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 속의 가장 큰 화두는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 실천 불가능한 정의
와, 실천 가능한 치욕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러면, 남한산성이라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주장을 통해 그들의 윤리적 측면을 살
살펴 보도록 한다.
'막스 베버'는 이를 신념(지조)윤리와 책임윤리로 나누고 있다. 신념윤리는 행위 결과의 무
시, 바로 이것이 책임윤리와의 결정적으로 다른 관점이다. 신념윤리는 결과에 대한 책임의
문제는 외면한 채, 의지의 순수성에만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이들은 선과 악 어떤 수단을
동원하든 지나치게 이상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신념윤리가는 오로지 순수한 신념의 불꽃, 예컨대 사회적 질서의 불공정성에 대한 저항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만 책임감을 느낀다. 이 행동들은 모범의 제시라는
가치를 가질 수 있을 뿐이며 또 이러한 가치만을 가져야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김상헌’
은 ‘신념윤리가’ 에 가깝다고 보아야겠다. 그는 어려운 형국에서도 근본을 강조하고 ‘최명길’
의 화친 주장을 반대한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묘당의 말들이 그동안 화친을 배척해온 것은 말이 쏠린 것이 아니옵고 강토를 보전하고 군부를 지키려는 대의를 향해 공론이 아름답게 모인 것이옵니다. 뜻이 뚜렷하고 근본이 굳어야 사세를 살필 수 있을 것이온데 명길이 저토록 조정의 의로운 공론을 업신여기고 종사를 虎口에 던지려 하니 명길이 과연 전하의 신하이옵니까?
- 전하, 이제 화친의 길을 끊고 싸움의 길로 나섰으니 한 사람의 목을 베어 길을 분명히 밝혀주소서.
임금이 말했다.
- 그 한 사람이 누구냐?
- 이조판서 최, 명, 길이옵니다.
성안의 식량이 바닥나가고 추위에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며 보초를 서는 조선 군병들
의 비참함을 보면서도 김상헌은 대의명분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 당시 사회의 이념상 도저
히 공감할 수 없는 말이 아니지만 남한산성의 사면초가 상황에서는 설득력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버티지 못하면 어찌 하겠느냐. 버티면 버티어지는 것이고, 버티지 않으면 버티어지지 못하는 것 아니냐. 김상헌은 그 말을 아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삶을 열어나가는 것이다. 아침이 오고 또 봄이 오듯이 새로운 시간과 더불어 새로워지지 못한다면, 이 성 안에서 세상은 끝날 것이고 끝나는 날까지 고통을 다 바쳐야 할 것이지만, 아침은 오고 봄은 기어이 오는 것이어서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들어왔듯 성 안에서 성 밖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없다 하겠느냐…….
결과를 책임질 수없는 신념윤리는 의도의 순수성으로 인해 도덕적으로 높이 평가받곤 한
다. 일체의 악의 수단을 거부할 용기가 있는 사람, 일체의 세속적 가치를 거부하고 초월적
삶을 살 자신이 있는 사람, 무조건적인 복음의 율법에 순종할 자세가 돼 있는 사람은 오로
지 신념윤리에 입각해서 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순수한 의지에서 나온 행위의 결과가 나
쁠 경우 그 책임은 행위자가 아니라 그 외부에-타인의 어리석음이나 이러한 인간을 창조한
신의 의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김상헌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반대의 입장에 있는 ‘최명길’을 살펴보자. 그는 책임윤리가라고 생각된다. '책임 윤리가'는
이 세상을 악마가 지배한다는 사실을 용인한다. 그리고 그는 세상의 비합리성을 있는 그대
로 받아들인다. 즉 '선에서는 선만이, 악에서는 악만이 나온다' 는 순수파 신념 윤리가의 명
제가 현실 속의 인간행위에 있어 결코 진실이 아니며, 종종 그 역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결
코 외면하지 않는다. 인간행위의 최종결과가 가끔씩, 아니 필연적으로 당초의 의도와는 상
당한 차이가 있고, 때로는 정반대가 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모든 역사가 이를 증명
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친을 형식으로 내세우면서도 적이 성을 서둘러 취하지 않음은 성을 말려서 뿌리 뽑으려는 뜻이온데 앉아서 말라죽을 날을 기다릴 수는 없사옵니다. 안이 피폐하면 내실을 도모할 수 없고 내실이 없으면 어찌 나아가 싸울 수 있겠사옵니까? 싸울 자리에서 싸우고 지킬 자리에서 지키고 물러설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이 사리일 진대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이겠습니까. 더구나……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책임윤리는 행위결과에 대한 책임문제를 중시한다. 따라서 이들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목적을 설정하여 그 목적의 실현에 합리적인 수단을 동원한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그 수단
에서는 강제와 같은 악의수단도 사용하며, 사자나 여우와 같은 야수적 방식도 활용한다. 그
러나 책임의식이 있는 관계로 그러한 수단과 방식의 활용에는 매우 신중하다. 최명길은 정
묘호란과 병자호란 두 난을 겪으면서 이조판서로 홀로 청과의 강화를 주장하여 조정에서 극
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의 판단으로는 그러한 판단이 조선의 피해를 줄이고 역적이라는 말
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
다.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
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해줄 것이라는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 그리고 전시총사령관인
영의정 ‘김 류’ 의 내심을 숨긴 행동들,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 의 ‘수성守城이
곧 출성出城’이라는 기상은 소설 '남한산성' 을 한층 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마침내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로 향한다. 그리고 칸 앞에서 항복한다. 칸이 주는
술잔을 받고 이를 마시기 전에 한 번 절을 하고, 세 번 머리를 땅에 내려박는다. 그러기를
세 번, 3배(拜) 9고두(叩頭). 참으로 참담하고, 비통한 장면이다. 이는 화친과 결전의 선택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최명길의 의견이 반영되었고 치욕적인 역사를 남기며 조선은 살아남는다. 그럼 이것
이 과연 바른 선택이었는가? 그것은 아무도 간결하게 대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치들이 혼재하는 가치 다신주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치 다
신주의를 반영하는 책임윤리를 강조하면서도 우리는 신념윤리, 절대윤리를 다른 한편으로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상대적 정의만 있으면 정의롭지 못한 것들이 판치는 세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 질 때 현실성 있는 판
단이 이루어지리라 생각된다. 김상헌과 최명길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어느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작가 ‘김훈’은 이야기한다.
“저는 인조가 결국 거대한 치욕을 스스로 감당함으로써 그 시대를 살려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참 말하기 어려운 것인데,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인조 임금이 선택한 길은 어쩔 수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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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도 김훈의 말에 100% 공감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8. 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