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수많은 결이 있듯이 인간에게 변치 않는 절대 자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풍을 보며 우리 마음도 물들고 바람 한 올에도 우리들 마음 갈대처럼 흔들리기도 하지요
마음은 가슴뿐만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 끝까지 퍼져있기에 내 마음 속 어떤 자아가 어떤 상황에 접하느냐에 따라
마음의 표상은 달라집니다.
결국 인간의 행위란 다층적 자아와 상황이 결합하면서 수많은 벡터를 만들어 내는 함수라고 볼 수 있겠지요.
불교적으로 이야기 하면 모든 것은 인연의 마주침이라고 할까요...
따라서 마음이란 새로운 정서의 배치에 의해서 가변되어 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진정한 자비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연한 사건에 의한 새로운 코드에의 접속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찍이 언어학자 비트겐쉬타인도 초기에 언어의 지시성에 주목하다가 후기에는 언어의 화용성을 강조했습니다.
즉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쓰이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지요.
김기덕 영화 ‘피에타’는 ‘복수’가 어떻게 ‘자비’로 바뀔 수 있는 지,
‘업보’를 어떻게 ‘정화’할 수 있는 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김기덕 감독은 ‘피에타’를 돈 때문에 파괴되어지는 극단적 자본주의에 관한 영화라고 소개했지만
정작 우리들의 관심은 고리대금업자를 대신해서 돈을 갈취해 가는 강도(이정진)의 비정한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습니다.
원금의 10배가 되는 이자를 갚지 못한 채무자에게 자해를 하게 해서 보험금을 타내는
무자비한 강도는 일방향의 비대칭적 폭력행위만 있을 뿐 상대와 소통하는 관계 맺기는 부재합니다.
그에게 있어 성욕의 해소도 자위를 통해서 이루어지지요.
그런 강도에게 어느 날 자신이 엄마라고 주장하는 여인 미선(조민수)이 나타납니다.
미선은 무릎을 꿇고, 태어나자마자 너를 버리고 이제 찾와 와서 미안하다며 용서를 빕니다.
하지만 강도는 그런 미선을 향해 미친년이라며 욕설을 퍼 붓고 따귀를 때리며 외면합니다.
미선은 ‘엄마 되기’를 위하여 무슨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설거지도 해 주고 집안 청소도 해 주고 식사도 차려주는 등 강도가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모성애를 보여주며
조금씩 강도에게 다가섭니다.
인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 보이던 강도도 미선의 헌신적 모습에 조금씩 흔들리며 미선에게
당신이 진짜 엄마 맞냐며 자신의 허벅지 살을 칼로 도려내 먹어 보라고 합니다.
강도는 혼란스러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극단의 선택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고통스럽게 미선은 강도의 살을 먹고 심지어 강간하려 하는 강도를 밀어내다 결국은 강도의 몽정을 보며
자위까지 해 주는 모습을 거치며 강도에게 미선은 엄마로 인정받게 됩니다.
개연성의 잣대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되는 이러한 통과의례는 아마도 세속의 윤리와 통념을 넘어서는
절대적 모성애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일 수 있습니다.
혹은 극단의 상황에서 갈등하고 변이되는 마음의 표상을 미리 복선처럼 깔아 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어차피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몫은 저마다 자신의 것일터이니 괄호 넣기를 해 두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자, 이제 영화 피에타는 심리의 이중주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영화의 반전을 직접 느끼기 원하시는 분은 더 이상 제 글을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강도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잃은 미선이 그를 복수하기 위해 나타타 그의 엄마되기를 시도한 것입니다.
소통부재의 삶을 살아왔던 비정한 강도도 가족이라는 울타리안으로 편입되면서 야생의 눈빛이
순화되는 등 차츰 변하기 시작하는데....그래서 복수의 서곡은 시작됩니다.
한편 복수를 위해 설정해 놓은 자신의 각본속에서 미선은 가짜 엄마라는 새로운 페르조나를 쓰게 되었지만
강도와 역할극 게임에서 진짜 엄마로 착각하는 변주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배치속에서 ‘의도된 복수’는 ‘의도되지 않은 자비’로 변주되어집니다.
자본주의에서 조작된 광고에 의해 없던 욕망이 새롭게 만들어 지는 것처럼 강도에게 있어서
가족 욕망은 미선의 조작된 각본속에서 새롭게 형성되어집니다.
광고의 욕망 생성 메카니즘이 결핍을 통해서 이루어지듯이 강도의 어머니를 향한 욕망의 절정은
엄마의 부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부재의 현전!
피해자들의 고통을 순례하며 그 처절함을 바라보게 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빈껍데기로 미쳐서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 복수의 각본이었지만,
강도는 순례의 과정속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그 위치에 다가가면서’ 눈물을 소리없이 흘리게 됩니다.
눈물은 공감의 시작!
눈물을 통해 영화의 반전은 이미 예고된 셈이지요.
영화 ‘피에타’의 압권은 영화 후반부 미선의 죽음씬입니다.
비극적으로 엄마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강도가 미선이 자신의 진짜 아들을 위해
만든 스웨터를 입고 죽은 엄마를 가운데 둔 채 자살한 상구와 나란히 눕는 장면이부감(하이 앵글)으로 펼쳐집니다.
김기덕 영화 스타일대로 오열도 없고 대사도 없이 그저 낮고 조용한 피아노 선율만이 깔릴 분입니다
강도에게 생물학적인 진짜 엄마의 의미는 애초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고,
관계를 통해 공감할 수 있었던 미선만이 ‘진짜 엄마’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순례와 죽음의 묵도를 통해 강도는 자신의 업보를 정화하기 위해 처참한 죽음으로 속죄합니다.
예수의 이미지가 겹쳐집니다...
속죄 의식이 영화의 라스트 신입니다.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끔찍한 속죄 장면은 롱 테이크로 길게 비쳐지는데...
비장한 음악으로 하여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간청은 저토록 목숨을 다하는 치열함 속에서 가능한 것일까 하는 물음을 던져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