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총리는 그날, 거기에 없었다”
[결심공판 참관기] 변호인 최후변론을 통해 드러난 최후의 진실
(노무현재단 / 강기석 / 2011-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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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심공판에 참석한 한명숙 전 총리(좌) 지난 8월 29일 열린 마지막 증인신문(우) |
9월 19일, 드디어 결심공판이다. 물론 선고공판(10월 31일)이 아직 남아 있지만, 한명숙 총리를 겨냥해 지난해 7월 시작된 검찰의 2차 정치탄압극은 일단 1년 2개월에 걸친 장정을 마쳤다. 재작년 12월에 시작된 ‘제1차 곽영욱 사건’까지 포함하면 무려 1년 10개월이다. 모두가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그동안 피고인석에서 모멸과 수치를 견뎌내야 했던 한 총리가 우선 가장 지쳤을 것이다.
“잠깐 쉬고 내처 변호인 최후변론까지 모든 절차를 일찍 마치자”는 변호인단과 “저녁 먹고 속개하자”는 검사들이 티격태격할 때 “이젠 밥 먹는 시간까지 내가 판단해야 하느냐”고 한숨 쉬는 재판장의 표정에서도 피곤이 묻어났다.
오직 검사들만이 아드레날린을 주사한 듯 여전히 흥분상태다. 그 많은 정예 수사인력이 2년 가까이 오로지 한 총리 사건에만 매달리고 다른 일은 거의 한 것이 없다는 비아냥을 받는 특수부다. 허깨비 붙들고 용쓰는 것인지도 모르고 한 총리 사건을 만들고, 밀어붙이고, 키우는데 전심전력해 온 터다. 그 마지막 순간에 맥을 놓기보다는 일부러 흥분한 척이라도 하는 게 스스로에게 위로가 되긴 할 것이다.
고르고 골랐을 말들이 그래서 더욱 살벌하다. ‘범행이 치밀’하고 ‘죄질이 불량’하다고 했다. “표적수사·정치적 탄압 운운하며 농성까지 하고, 진술을 거부해 법정질서를 어지럽히는 등 선처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런 한 총리에게 검찰은 징역 4년과 함께 추징금 9억 4500여만 원(미화 32만 7500달러 포함)을 구형했다.
끝까지 흥분한 검찰, “징역 4년에 추징금 9억 4천5백만이요!”
그런 ‘어마어마한 구형’에 그럴듯한 이유가 없겠는가. 한 총리가 ‘이 사건은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가공의 사건’이라며 검찰신문은 물론 변호인신문까지 진술거부권을 행사하자, 검찰이 이어 풀어낸 논고가 장황하고 자못 치밀하다.
“이 사건 제보자는 한신건영 전 사장 한만호 자신이다. 피고인으로부터 사업상 도움을 받기 위해 3억씩 3차례 총 9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돈을 전달할 때마다 어음할인까지 하면서 급히 자금을 조성한 것을 보면 정치자금용이 분명하다. 합법자금으로만 정치하는 정치인은 극히 적을 것이다.
회사가 어려워져 (피고인으로부터) 2억을 돌려받은 후 서로 ‘고맙다’는 등 통화한 사실까지 있는데 3억을 더 돌려 달라 했으나 돌려주지 않으니 배신감과 분노 때문에 폭로를 결심한 것이다.
그 후 피고인에 대한 기소가 임박했을 때, 검찰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고, 출소 후 피고인의 도움을 기대하면서 한만호 주변인물들이 피고인 주변인물들을 접촉해 법정진술번복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사건을 요약한 검찰은, 한만호의 검찰진술서와 실황조사서, 한신건영의 ‘채권회수목록’과 그 근거가 된 ‘B장부’, 자금추적결과 및 환전내역, (돈 전달 때 쓰인) 여행용 가방 구입영수증, 경리부장 정 아무개가 작성해 검찰에 보낸 이메일, 한만호 핸드폰 통화 내역, 한만호의 구치소 접견 시 녹음 CD 분석 등등의 증거가 범죄 사실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이 증거들의 신빙성을 강변하던 검찰이 이날 비장의 무기로 처음 내놓은 것이 자금 사용처다. 한 총리가 현금 4억 8천만 원, 미화 32만 7천5백 달러, 1억짜리 수표를 받았는데, 수표와 반환한 2억 원을 빼고 나머지 2억 8천만 원이, 계좌추적 결과 나온 한 총리와 남편, 여동생의 저금액, 사무실 보증금 등의 총액과 같다는 것이다. 달러에 대해서는 아들 유학자금으로 7만 달러가 들어갔고 동생이 1만 2천7백여 달러를 사용했는데 나머지는 한 총리의 해외 여행 시 환전기록이 없기 때문에 한 총리가 쓴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검찰의 추정에 따르면, 한 총리가 국회의원이나 총리를 지내면서 받았을 월급과 남편의 수입들은 어디론가 다 사라졌고, 한 총리는 정치자금을 받아 놓고도 다 저축했으며, 정작 대선후보 경선 기탁금 등 정치자금은 집을 담보로 은행빚을 얻어 쓴 셈이 되는 것이다. 또 검찰로부터 언니의 정치자금관리인으로 지목된 동생은, 자신의 수입은 한 푼도 없이 오직 9천여만 원의 어마어마한 대통령 후보경선 정치자금을 통장에 집어넣고 관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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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2월 첫 공판 |
자금사용처 못 밝힌 것이 궁금해 한번 맞춰 보긴 했는데…
또 하나, 검찰은 한 사장이 처음부터 9억 원을 줬다고 하는데도 정 아무개 경리부장이 ‘채권회수목록’에 5억 원이라고 적어 놓고, 그걸 근거로 자신은 한 총리에게 5억 원이 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을 잊지 않았다. 검찰에 따르면, 정 아무개는 총괄장부와 B장부를 토대로 ‘목록’을 작성한 뒤, 그 두 개의 1차 장부를 잃어버렸던 것인데 후에 자신의 차 트렁크에서 B장부를 찾아, 4억 원이 옮겨 적을 때 누락된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희한한 것은 지난달 23일 21차 공판에 나와 증언했던 남 아무개 증인이, 당시 자신의 사무실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데 영 못 찾겠다던 총괄장부를 드디어 찾아내 검찰증거로 제출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필요하기만 하면 잃어버린 증거를 순식간에 찾아내고, 전과자는 물론 재소자까지 100% 신빙성 있는 증인으로 둔갑시키는 검찰을 신의 손이라 불러야 하나, 마이다스의 손을 가졌다고 칭찬해야 하나.
구형이 끝나고, 느닷없이 기자들 배고픈 것까지 챙기는 검사의 배려 덕분에, 저녁 먹고 시작한 변호인단의 최후변론이 볼만했다. 한 총리 전 비서 김아무개 씨의 권영빈 변호인은, 피고인이 한 사장으로부터 돈을 받았고 법인카드를 받아 사용하는 등의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한 총리와는 아무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 사업파트너였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음을 강조했다. 특히 피고인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피소됐으나, 한 사장으로부터 받은 돈이나 카드를 (한 총리의 대선 경선운동 등) 정치활동을 위해 쓴 사실이 일체 없음을 조목조목 밝혀 그에 대한 정치자금법 위반혐의를 원천적으로 부인했다.
이어 백승헌 변호사가 대표로 진행한 한명숙 총리에 대한 최후변론에서 변호인단은, 수사가 시작된 시점(1차 사건 무죄선고 직전)이나 초기 수사속도로 볼 때 이 사건에 정치적 표적수사의 의혹이 있음을 우선 지적했다. 또한 한만호의 초기 부인조서가 없고, 그로부터 마지막 조서를 받은 후에도 검찰은 그를 계속 소환해 총 73회에 걸쳐 조서를 외우게 하고 사건을 ‘굳히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변호인단은 이 밖에도, 검찰이 아직 아무 조사가 없는 상태에서 한 사장으로 하여금 이 사건 첫 제보자로 알려져 있는 남 아무개를 만나게 한 점, 증인들에 대해 강압수사를 벌이고 비정상적으로 대우했다는 점, 범행일시를 특정하지 못하는 등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즉 처음부터 짜 맞추기 수사 아니었나는 날카로운 추궁이었던 것이다.
검찰의 짜맞추기 수사를 입증하는 많고 많은 증거와 논리들
계속해서 변호인단은, 검사가 주로 인용하는 한 사장과 모친 간 접견대화 내용이 얼마나 부실한 것이며, 검찰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채권회수목록’이 얼마나 믿지 못할 증거이며, 한 총리와 한 사장 사이에 정치자금이 오갈 만한 ‘사업상 대가성’이 존재할 수 없음을 논증했다.
무엇보다도 한만호 사장의 진술번복에 대한 검찰과 변호인단의 확연한 입장 차이가 두드러졌다. 검찰은 한 사장의 검찰진술이 진실이며 설사 진술이 엇갈려도 재판부가 유죄를 인정한 판례를 제시했다. 반면 변호인단은, 한만호 사장이 검찰에서 허위진술할 복합적 동기가 있었음을 밝히고, 그의 법정 양심선언은 고사하고라도 검찰에서 한 진술까지 일관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었으며 객관적 타당성을 결여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날 변호인 최후변론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것이 판결에 얼마만큼 영향을 주는 요소인가와는 별도로, 한 총리의 범행장소 부재증명(알리바이)이었다.
이번 사건에서 검찰의 가장 큰 약점 중의 하나가, 한 사장이 한 총리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구체적 날짜와 시간을 특정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검찰에 비협조적인 증인들에게는 수년 전의 사소한 일까지 시간대별로 모조리 기억해 내라고 닦달하는 검찰이, 정작 한 사장에게서는, 3억이나 되는 거액을 전달한 날짜를, 3차례 모두 기록도 없고, 기억도 없는 상태로 공소장을 꾸민 것이다.
만일 어느 날짜를 정해 놓았다가 그날 한 총리의 알리바이가 성립되면 낭패를 볼까 봐 일부러 4월 초, 5월 초, 9월 초로 느슨하게 잡아 놓았다는 추측이다. 검찰의 주장은 매달 말 일쯤 급히 자금을 조성해서 다음 달 초 열흘 중 날씨가 좋은 어느 평일 오후 4~5시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검찰이 끝까지 이 문제를 손대지 않고 넘어가면 변호인단으로써야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했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역시 드림팀 변호인단이라 할 만했다. 공판 마지막 날 드디어 검찰의 이 허점을 파고들어 선제공격에 나선 것이다.
변호인단의 선제적 알리바이 증명
2007년 4월의 경우 1억짜리 수표를 뺀 나머지 자금은 그 전 달 3월 30일에 조성되었다. 4월 초를 10일까지 잡으면 모두 열하루가 된다. 이중 주말은 3월 31일, 4월 1일, 7일, 8일. 모두 빼면 7일이 남는다. 하지만 여기에서, 수표야말로 정치자금수수에서 최고 금기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검찰과 한 사장도 이것을 고민했다는 것이 한 사장의 검찰조서에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화요일 이후에 돈을 전달했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당연히 수표를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랴부랴 수표까지 끼워 전달해야 할 만큼 다급했다면 4월 2일(월요일)에 전달했다는 이야기다. (이것도 오전에 바꿀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4월 2일 오후에는 한 총리가 국회에서 표결에 참여했다는 것이 증명된다.
9월 전달 건도 마찬가지다. 8월 28일에 자금을 조성했다. 29일, 30일, 31일과 9월 초 열흘 중 주말(1일, 2일, 8일, 9일)을 빼면 아흐레가 남는다. 그런데 한만호 사장이 5일부터 8일까지 외국여행을 갔다. 그 해 9월엔 유난히 비가 많이 와 일산에는 1일부터 6일까지 계속 비가 왔다. 남는(전달이 가능한) 날은 8월의 사흘과 9월 10일이다.
8월 29일 오후 한 총리는 국회 대학생 정치체험단 행사에 참가했다.
30일 오후 5시 YTN 생방송 대담에 출연했다.
31일 제주도당 개편대회 등으로 제주도에 내려가 있었다.
9월 10일 민주신당 청주 합동연설회에 참석했다.
이 대목에서 몇 사람이 박수를 쳤다가 쫓겨나갔다.
최후진술에서 처음 밝힌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 패배의 소회
한 총리가 최후진술을 위해 일어섰다. 아마도 법정에서 그가 하는 마지막 말이 될 것이었다. 재판장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2년 가까이 피고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모멸과 수치를 견뎌내야 했으며 분노로 가득 찬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는 대목을 읽을 때까지 그의 목소리는 다소 갈라진 듯했다.
한 총리는 “이 사건의 본질은 정치적 의도에서 권력과 정치검찰이 합작하여 기획한 보복 표적 수사”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깨끗한 정치인으로 알려진 한명숙에게 부패와 비리의 낙인을 찍음으로써 한명숙이 몸담았던 민주정부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훼손하고 상처와 모욕을 주어 국민과 유리시킴으로서 모든 가능성을 차단시키고 싶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정권이 자신의 서울시장 출마를 막거나 낙선시킬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면서 결과적으로 자신이 0.6% 차이로 패함으로써 검찰의 그런 의도는 성공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재판내용과 관련, 한 총리는 한 사장과 단 두 번 만났을 뿐인, 결코 통화를 자주 하거나 돈을 주고받을 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며, 거액의 정치자금은커녕, 검찰이 집요하게 주장하는 대로 사무실 임대나 자택 인테리어를 할 때 혜택을 받은 것이 전혀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한 총리는 “(아무 관련이 없는 재판에 나와) 관객의 한 사람으로, 알지도 못하고 저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말을 듣기 위해 그 숱한 날을 그냥 멍하니 앉아있기만 해야 했음”을 상기시키면서 “응원을 보내는 국민이 없었다면 몇 번이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까지 토로했다.
한 총리는, 정적 제거를 위해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공여자의 허술한 진술 하나에 의존해 공소권을 남용하여 기소부터 하고 보는 검찰이 언론을 통한 피의사실 공표는 물론 재판이 시작된 이후에도 수사를 계속해 표적이 된 피고인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흠집 내는 것을 서슴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면서, 이 재판 과정을 통해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검찰개혁이 필수적임을 절감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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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4월 |
“법정 밖에서 그간 접었던 꿈을 펼칠 수 있기를…”
한 총리는 “이제 법정 안에 갇힌 자의 삶이 아니라 법정 밖의 세상에서 그간 접었던 꿈을 펼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면서 자신에게는 “뒤틀린 역사를 바로 세우고 더불어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국민들이 행복해지는 모든 '긍정적 변화'에 제 땀과 열정을 녹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꿈이 있기에 이 시련을 단련의 기회로 삼자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 꿈을 향해 다시 힘차게 출발하는 것은 제가 가진 진실이 이 법정에서 입증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고 마무리했다.
무려 원고지 38매에 이르는 장문의 최후진술이었다. 그럼에도 법정에서 그간 쌓아 온 그의 한과 분노, 족쇄가 풀렸을 때 펼치고자 하는 앞으로의 소망을 다 풀어낼 수는 없는 듯했다.
강기석 / 노무현재단 홈페이지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