 많이 필요하지 않고, 얼마 안 되는 일자리도 지역 주민이 아니라 전문지식을 갖춘 수도권 인력이 가야 한다고요? 아 참, 이거 답답해서 정말…. 정 총리, 정 총리는 지금 학자가 아닌 총리예요. 총리, 모든 걸 학술적, 논리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쑈하는 마인드, 정치적인 마인드로 풀려고 좀 해보세요.
가카의 친서민 정책
기업이 들어서면 꼭 정규직 직원들만 필요한 게 아니잖아요. 비정규직이나 알바도 필요하고, 또 그 사람들이 거기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오뎅도 사먹고 할 거니까 밥집이나 술집, 포장마차 같은 것도 늘어날 텐데…. 그러면 그건 일자리가 아니고 뭐 잠자리랍디까. 그런 일자리들 생기면 총리하고 저하고 돌아다니면서 국밥도 먹고 막걸리도 한잔하면서 사진도 찍고 하면 지역 경제야 저절로 좋아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정 총리도 잘 알겠지만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요. 그거라도 해서 먹고살게 해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어디서 배우지도 못한 사람들이…. 그리고 그 친서민 정책이라는 게 뭐 별다른 게 아니에요. 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주는 거, 그게 바로 서민을 위한 정치지, 안 그래요?
네 번째 원칙 - 인근지역과 주민의 요구를 적극 반영해야 한다.
이거 오늘 제가 너무 많은 걸 알려주는 것 같은데…. 괜히 나가서 엉뚱한 소리 하지 마시고 잘 받아 적어놓으세요. 그리고 좀 이따가 또 시장에 한번 나가봐야 하는데 총리도 별일 없으면 같이 나갑시다. 으흠….
충청도 사람들이 세종시 수정안을 반대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행정부처를 옮기면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야 공무원들이니까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대부분 같이 오게 되지만 기업이 온다고 하는 건 못 믿겠다 이겁니다. 기업이야 땅만 싸게 사놓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미루다가 정권 바뀌고 땅값 올라가면 땅 팔고 언제든 없던 일로 할 수 있는 거니까.
저도 기업을 해본 사람이지만 사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 기업이란 게 원래 하이에나처럼 돈 되는 곳으로 왔다리 갔다리 하는 거니까 어찌 보면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내 임기가 이제 3년 남았는데, 부지 매입하고, 사업 타당성 조사하고 기획서 작성하다 보면 3년 금세 갑니다. 그러니까 그다음 문제는 다음 정부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미래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지역 주민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여 빵빵한 기업들을 유치시켰으니 우리를 믿어달라고 적극 홍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정안이 발표되고 나서도 계속해서 주민들의 요구를 적극 반영토록 하겠다, 뭐 그런 쇼맨십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정 총리는 TV도 안 봐요? 요즘엔 'SHOW'가 대세라고요.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래 다 똑똑하기 때문에 같은 지역 주민이라 해도 의견들이 각기 다 다릅니다. 그 의견들을 모으는 데만 해도 몇 개월은 걸릴 거고 그러다 보면 사람들도 먹고사는데 바빠서 대충 흐지부지해질 테니…. 시간은 항상 가진 자의 편이란 걸 명심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 원칙 - 해외 유치 기능을 감안해 자족용지를 충분히 남겨두라!
에…. 아까는 제가 조금 흥분해서 총리에게 약간의 무례를 한 것 같습니다. 삼류 국민들 데리고 잘사는 선진 일류국가 한번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총리도 이런 저의 마음을 헤아려 잘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총리님 그렇죠? 하, 하.
저는 마…. 이번 경인년 새해를 맞으면서 청와대 뒷동산에 올라가 인왕산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악조건에서도 살아남는 쥐의 생존력으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세종시 수정안을 기필코 밀어붙여야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정 총리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맞는 걸 아니라고 끝까지 잡아떼 주셔야 하니까.
네 가지로 하면 싸가지가 없는 것으로 보이니까 기왕 하는 거 한가지 추가해서 다섯 가지로 합시다. 아마도 압력을 좀 넣어서 기업 몇 개 유치한다고 해도 정부가 사놓은 땅이 좀 남게 될 겁니다. 아무리 반값에 넘긴다고 하더라도 이번에 우리 쪽에서 뒤로 챙겨야 할 몫도 꽤 있고…. 그래서 사실 기업들 입장에서도 땅값 외에도 만만치 않은 돈이 들 테니까….
전 세계 2억 7천만 명의 팬을 가진 마리나 오를로바
그래서 말인데, 남는 땅은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일부러 남겨 놓았다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외국 거라면 다들 환장하고 덤벼들지 않습니까.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외국인의 투자를 위해 미리 여유공간을 확보해 놓았다고 하면 그림도 아주 좋아지고….
정운찬 총리님,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겠지만 저는 원래부터 법과 원칙을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항상 현재보다는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주위에서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끝까지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지나가는 잔바람에 흔들리지 말고 부디 멀리 내다보시라는 말씀입니다.
정권은 짧고 인생은 긴 겁니다.
무릇 원칙이란 어떤 행동이나 이론 따위에서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을 말한다. 이런 원칙을 벗어나서 행동하면 반칙이 되고, 그 반칙을 일삼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세종시를 원안대로 하겠다고 몇 번이나 공언해 놓고 이제 와선 못 하겠다고 배 째라는 사람, 처음엔 기업도시, 그다음엔 국제화 도시였다가 교육과학 중심도시로, 그리고 다시 국제과학비지니스벨트로 자고 나면 말이 달라지는 사람, 이런 희대의 사기꾼이 바로 우리의 위대한 대통령 가카이시다.
100년 만의 폭설이 괜히 내린 게 아니리라.
(cL) 화성 / 딴지정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