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1일 저녁 서울 성북구 안암로터리에 위치한 한 빌딩 2층. ‘조지윤 영어연구원’이라는 간판이 붙은 강의실로 사람들이 속속 들어갔다. 50대부터 2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 강의실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조지(George)윤(70·본명 윤광옥)씨와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선생님, 전에 뵀을 때보다 더 젊어지셨네요.” “건강하시죠.”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들이 오랜만에 만난 스승과 제자 사이다.
이날 강의실을 찾은 사람들은 우리나라 학원 영어강사 1세대로 꼽히는 윤광옥씨의 제자들이다. 1970년대 서울
광화문에서 엘리트외국어학원을 운영했던 윤씨는 1973년 국내에 ‘스크린 영어’를 도입해 인기몰이를 했던 인물. 녹음 테이프로 ‘생활영어’나 따라하던 기존 영어학원 수업과 달리 영화를 보면서 살아있는 영어 대사를 익히는 스크린 영어는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 매달 700명의 수강생이 몰려드는 인기 덕분에 당초 학원강사였던 윤씨는 학원강사 1년 만에 학원을 인수할 정도로 큰돈을 벌기도 했다.
토영클럽 창립대회윤씨 제자들이 이날 모인 이유는 ‘토영클럽’ 창립대회를 갖기 위해서였다. ‘토영클럽’은 ‘토종 영어도사 클럽’의 줄인 말로, 이날 모인 사람들의 정체를 한마디로 아우른 말이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윤씨에게 수년간 영어를 배웠다는 점 외에는, 외국에 나가서 어학연수를 받거나 원어민 교사에게 영어를 배운 일이 없다. 유학을 갔더라도 한국에서 상당 수준의 영어 실력을 쌓은 후에 유학을 가서 바로 적응한 사람들이다. 우리 땅에서 한국 사람에게 영어를 익혔지만 모두 영어도사, 영어공부에 미친 사람들임을 자임한다. 이날 참석한 국가대표 유도선수 출신인 최경택
대한체육회 태릉선수촌 지도위원의 경우 체육계에서 자타가 알아주는 영어 실력파다. 국제 회의나 외국 체육계 인사들의 태릉 방문 시 통역을 도맡아 한다.
이날 토영클럽에는 회장인 최경택 위원 외에도 단국대 철학과 황필홍 교수, 정해륜 전 고려대 의대 학장, 진기영 로뎀나무교회 담임목사, 강수기 소아과 전문의,
윤용석 영타이거선교회 목사,
이종두 고려대 연구교수, 고승현 변호사, 유선종 우신고 영어교사, 박홍희 고려대 공대 박사과정생, 김가형 방과후학습 중등 영어교사, 서윤창 전 LG그룹 연구소 연구원,
삼성물산 기획실에 근무하다 현재 자영업을 하는 송경호씨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참가했다. 영어도사를 자부하는 윤씨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빼놓고는 한자리에 모인 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토영클럽 모임 창설을 계기로 한 가지 공통의 목표를 세웠다. 자신들에 이어 나이 어린 토종 영어도사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영어학습법 캠페인을 벌이고,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이 제대로 영어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돕자고 했다. “영어 사교육 비용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4조원이 넘습니다. 조기 영어유치원이다 뭐다 해서 아이들에게 돈을 쏟아부은 결과죠. 여기다 학생들의 장단기 해외연수 비용까지 합하면 어마어마한 돈을 영어 배우기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나라 토플 성적은 아직도 세계에서 바닥권을 맴돌고 있죠.”
가난한 아이들도 영어도사 될 수 있다토영클럽 기치를 든 최경택 위원은 “제대로 영어 공부를 하면 영어유치원이니 조기 어학연수니 해서 아이들 고생시키면서 돈을 낭비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며 “특히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일찍부터 ‘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ivide·영어 격차)’로 마음고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올바른 영어 교육 철학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신고 영어교사인 유선종씨는 “어떻게 보면 고지식하게 들리는 윤 선생님의 영어학습법이 그야말로 약이 됐다”며 “동료 영어교사들이 제대로 실력을 쌓으면 굳이 원어민 교사들을 두느라 교육예산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윤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말했다.
토영클럽 회원들이 추종하는 조지윤식 영어학습법은 어찌 보면 교과서적이다. 제1원칙은 ‘완벽한 독해력이 영어회화의 지름길’이다. 원어민에 가까운 영어 발음을 강조하는 요즘 세상에 뜬금없이 들릴 수 있지만 그의 주장은 확고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못하고 영어 문장이 들리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글로 쓴 영어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미국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제2외국어로 영어를 배웁니다. 영어 문장을 우리말로 옮기고 이것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완벽한 독해, 총체적인 영어구조가 머릿속에 자리잡지 않으면 영어를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이건 연음현상, 조음구조 등 발음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윤씨는 “독일인 이참
관광공사 사장이나 미국인 하일씨, 프랑스인
이다도시씨가 발음은 다소 어색하더라도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지 않느냐”며 “우리도 발음에 개의치 않고 최소한 이들처럼만 영어를 구사하면 되는 것이고 거기다가 더 욕심을 부리면 영어로 전문지식을 더할 수 있으면 된다”고 했다.
“완벽한 독해 공부가 영어의 지름길”그가 제자들을 교육시켜온 방식은 40년 가까이 항상 똑같았다. 일단 시사주간지 타임(TIME) 에세이나 칼럼, ‘위대한 개츠비’ 같은 고전소설, 영화 등을 골라서 완벽한 독해를 해준다. 다 수준이 높은 읽을거리, 들을거리들이다. 그는 “어느 정도 학력과 지식을 갖춘 외국인이 도구로써 영어를 배우는데 만날 미국 초등학생 정도의 언어구사나 ‘밥 먹었느냐’는 수준의 말만 해서는 영어를 끝내 익히지 못한다”며 “수준 높은 읽을거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영어 실력이 빨리 느는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그의 독해는 제자들 사이에서 완벽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한 문장, 한 단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이 과정에서 오역이 종종 도마 위에 오른다. 예컨대 그가 20년 이상 강의해온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 대학교수들이 번역한 것에도 오류가 적지 않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 닉 캐러웨이가 말하는 내용 중 ‘And now I was going to become again that most limited of all specialists, the well-rounded man’이라는 구절이 있어요. ‘이제 나는 온갖 종류의 전문가들 중에서 가장 한정된 전문성을 지닌 팔방미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가장 정확한 번역인데 국내에서 발간한 번역서는 모두 ‘이제 나는 전문가들 중에서 흔치 않은 균형 잡힌 사람이 되려고 했다’로 번역돼 있어요. 증권업계에 취직한 캐러웨이가 예일대학 학보기자 시절 이책 저책 읽은 것처럼 다방면에서 이것저것 조금씩 지식을 쌓아 다양한 설을 풀 수 있는 팔방미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대목인데 번역서를 보면 무슨 맥락이고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지요. 이런 오류가 하나둘이 아닙니다.”
“3년만 투자하면 영어는 정복된다”그는 2006년 펴낸 ‘선무당이 판치는 한반도 영어굿판’이라는 저서에서 고등학교 1·2·3학년용 영어교과서 40종에 실린 1400개의 오류를 꼬집어내 잡지와 신문 등에 소개되기도 했다. 윤씨는
주간조선에 영작 칼럼을 연재한 바 있다.
그는 문장과 단어를 다 뜯어서 완벽하게 이해를 시킨 후에는 가능한 외국인들의 발음을 흉내내며 지겨울 정도로 문장을 소리내어 읽게 만든다. 이런 문장들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 자체가 영어실력이 일취월장하는 단계라는 것이다. 그가 “영어 에세이 50편, 영화 30편, 소설 5편에 3년간 투자하면 영어는 정복된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도 이런 학습법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는 “3년간 연습한 내용을 모두 잊어버린 상태에서도 영어 음성 자료들을 무작위로 들어
KBS 방송처럼 명쾌하게 들려오면 그 사람은 3년 만에 영어를 정복했다고 해도 된다”며 “이게 실제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의 영어학습법은 언뜻 설명만 들어도 알 수 있지만 따라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야말로 ‘영어공부에 왕도는 없다’는 걸 보여주는 공부법이기 때문이다. 토영클럽 회원들은 그의 공부법에 따라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쏟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단국대 철학과 황필홍 교수는 “내가 어려운 철학 강의를 영어로 할 수 있었던 것도 윤 선생님의 공부법에 따라 영어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은 결과”라며 “미국에 유학 가서 석·박사 과정을 거치며 윤 선생님이 많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변호사 고승현씨는 “처음 윤 선생님이 영어학습법을 제시했을 때는 유행하던 풍토가 아니라 갸우뚱했었다”며 “하지만 강독을 하면서 유사한 영어단어가 각각 어떠한 뉘앙스로 쓰이는 것인지 미묘한 차이까지 설명을 듣다 보니 독해력이 향상되며 영어실력이 제대로 늘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졸 출신의 토종 영어도사제자들에게 토종 영어도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해온 윤씨는 스스로도 토종 영어도사다. 윤씨의 최종 학력은 고졸로, 대학 문턱을 밟아본 적도 없다. 물론 외국 유학 경험도 없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미국인 선교사를 졸졸 쫓아다닐 만큼 영어 공부에 몰두하던 그는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카투사로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그의 영어 실력을 눈여겨본 미군 장교에 의해 미7사단 도서관 사서로 특채된 것이 진짜 영어도사가 된 계기였다. 그는 도서관 사서로 5년간 근무하면서 60여편의 영어 소설과 300여편의 영화 시나리오를 섭렵했다고 한다. 그는 영어실력으로 많은 일화도 남겼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미국 중앙수사국(CIA) 요원이 방한해 우리 정부 관계자들을 상대로 대테러방지 교육을 할 때 당시 정부 공식 통역사가 “너무 어렵다”며 포기한 것을 그가 맡아 마무리한 적도 있다. 일선 학원강사직에서는 오래전에 은퇴했지만 요즘에도 자신을 부르는 곳에는 어디든 달려가 영어를 가르쳐 준다. 최근에는 검찰청의 요청으로 서울고검에서 검사들을 상대로 스크린 영어 강의를 했고,
인천광역시 인재개발원에서 인천시 중견 간부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고급 영어 독해 강의를 하기도 했다.
앞으로 토영클럽 회원들은 주기적으로 모여 좀더 깊이 있는 영어공부 모임을 진행하며 조지윤식 영어학습법을 전파할 예정이다. 인터넷 홈페이지 등을 통해 조지윤식 영어학습법에 동조하는 회원들을 꾸준히 확보해 나갈 계획도 갖고 있다. 특히 가정형편이 어려운 중·고등학생, 대학생들을 선발해 영어 꿈나무로 양성할 작정이다. “오래 인연을 이어온 제자들과 앞으로 NGO처럼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싶습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처지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 강의를 하려고 해요.”
조지윤씨는 “이 땅에서도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다는 걸 꾸준히 입증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 이비치 인턴기자·경희대 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