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교과서 첫 페이지에 있던 ‘국민 교육 헌장’을 줄줄 외웠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그 어린 나이에 이 세상의 아름답고 멋진 말은 죄다 이 헌장속에 있다고 거룩하게 감동하며 암송하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국가주의 교육관에 약간의 삐딱한 시선을 보낼 즈음에는 국민 교육 헌장도 새롭게 평가하게 되었다.
‘국가가 국민을 교육까지 시켜야 하나...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제시하면 되지... 그걸 강제로 주입해서는 안되는 거잖아..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뭐지?’
뭐 대충 이런 식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영화 ‘남쪽으로 튀어’를 보는데 주인공은 이 땅의 국민이기를 포기까지 할 작정을 하고
남쪽 섬마을에 가서 자신의 이상향을 만들려고 한다.
국민 연금과 세금과 학교 교육과 집단적 애국주의를 거부하는 것을 보면 주인공은 아나키스트가 분명하다.
철학자 홉스는 ‘리바이던’이라는 책에서 자연상태의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로 갈 수밖에 없어
평화와 안전을 위해 자신의 자연권을 국가에게 양도해야 하는 사회 계약설을 이야기 한다.
국가는 국민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아가게 해주기 위해 법과 제도 그리고 공권력도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은 그 모든 것을 자본가와 정치배의 이익을 위한 것 뿐이라며 거부하고 투쟁한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우생순’을 통해 우리들에게 감동을 담뿍 안겨 주었던 감독 임순례씨가 만든
‘남쪽으로 튀어’는 반 자본주의적 삶의 희구라는 다소 불온한 욕망(?)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무거운 주제를 코믹한 터치로 연방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따뜻한 휴머니즘의 캐릭터로 잔잔한 감동까지 선사하지만
이 우화가 얼마큼 관객들의 삶에 파문을 일렁이게 할지는 미지수다.
나는 지나친 국가주의도 거부하지만, 마찬가지로 지나친 반 국가주의도 경계한다.
예컨대, 월드컵을 보면서 함께 흥분하면서 국민 축제적 카니발에 빠지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고,
세금을 내는 것은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당연한 일이고,
제도 교육으로서 공교육은 거부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남쪽’만이 대안이 아니고 ‘북쪽’이든 어느 쪽이든 튈 수 있어야 하고
그 곳에서 그 곳의 사람과 접속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공간적 이동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아님은 당근이고,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접속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노마드의 이동은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접속의 개념이다.
개인적으로 영화 ‘남쪽으로 튀어’는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고 캐릭터도 살아있는 괜찮은 영화라고 평가하고
별 다섯 만점이라면 나는 4개 반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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