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 도입, 더 깊고 넓은 논의가 필요하다
(서프라이즈 / 가을들녘 / 2011-02-18)
2월 국회에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가 논의되고 의결될 것이라고 한다. 먼저, 환영한다. 더 이상 싸우는 국회는 있어서는 안된다. 과반수 넘는 다수당이 소수당의 강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강행처리/날치기 하는 저급한 국회운영은 종결되어야 하고, 토론마저 생략하고 의장이 제 멋대로 직권상정하는 일은 더는 없어야 한다. 필리버스터 도입과 직권상정 사실상 폐지라는 민주당의 제안(박상천 법안)에 두 팔 벌려 환영한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그 내용에 공감한다고 해서 '언제나' 동의할 수는 없다. 정략적이라는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2월 국회가 시작되기 전 꼭 언급해야겠다. 현재 민주당은 필리버스터의 강제종결선으로 국회의석 2/3를 말하고 있다. 즉, 200석이 넘는 교섭단체의 요구가 있으면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료하고 즉시 표결에 부쳐야 한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100석만 넘는 교섭단체의 반대가 지속되는한 그 어떤 쟁점법안도 통과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더 쉽게 말하면, 내년 19대 총선에서 만약 딴나라당이 100석만 넘는 의석을 차지하면 '진보개혁 의회연합'이 과반수를 넘는다 할지라도 딴나라당의 동의없이는 그 어떤 의결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정말 좋은가? 이 이야기는 잠깐 뒤에 하고, '사회적 갈등'의 해결과 표결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더 해보자.
사회적 갈등은 언제나 차고 넘친다. 사회는 복잡해져가고, 결정해야할 안건은 극한 이념적/지역적 대립속에서 표류한다. 갈등의 가장 좋은 해결 방안은 물론 대화와 타협이다. 양보를 통한 합의보다 더 좋은 해결 방안은 없다. 그러나,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사안들도 언제나 존재한다. 사람은 쥐새끼와 어울려 살 수 없고, 대통령병에 취한 친박과 개헌병에 걸린 친이는 헌법개정에서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국보법 폐지 역시 우리에겐 숙명이고 과제이지만 딴나라당에겐 모든 것을 걸고 막아야할 대상이다. 미디어법이 그랬고, 4대강 수십조 예산이 투하된 지난번 예산안이 그랬다. 국가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서울시에서는 '공정급식'을 놓고 서울시청과 서울시의회의 대립이 격화되어가고 있고, 영남권에서는 신공항의 입지를 놓고 부산과 다른 영남이 극한 대치를 계속하고 있다. 갈등은 관리되어야 하고 해소되어야 한다. 어떻게?
수많은 사안에 대하여, 그에 대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고한 결론을 내려줄수 있는 대통령이라는 존재가 사라졌으며, 이제 이를 대체하기 위한 사회의 새로운 의사결정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에 없던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지금 대한민국이 받고 있는 도전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도전에 직면하여 대한민국이 찾아낸 임시변통의 해법들 또는 드러낸 현상과 패턴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야당이 물리력으로 의사진행막기 - 여당의 직권상정과 다수결 밀어붙이기 - 정치의 사법화
권위주의 모델을 대체할 새로운 의사결정 방식이 요청된다는 구조적인 조건과 대결적 정치 전통, 숫자의 정치, 힘의 정치, 합의 능력 부재과 같은 정치의 후진성이 결합하여 국회의 마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이러한 임무를 전혀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이를 대신하여 정치적 해결과정에 법률가들이 투입되고 있는 것으로 나는 현재 한국의 정치를 요약한다. 오로지 법률의 해석가들만이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가에 의존하는 의사결정은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진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기에, 사회의 모든 갈등은 쌓여만 간다. 대한민국은 현재 닥쳐오는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해 나갈 능력을 거의 갖추고 있지 않다. (출처: "갈등을 관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사회를 찾아서" 중에서, @pythagoras0, 피타고라스의 창, 2009-7-2) |
존경하는 '유학생수학도'님의 이야기처럼, 우리 국회에서는 핵심 쟁점 법안에 대해 야당의 물리적 저지와 여당의 강행처리, 그리고 결국 그렇게 처리된 법안마다 헌법재판소로 가져가는 일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매번 여당은 '민주주의는 과반수다'라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소수정파의 극력저항을 비웃고, 야당은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의회 폭거'를 들먹이며 자신들의 무능력을 변호하는 것이 전부가 되었다. 갈등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증폭되어 더 큰 눈덩이로 불어나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까?
양 측의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릴 때 표결 이상의 결정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표결을 하지 않는 것은 때로 더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지만, 갈등의 해소라는 측면에서 보면 절대로 더 나은 선택이 될 수는 없다. 표결에서 과반수보다 더 좋은 대안은 없다. 그러나 집단의 결정은 언제나 잘못될 수 있고, 이러한 '되돌릴 수 없는 심각한 오류'의 방지를 위해 표결제도에서는 과반수보다 강력한 의결선을 마련해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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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법 날치기는 의회 민주주의와 과반수제도의 조종이었다. (출처보기) |
가장 강력한 것은 '만장일치제도'이다. 계모임의 계주를 바꾸려면 만장일치의 동의가 필요한 것 아닌가? 그보다 조금 낮은 것은 대부분의 선진국 의회가 채택하고 있는 주요의결사항에 대한 2/3선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헌법개정과 대통령 탄핵과 같이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서는 국민 대표들 2/3의 동의를 반드시 요구하고 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역시 2/3를 그 결정선으로 해서 더 엄격한 다수동의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필리버스터와 관련해서 볼 숫자는 60%의 동의다. 미국 상원의 경우 필리버스터 제도가 있지만 총 재적인원 100명의 60%인 60명의 요구가 있으면 즉시 필리버스터를 종결하고 투표절차에 들어가게끔 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낮은 수준이 바로 과반수 제도다.
우리 국회는 딴나라당이 18대 국회에서 '될 때까지 재투표, 얼렁뚱땅 직권상정, 걸핏하면 날치기'등 난장판으로 만들기전까지 매우 높은 수준의 '합의제 민주주의'에 의해 운영되어 왔다. 지난 17대 국회에서 사학법 강행처리에 반발해서 박근혜와 이명박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가 국회를 몇개월이나 공전시키는 동안 열린우리당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우리 국회의 합의제 전통 때문이고, 지난 12월 딴나라당이 예산안 및 일부 법안 날치기 이후 민주당이 장외투쟁에 돌입하면서 국회법이 규정하고 있는 이번 2월 국회가 18일이나 늦게 열리는 이유 또한 합의제의 전통 때문이다. (우리 국회는 교섭단체간에 의사일정 합의가 없으면 국회개원 자체를 극도로 자제해오고 있다. 물론, 이것도 딴나라당이 18대에서 무수히 '단독개원' 협박을 거듭하고 협의 후 개원을 한 후에도 자기들 맘대로 국회를 운영하며 다 망가뜨려가고 있는 중이지만 말이다.)
노회찬: 이제까지 지도부들은 보면 민주노동당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민주당과 힘을 합쳐서 과반수 넘는 의석으로 무엇을 관철시키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지를 않고, 민주당이 무슨 생각을 하던, 민주노동당이 뭐라고 하든 관계없이 한나라당하고 타협하는데만 급급했습니다. 한나라당과의 만장일치제로, 합의제로 국회를 운영해왔습니다. 과거사법도 마찬가지예요. 그것에 대해 민주노동당이 어떻게 생각을 하고, 바깥에 있는 시민사회가 무슨 요구를 하든 한나라당과 타협되면 그걸로 통과시키는 거죠. 가장 편한 길을 이제까지 걸어 왔고, 그래서 개혁의 후퇴, 실종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던 겁니다. 유시민 의원의 말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겠다는거거든요. 그런 점에서 오히려 저희가 당혹스럽고, 실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출처: "노회찬 의원 인터뷰" 중에서, 지승호, 인물과 사상 2005년 6월호) |
사실, 위 노회찬 의원의 이야기처럼 열린우리당은 17대 국회에서 거의 모든 안건에 대해 한나라당과 우선적으로 협의를 했다. 이것이 당시 구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의 반감을 산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고 애석한 면도 있다.(잘했다는 소리가 아니라 다른 당의 동의를 먼저 구한다 한들 딴나라당 동의없이는 의사일정 자체를 진행할 수 없었음을 변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회 의석의 40~50%를 점유하고 있는 딴나라당의 최소한의 동의조차 없는 법안을 열린우리당 자력 혹은 소수 다른 야당의 동의만으로 처리하는 것은 우리 국회의 합의제 전통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열린우리당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한나라당도 무려 국회의석 2/3에 가까운 의석수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어법 처리 논란 당시 민주당의 조금은 거친 지연작전을 다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독자적으로 국회를 열어서 처리할 충분한 동력이 됨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국회에 들어올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법보다 더 강한게 관례이듯, 이런 합의제 국회운영의 전통은 국회법에 명시되어 있는 문구를 넘어설 정도로 막강하다. 즉, 우리 국회는 최소한 국회의석의 80~90%를 점하는 거대 교섭단체들의 합의 없이는 사회적 약속에 대한 변경이나 제정에 극도로 제한적으로 움직여왔고, 이런 전통이 깨질때마다 야당은 국회 밖으로 뛰쳐나가고 사회적 갈등은 극도로 고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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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상원의 지난 40 여년간 법안 통과 지연 전술 사용 빈도 (꾸준히 상승하는 이유는, 그만큼 갈등의 폭과 깊이가 커지고 있기 때문.) |
문제는, 이런 전통이 계속적으로 약화되어 가고 있고, 이념적/정당간 대립은 더 첨예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갈등은 깊어지는데 갈등을 해결해야할 정치주체들 간의 대립이 심화되니 대화는 실종되고 타협은 사라지고 결국 표결만 남는 이상한 (겉모양만) 민주주의의 시대를 우리가 지금 관통해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갈등해소의 방안으로 이번 2월 국회에서는 직권상정 사실상 폐지와 필리버스터 도입이 논의되고 있다.
따라서, 직권상정의 사실상 폐지와 필리버스터 도입에 대해 원칙적으로 찬성한다. 현재 우리 정당들과 국민의 수준을 고려했을때, 이것 외에 다른 어떤 갈등 해소의 방법도 마땅치 않기 때문에 필리버스터의 도입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필리버스터를 잘못 도입하면 이 제도가 갈등관리나 해소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 해결의 지연수단으로 전락되고 사회 개혁을 저지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 매우 심각하게 우려할 부분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필리버스터는 거의 모든 안건에 대해 자동상정을 기본으로한다. '박상천 안'에 의하면 재적인원 1/5 즉 60명의 동의만 있으면 법안조정절차가 자동으로 개시되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반대측'에서는 필리버스터를 동원해서 토론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끌고갈 수 있게 된다. 이를 테면 '친환경 공정급식법' 같은 것도 60명만 모으면 딴나라당의 오세훈 같은 이가 결사반대를 하든 말든 일단 상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오세훈이나 전여옥같은 보편적 공정급식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최소 100명만 되면 그들은 본회의장에서 열시간이고 스무시간이고 마이크앞에서 '공정급식 반대해요~ 반대해요~'만 외쳐도 이 토론은 절대 종결될 수 없다. 결국 회기가 마무리될때까지 국회는 하릴없이 모여서 그들의 원맨쇼만 구경하는 게 전부가 될 것이다.(물론, 이런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100석을 넘는 반대측이 '필리버스터' 사용을 공언하면 아예 법안 자체가 상정되도록 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신문과 방송에서 자신들의 주장만 거듭되풀이하며 여론이 상대측을 압박할때까지 논쟁만 거듭할 것이다.)
현재 박상천 법안에서는 이런 '무제한 필리버스터'를 종결시키기 위해서 국회의석 2/3를 요구하고 있다. 즉, 국회의원 200명이 요구하면 필리버스터를 즉시 종결하고 투표절차에 들어갈 수 있다. 괜찮아 보이는가? 무한정 떼쓰기를 종결할 수 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생각이 드는가? 아니다. 이게 아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이 긴 글을 쓰고 있다. 왜? 한나라당은 어떤 경우에도 100석 밑으로 떨어질리가 없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박상천 법안이 그대로 통과된다면 우리가 내년도 총선에서 185석을 갖더라도 딴나라당이 100석만 차지해도 우리는 아무것도 우리들의 의지와 계획대로 국가 변혁의 시동을 걸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에 딴나라당이 필리버스터 사용하면 토론 종결 못 시킨다.
변형대운하 사업을 위한 친수구역특별법 역시 폐지/개정하려고 해도 딴나라당이 조직적으로 반대하면 통과시킬 수가 없다. 우리가 과반수가 훨씬 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명박 비리 특검법 하나도 통과시킬 수 없고, 천안함 청문회와 종편 청문회 역시 특별법의 뒷받침을 받아야 하는데, 딴나라당이 필리버스터 사용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억울하게 대통령을 사망으로 몰고간 검찰 개혁에 모두들 동의한다. 스폰서 검사들이 활개치고 정치검찰에 대한 비판도 높다. 이런 검찰개혁을 위해 검토되고 있는 '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과 검찰의 기소독점 해체 역시 딴나라당이 한가하게 본회의장에서 마이크잡고 일장연설만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비정규직 보호법등 각종 복지법안 전부 딴나라당이 반대하면 통과시킬 재간이 없다. 국회의석 185개를 갖고도 못하고, 199개를 갖고도 못한다.
박근혜의 정수장학회를 비롯해 딴나라당과 기득권층이 국민으로부터 힘으로 강탈해간 재산조차 토해내게 만들 수 없다. |
괜찮은가? 이래도 되는가? 우리가 지금 왜 '복지재원'을 갖고 논쟁을 하고 '공정국가 건설'을 주장하는가? 그것들 내세워서 국민의 마음을 얻고 선거에서 이기고, 궁극적으로 이 쥐새끼들의 나라를 따뜻하고 공정한 말 그대로 '양심적인 노동하는 사람들이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 아닌가? 이 모든 과정에서 '법'의 뒷받침 없이 우리가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제 아무리 부유세를 말하고, 종부세 환원을 말한들, 딴나라당이 동의하지 못하면 그저 말의 성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혹시 딴나라당이 국가백년대계를 위해서 우리들의 주장에 귀기울이고 협조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면,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말하겠다. 그들은 그럴 종자들이 아님을 지난 수십년동안 겪고도 모른다면 바보 멍청이 소리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딴나라당은 그런 정당이다. 홍준표는 참여정부 시절 자기들 집권을 위해서라면 경제가 나빠도 괜찮다는 식의 발언까지 서슴지 않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해댔다. 이런 집단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가정체성이 모호한 집단이 바로 딴나라당이다. 의사결정이 미뤄지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것 따위를 신경쓸 인간들이 아니다. 그런 그들에게 어쩌면 이번 박상천 법안은 무시무시한 몽둥이를 쥐어주는 셈이 될 수도 있다.
안다. 딜레마다. 이것 없이는 강행처리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없고, 도입하자니 두려운거다. 나 스스로도 이 부분때문에 망설였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2/3선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욕 먹을 소리지만, 딴나라당이 강력히 저항하면 국보법 폐지니, 복지확대니, 이명박 청문회에 세우고 법정에 세우는 것 못해도 눈 질끈감고 감내할 수 있다. 국회의원 상당수가 결사반대하는 어떤 법안도 다수파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반대하고, 그래서 필리버스터 도입때문에 천안함의 진실이 영영 황해에서 잠들고, 저 더럽고 타락한 떡값 검사들과 경찰/언론인들의 부당거래를 단죄하지 못해도 다 감내하고 다른 방법으로 목소리를 만들어내고 다른 사회 개혁의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이것도 못한다고 민주당을 향해서 단 한마디 욕도 안할 각오가 되어 있고, 어떻게든 딴나라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법안의 의도와 정신이 훼손될 정도로 양보해서 합의안을 도출해내는 것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모두 감내할 수 있겠는가? 필리버스터 도입에 관한 논의가 진행중이라는 기사들에서 말하지 않는 이 두렵고 찝찝한 미래를 내가 길게 말해온 이유다. 민주당은 국민에게 이와 관련해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나중에 "필리버스터 때문에 우리도 어쩔 수가 없어요!"라고 변명할 때 국민의 분노를 막기 위해서는 지금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진보개혁진영 전체의 동의를 구하고, 가능하기만 하다면 더 나은 방안이 없을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미 상원의 필리버스터 종결선인 60%선을 제안해본다.
가을들녘
PS1. 딴나라당이 100석 밑을 얻고, 우리가(진보개혁연합이) 200석 이상을 얻을 가능성? 없다. 0%다. 간단한 산수만으로도 답이 나온다. 비례대표 20석 더하기 TK 27석 석권하면 47석이다. 여기에 충청/강원/제주에서 최소 수준으로 3석하면 50석된다. 이제 수도권과 PK가 남는다. 수도권의 111석과 PK 41석, 총 152석에서 1/3만 이겨도 100석 넘어간다. 딴당에게 필리버스터 종결선 2/3는 땅짚고 헤엄치기다. 지역주의 괴물이 무너지지 않는 한은 말이다. 참고로 탄핵때도 딴나라당은 121석을(40.5%) 얻었다. 그리고, 현재 진보개혁성향 국회의원들은 무소속까지 탈탈 털어도 100명이 되지 않는다.
PS2. 얼마전 정세균 민주당 전 대표의 책 [정치에너지: 더 진보적이고, 더 민주적이며, 더 서민적으로]를 읽었다. 인상깊은 대목이 몇 군데 있었는데, 늘 "타협의 정치"에 대해 옹호하는 내 입장에서, 정치적 타협에 대해 악다구니 한국 정치의 최전선에서 민주당의 대표로 2년동안 일하며 '한국 역사상 가장 몰상식한 집단'을 상대해야 했던 정세균 전 대표의 '정치적 타협'에 대한 원칙과 고충의 토로는 많은 공감과 함께 회의도 가져다 주었다. 과연 한국 정치에서 '좋은 타협'은 가능한걸까? 본격적으로 '타협의 미학'이라 이름 붙인 이 포스팅을 말하기 전에, 굳이 정세균 전 대표의 책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아랫 구절을 그 책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조직가에게 타협은 핵심적이고 아름다운 단어다. 타협은 언제나 실질적 활동 속에 존재한다. 타협은 거래를 하는 것이다. 거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숨 고르기, 보통의 승리를 의미하며, 타협은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다" By 사울 알린스키(Saul D. Alinsky)의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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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관련한 이야기를 해오면서, 당연히 당파적인 입장에서 야당의 편을 들 수 밖에 없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딴나라당의 이야기가 매우 몰상식하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대화를 할 수 없는 수준의 주장을 마치 당위인양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타협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극한 저항'을 권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작은 소시민들의 바람이 그런 극한 권유로 정치권에 주입이 되는 것은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형대운하사업, 언론장악시도와 같은 문제에서까지 양보하고 타협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정치에서 타협은 알린스키의 말대로 '핵심적'이다. 타협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지 않은가? 타협을 위한 '거래'는 그래서 폄하되어서는 안된다. 먹고 살기 바쁜 5천만 국민이 제 각각 목소리를 내서 만인의 만인을 향한 투쟁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정치라면, 그 현장에서는 언제나 거래와 타협이 존재해야 한다. 그게 나의 일관된 주장이다.
PS3. 최근 미국 정치에서도 거대한 타협이 하나 있었다. 바로 '부시감세안(Bush Tax Cut)'에 관한 오바마와 공화당 지도부 사이의 대타협이었다.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한국도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재정적자가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지만, 미국의 재정적자가 아주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음은 아마 잘 알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은 부시 대통령 시대에 경제회생에 도움이 된다며 모든 소득계층에 대한 감세혜택을 2011년 이후에도 더 연장하되 최상위 소득계층 약 2~3%에 대해서는 더 이상 감세혜택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했고 이런 부자감세 원상복구를 통해서 악화되는 재정적자에 숨통을 틔울 계획이었다. 이건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를 치룰 당시의 매우 핵심적인 주장/공약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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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워싱턴포스트
한국의 기자들과 민주당도 '이명박감세안'이 재정적자에 미치는 악영향을 이렇게 한 눈에 보여줄 능력은 없는 걸까? 의지가 없는 거겠지? |
그런데, 이명박/딴나라당과 마찬가지로 부자감세를 좋아라하는 공화당에서는 이에 동의할 리 없었다. 공화당의 주장은 딴나라당의 주장과 완전히 동일했다. 부시 집권 8년동안 경제를 담당했다가 결국 2008년의 세계경제대란을 자초했던 공화당은 오바마와 민주당을 향해 "경제가 안좋은데, 부유층에게 안내던 세금을 더 내라고 하면 그들의 투자의욕이 꺽이고, 결국 이는 고용저하를 가져올 것이며, 소비 축소로 인해서 결국 경제가 더 나빠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중간선거에서 '부시감세안 (그대로) 유지'를 내걸고 11월 초 중간선거에서 승리하게 된다.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공화당은 배수의 진을 친다. 시간은 공화당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면 공화당이 하원의 다수당이 될 것이었다. 공화당은 '부시감세안'을 다른 법안들과 연계해버린다. 즉, 부시감세안에서 민주당이 만약 '부유층 감세'를 폐지할 경우, 오바마 행정부의 추가적 경기부양책이라든가 러시아와의 START 비준같은 중요한 문제들에 비협조하겠다는 자세를 보인다. 어떻게 되었는지는 보도를 통해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오바마는 결국 공화당과 대타협을 이뤄낸다. 바로 '부유층에 대한 감세'를 포함해서 부시감세안을 그대로 유지하고 대신 실업보험 연장, 상속세율 조정등을 얻어낸다. 당연히 민주당 의원들과 개혁적 자유주의자들은 오바마에 대한 배신감을 여과없이 토로했다. 그리고, 오바마는 TV에 나와 이렇게 이야기한다.
Obama: I recognize that folks on both sides of the political spectrum are unhappy with certain parts of the package, and I understand those concerns. I share some of them. But that's the nature of compromise -- sacrificing something that each of us cares about to move forward on what matters to all of us.
오바마: 양측의 (감세타협 패키지안) 반대론자들이 이 패키지의 몇몇 부분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저 역시 그런 우려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견해를 같이하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타협의 본질이란 것은, 전체를 위하여 각 진영이 특별하게 주장하는 무언가를 희생하는 것, 그것이 타협의 본질입니다. [출처보기][영상 보러가기] |
아까 위에서 알린스키는 '타협은 아름다운 것이며 실질적인 활동속에 존재한다'고 했다. 오바마는 타협의 본질이 희생이라고 했다. 그렇다. 나는 이 주장에 적극 공감한다. 국가라는 것 없어도 얼마든지 잘 살수있는 부자들과 힘있는 자들을 위해서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는 결국 힘 없고 돈 없고 병든 자들을 위해 존재한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아주 큰 돈과 힘이 없는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종종 바로 자신들이 복무해야할 국민을 인질로 삼아 협상의 테이블에서 극한 대치를 서슴지 않는다. '국민을 위해서'라는 허울좋은 명목아래 그들은 실업자에게 쥐여주던 몇 푼 안되는 '실업수당'을 없애겠다고 하고, 갓난아이의 예방접종 비용 몇 푼을 가지고 그 아이의 부모를 골탕 먹인다. 최근 우리 수도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정급식을 둘러싼 논쟁 역시 마찬가지다. 아! 슬픈 대한민국이여..
길고 장황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