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밴데요." 7월4일 구지수씨(가명)는 전화를 받았다. 부산 송도해수욕장에서 직장 동료들과 여름휴가를 보내는 중이었다. 멀리 있어서 물건을 받기 힘들다고 하자 '택배기사'가 돌연 정체를 바꿨다. 자신은 국정원 직원으로 압수 수색을 위해 왔다고 밝혔다. 압수 수색 영장엔 남편 이름과 함께 '반국가단체, 수괴, 암약' 따위 단어가 쓰여 있었다. 구씨는 일명 '왕재산' 사건으로 구속된 김 아무개씨의 아내다.
김씨는 '2001년께 남조선 혁명을 목표로 지하당을 구성하고 총책임을 맡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와 함께 4명이 더 구속됐다. 구속자 중에는 임채정 전 국회의장 정무비서관을 지낸 이 아무개씨가 포함되었다. 현직 민주노동당 소속 인천 지역 구청장 등도 수사선상에 오르면서 정치적 파장이 일었다. 민주노동당은 2007년 분당의 도화선이 된 '일심회' 사건처럼 자칫 이번 사건의 불똥이 엉뚱한 데로 튀지 않을까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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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조우혜 지난 8월4일 왕재산 사건으로 구속된 이의 가족(위 앞줄)이 국가보안법 철폐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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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당국도 바빠졌다. 한상대 검찰총장은 취임 일성으로 종북 좌익 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8월13일 취임 바로 다음 날 대검 공안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한 총장은 왕재산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검찰과 국정원 등 공안당국은 1994년 '구국전위' 사건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드러난 반국가단체 사건이라며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 노동당 225국에서 일했던 한 고위급 인사가 탈북하면서 공안당국의 합동 심문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이 인사가 공안당국에 관련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이 직접 대남 간첩단 '왕재산'에 지시를 내리는 데 간여했다는 것이다.
공안당국은 '왕재산'이라고 혐의를 둔 김 아무개씨의 집과 사무실에서 많은 분량의 압수물을 확보했다. 이를 근거로 수사를 확대했다. 김씨를 포함해 구속 수사 중인 5명은 김씨의 고향·대학 선후배, 회사 동료 등으로 얽혀 있다.
일심회 사건, '최대 간첩 사건'이라더니… 이번 왕재산 사건은 2007년 이른바 '일심회' 사건과 유사하다. 당시 공안당국은 '주범 격'인
장민호씨 집에서 인터넷 보고용 CD와 USB를 압수했다. 물론 그 전부터 도·감청과 미행 등을 펼쳤다. 장씨를 비롯해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 최 아무개씨 등 5명이 구속되었다. 일심회 사건 연루자들도 장민호씨의 회사 직원이거나 고등학교·대학 동문으로 얽혀 있었다.
당시 검찰은 '6·15 공동선언 이후 최대 간첩사건'이라고 이를 발표했다. 그러나 법원은 다른 판단을 내렸다. 1심 재판부는 이적단체 구성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 등 공안당국과 달리 이들을 간첩단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탈출·회합·잠입·통신한 혐의와 이적 표현물을 소지한 혐의만 유죄로 판단했다. 검찰이 반발하며 항소했지만 2심 재판부 역시 이적단체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또 법원은 당시 장민호씨 등 5명이 국가를 상대로 "국정원이 피의 사실을 공표하고 변호인 접견교통권을 침해했다"라며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것이 피의 사실 공표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1심 판결을 뒤집었지만, 국정원이 변호인 접견을 방해한 점은 불법행위로 인정해 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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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국정원 직원들이 7월9일 한국대학교육연구소를 수색하고 압수품을 차에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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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이번에도 간첩단 사건으로 기소할 방침이다. 하지만 일심회 사건처럼 이번에도 법원의 판단에 따라 이적단체 구성 혐의는 뒤집힐 수 있다. 디지털 저장매체를 출력한 문건에 대한 유죄 증거 능력도 주요 변수이다. 일심회 사건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디지털 저장매체에 들어 있는 문건의 내용은 진정성이 증명된 때에 한해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라며 검찰이 압수한 문건 파일 1만1876개 가운데 53건만 증거로 인정했다.
현재 공안당국은 김씨 외 < 민족21 > 에도 혐의를 두고 있다. < 민족21 > 안영민 전 주간과, 정용일 편집국장, 그리고 구국전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안영민 전 주간의 부친 안재구 전 경북대 교수 등을 잇달아 소환 조사했다. 공안당국은 안 전 주간 등을 상대로 왕재산 사건 구속자 중 한 명이 < 민족21 > 감사를 지낸 경위를 추궁했다고 한다. 또 공안당국이 북한의 공작원이라고 보고 있는 조 아무개 재일조선인총연합회 국제통일국 부국장과 접촉한 경위도 집중 조사했다.
공안당국이 북한 공작원으로 지목한 조총련 국제통일국 부국장 조 아무개씨는 < 시사IN > 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국정원의 주장에 대꾸할 말을 못 찾겠다. 독재정권 시기랑 똑같은 논리와 수법이다. 단지 나를 안다는 이유로 그 사람들이 간첩으로 몰린 건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지금껏 일곱 차례 공개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 있다고 밝혔다.
김씨를 포함해 구속 수사 중인 5명은 현재 묵비권을 행사 중이다. 이들은 법정에서 진실을 가리겠다는 태도이다. 안영민씨 등은 국정원이 변호사 동행을 방해한 점에 대해서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낼 방침이다. 공안기관이 자신하는 왕재산 사건의 2라운드가 법정에서 시작되었다.
임지영 기자 / toto@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