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창학 ' 선생님을 뵙고
1 월 23 일, 날씨는 맑았으나, 양 손으로 녹인 귀가 금방 또 시려울 정도로 아주 추웠고,
'설' 연휴기간이라 많은 인원이 참석하지는 못했다.
평촌 우리집에서 약속시간 1 시간 10 분전에 출발했으나, 10 분 늦게 도착했다. 오후 4 시
10 분이었다. 연신내(3호선) 역에 내리자 언제 봐도 친근한 느낌의 문봉이 그리고 늘 자신감
에 넘치는 래순이 또 얼굴 마담 원기, 마지막으로 언제봐도 신사, 이근덕이 나를 반갑게 맞
아 주었다. 나는 사실, 3 학년 때 4 반 이 아니라 2 반이었으므로 어쩌면 낄 자리가 아닐 수
도 있었으나, 졸업한 지 25 년이 지난 지금 그것을 따져 무엇하랴 ! 더구나 나는 사천(삼천
포)에서 이 나라의 산업 역군으로 땀흘리는 이맹수의 전권 대리 대사(?)의 임무도 띠고 있
었다.
역을 빠져나온 5 人은 근처 과일 가게에서 사과 1 박스를 사고 이정표인 '하얀 풍차'를 찾
았으나 한 10 여분을 찾아도 그곳이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선생님 댁에 전화를 넣어
길 안내를 받는 수밖에. 참 어이가 없는 게 '하얀 풍차'라는 가게는 우리가 사과를 산 과일
가게 바로 옆집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적요하다 하겠다. 우리는 바로 옆 골목으로
들어서서 선생님 댁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4 년 전에 작고하신 우리 아버지도 교사셨다.
뇌출혈로 55 세에 교단을 떠나시기까지 30 년을 교사로 사셨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 댁의
분위기를 나름대로 상상할 수 있었다. 거실로 들어서기 전에 선생님께서 우리를 반가운 미
소로 맞으셨다. 정말로 학교 다닐 때 뵈었던 것보다 얼굴이 하얗게 되신 것 같았다. 우리가
여쭙자
- 그 때보다 술을 적게 마셔서 간이 좋아졌기 때문일거야.
우리는 선생님께 설날 세배를 올렸다.
선생님 댁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분위기가 수수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정말 평
범한 우리네 중산층의 모습 그대로였다. 선생님의 성격을 추측해 보았을 때 이재(理財)와는
거리를 두고 살아온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 정면을 장식하고 있는 책들, 인상깊
은 것은 '허어먼 멜빌'의 '백경'(모비딕)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 있다는 것이었다. 선생님께
그 이유를 여쭙자,
- 내 석사학위 논문이 '멜빌'의 그 작품이었거든.
학교 다닐 때의 선생님과 전혀 다름이 없으셨다. 약간 수줍어 하시면서도 가끔씩 던지시
는 유머가 우리의 만남을 즐겁게 했다.
사모님께서는 아주 밝은 성격이셨다. 우리가 여쭙자 선생님보다 7 살이나 젊으시단다. 전
통과자와 식혜를 맛있게 먹으면서 우리는 본격적인 대화를 나눴다. 전혀 형식과 가식이 없
는 래순이의 당돌한 질문에 선생님께서는 때로는 다소 당황하시고 때로는 유머로 넘기시며,
선생님의 젊은 시절과, 우리와의 생활, 우리가 모르는 선생님의 또 다른 삶에 대해 차분히
말씀해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국어'를 못하셔서 참 고민이셨다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이
유를 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선생님의 초중기 학창시절은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우
리 민족이 신음하던 때이고 그 때의 국어란 일본어였으며, 우리말을 배울 기회가 별로 많지
않으셨기에 해방되고도 우리말 즉, 진짜국어 공부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이었다. 새삼 우리말의 현재 위치에, 그리고 여기까지 오도록 연구하신 학자분들께 감사
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처음에는 공무원 생활을 하셨고, 헤럴드 신문기자, 그 후 무역회사 회사원
생활 때는 돈좀 모으셨으나, 당신의 적성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다시 교직으로 전직, 나중에
우리 학교, 이어서 대학에서 시간 강사를 하셨단다. 그런데 수당이 그 당시 돈으로 2500 원,
도저히 가정을 꾸릴 수 없어, 다시 명지 여고로 부임, 거기서 64 세에 명예퇴직을 하셨는데
옆에서 묵묵히 말씀을 들으시던 사모님께서 연세가 상당히 있었는데도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으셨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그 말씀을 들으시고,
- 그 때는 그래도 지금보다 젊었었잖아. 그리고 내가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나의 천직은
교사라는 느낌이야,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마다 하느님이 할 일을 정해 주시는 것 같아. 그래
서 억지로 다른 일을 하려고 하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지.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며 하는 자
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원기가 '역삼대첩'( 4 반과 11 반의 겹 반창회)에 대해 다소 장황히 이야기하자, 선생님께서
는 각반 30 명의 학생이 모였었다는 말씀에 대단히 감격해 하시며, 금년 5 월 예정의 강화
도 산행에 참석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사모님께서 계란 삶은 것이 들어간 경상도식 떢볶기를 내오셨다. 근덕이가 가져온 꼬냑이
있었으나, 선생님과 우리의 합의를 통해 선생님 댁에 보관 중인 '씨바스 리갈'을 마시기로
했다. 술이 한 순 배 돌자 우리의 질문과 선생님의 재밌는 말씀이 이어졌다. 우리의 대화 도
중에 '이맹수'의 안부전화가 있었다. 멀리 사천에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가슴가득히 전해왔다. 나는 모르는, 4 반 학생들과의 몇 년 전 추억, 한일관에서의 국제 한
일 교류 바둑전 추억을 말씀하셨다. 그때 학생들에게 이놈, 저놈 하셨던 것이 마음에 걸리신
다나? 아무리 제자라도 나이 40 이 넘은 성인들한테. 우리들은,
- 선생님, 나이 60 이 넘어도 제자는 제잡니다. 이 놈, 저 놈은 애칭이며 제자 사랑의 표현이
아닌가요? 하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이 초등학생 때 2 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선친께서는 징용에 끌려가시고, 중 3 때
6.25 가 터지고.... 선친을 따라 산악생활을 많이 하셔서 사실 산에 관한한 공포심이 먼저 앞
서며, 몇 년 전에 당하신 교통사고로 왼쪽 발목 위에 철심을 박으셔서 보행은 지장이 없긴
하지만 무리한 산행은 곤란하다는 말씀도 하셨다.
대부분의 그 시대 어른들이 그러하듯이 선생님께서도 학비가 없으셔서 대학 재학 중 군대
에 가셨단다. 해군을 제대하셨단다. 만 3 년을 꼬박 채우고 제대하시고.
씨바스 리갈과 이어지는 우리의 이야기는 깊어갔지만, 어쩌랴, 헤어짐은 반드시 있고 조금
아쉬울 때가 좋은 때라는 것을 알기에 선생님께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더
추웠고 어둠은 아주 깊었다.
고희(古稀)를 넘기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정정하신 선생님의
모습을 뵙고 너무나 기뻤다. '이맹수'의 말대로 우리가 70 세가 되도록 선생님께서 건강하셨
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편으로 내가 70 이 되어 교직에서 은퇴하고 집에 있을 때, '
나에게 와서 세배를 하는 제자들이 있을까? ' 하는 생각을 해봤다. 우선 내가 건강하게 오
래 살아야 할 것이고, 또 나의 제자들의 존경이 있어야 가능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창
학 선생님은 축복 받은 인생을 살고 계시며, 선생님을 뵌 나도 행운아라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맺는다.
선생님,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제자들의 살아가는 모습 보시고, 우리들의 선생님 사랑 듬뿍
받으세요 !!!
2004. 1. 24.
※ '허 광' 디지털 카메라를 준비하지 못해 사진은 못 찍었다. 5 월에 선생님과 함께 할 사진 올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