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해는 소의 해
특별할 것 없는 새해의 첫 주말, 신문에 실린 커다란 소의 그림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우리 소띠들은(소띠가 아닌 사람들의 넓은 아량을 기대하며) 61년에
태어나서, 73년에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6학년을 보냈고, 85년에는 늙은
대학생이거나 민간인을 꿈꾸는 초록의 바리였었다. 그러다 97년에 잘
알지도 못하는 IMF라는 괴물에게 한방 멋지게 얻어 맞고 이제 다시
소와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 중에 쇠죽이나 제대로 쑤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 역시 제대로 된 촌놈이 아니었던 탓에 소와 관련해서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기 주먹만한 소 눈알을 보면서 순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도 했고, 훌쩍 소등에 올라 탔다가 논바닥으로
패대기쳐지는 경험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나마도 까무룩한 이야기이고
지금은 마트에 갔을 때 마블링이 잘 된 꽃등심을 보면서 군침을 삼키는
정도랄까...
새해, 우리가 만날 소는 도데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 일까!
현재 나는 직장 내에서 부장이란 직급을 갖고, 주식, 펀드, 연금등을
판매하는 영업맨이다. 해가 바뀌었으니 곧 있을 인사에서 어디 지점장으로
나갈 수도 있겠고, 본사의 어느 부서로 들어갈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나의 본업인 영업이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동료가 보낸 신년메시지가 생각난다.
‘소처럼 우직하게 정진하는 조부장의 해가 되기를...’
그러고 보니 소는 참 우직한 동물이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특별히 자신들의
삶을 가꾸거나 꾸미지 않는다. 그저 주인이 하라는 대로 묵묵히 살다가
갈 뿐이다. 오죽하면 죄를 많이 지으면 다음 생에 소로 태어난다는 말까지
있을까...
얄팍함이 중시되는 세상이라지만 소처럼 우직하게 살아봄 직도 할 것 같다.
소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처럼, 우직하게 살면 세상도 좀
너그럽게 다가오지 않을까!
2. ‘시황 전망’ 이라고라?
작년 10월, KOSPI는 892포인트의 연중 저점을 기록했다. 재작년 11월에
2085포인트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1년 만에 얼추 60퍼센트가 하락한
꼴이다. 물론 미국발 서브프라임으로 시작한 세계 경기의 하락이 미증유의
사태를 유발한 것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1년 전, 각 증권사 혹은 경제연구소의 2008년 KOSPI 예상 저점은
1700~1800 포인트였고, 가장 근접했다는 K증권의 예측치라야 1500포인트
안팎이었다. 한해 더 거슬러서 2007년 초로 돌아가 보더라도 어느
증권사나 연구소도 그해 2000포인트 대에 진입할 것을 예견한 곳은
없었다. 하긴 현직 대통령이 취임 후 3000포인트를 자신했던 것도 같은
맥락일 수있겠지만......
구태여 ‘블랙스완’의 예를 빌리지 않더라도 미래가 우리가 예측하는 데로
만만하게 오지 않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KOSPI가 500포인트에 갈
수도 있고, 5000 포인트에 못가라는 법도 없다. 불확실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유연한 사고 체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 知天命의 나이가 내일인데
이제 좀 달라질 때도 된 것 아닌가!
10여년 전의 IMF 때와 비교해서 우리가 인지해야 할 것은 바로 부채
부분의 차이점이다. 기업들이 평균 700퍼센트 대의 부채 비율로 30대 그룹중
절반이 주저 앉아버린 과거에 비해 현재의 기업들은 부채 비율 만큼은 아주
양호한 점수를 받고 있다. 나쁘게 말하면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고 있다는
말도 된다. 반면에 개인들의 부채비율은 천문학 적으로 늘어났다.
돌이켜 보면 IMF를 벗어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신용카드 남발
이었고 부동산 담보 대출이었다. 과소비와 부동산 투기가 우리를 IMF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사실이다. 이제 소비의 주체가
빚쟁이가 되어버린 마당에 누가 자동차를 바꾸고 예금에 가입할 지 궁금하다.
현명하게 극복해 내지 못한다면 정말로 힘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나간 정권을 손가락질 하고, 현 정권을 욕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몫으로 넘겨주고, 다 같이 살지 못하면 다 같이 죽는다는 각오로
사지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다.
연초에 경제신문을 도배하다시피 하는 경제 전망치나 시황 전망 따위를
나는 믿지 않는다.‘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그들의 처세술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말로 미래의 예측이 어렵기 때문이다.
새해 KOSPI 예상치를 보면 높게 보는 회사들이 대략 1500포인트 대를
고점으로 전망했다.
비록 세계 경기의 전망이 암울하다지만, 틀려도 그만인 예상치라면 나는 한
2500포인트 정도로 올해 주식시장을 전망하려고 한다.
3. 어머니와 고스톱
작년에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로 어머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 마침 아내도
직장을 그만두게 되어 결혼 이후 처음으로 고부간에 도타운 정을 쌓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명절이나 제사 때면 오남매인 아버님 형제 가족들이
모여 여자들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남자들은 바둑을 두는 것이 우리
집의 풍경이었다. 일찌기 할아버지께서 바둑을 좋아하셨던 탓에 자식들은
물론 사위들까지 바둑을 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가장 고수셨던 막내 삼촌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뒤 이상하게도 바둑의
인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게다가 모이는 가족의 수가 줄어들게 되면서 자연
스레 함께 어울리는 놀이가 대안이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스톱이었다.
어머니의 고스톱 실력은 집안에 고스톱이 양성화 되면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리 어머니는 본디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 음식을 잘하는 분으로 정평이
나 있으시다. 아는 친구들은 다 기억하고 있지만 학창시절, 집에 친구들이
모여 식사라도 할작시면 거의 유일하게 남는 음식이 간장 정도였다. 특히
돼지김치찌개는 그 백미라 할 만 했는데 나는 한동안 어머니의 돼지김치
찌개를 체인화 시키는 대규모 식당 프랜차이즈를 상상하곤 했다.
각설하고, 나는 이제껏 고스톱 판에서 어머니가 돈을 잃으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고모님, 작은 어머니들이 고개를 내 저으시며 화투판에서
물러서시면 한 세대 아래인 우리들이 ‘뭐 용돈이나 드리지’하는 마음으로
참전하곤 했는데 채 몇 시간을 제대로 못 버티고 빈지갑을 털며 물러서야
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무슨 타짜 수업을 받으신 것도 아니건만 어머니는
그 뒷패라는 것이 불가사의하게 잘 붙었다.
근방의 친구 분들 사이에서도 타짜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모양인데 작년에
우리집으로 오시면서 잠시 공백기를 가지시는 듯 했다.
그러나 불과 한 달도 안되어 한분 두분 근방의 노인 분들과 교류를 가지시는가
싶더니 최근에는 오전 오후로 양대 리그를 뛰시느라 정신이 없으시다.
분명 점에 십원짜리 판이라고 하시는데 저녁에 들어오실 때는 따신 돈으로
떡볶이나 튀김 같은 만만찮은 전리품을 들고 오신다. 수전증도 좀 있으신 것
같고, 어깨도 주무르라고 하시길래 고스톱을 그만하시라고 말리기도 했었지만
요즘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점에 천원짜리 판으로 올리시라고 하고 내가 본격 스폰서로 나서 볼꺼나......’
4. 종합검진 혹은 아홉수...
사는 곳이 제각각인 초딩 친구 넷이 연말마다 망년회를 했다. 시청 근방에서
만나 대여섯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각자의 위치로 복귀하던 모임이었는데,
올해 갑자기 청천벽력을 맞고 말았다.
10년 넘게, 건너 뛴 적도 없고, 그 순서가 바뀐 적도 없는 연례행사였다. 그런데
저녁식사 자리에서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대전에서 올라온 친구가 안하던 이야기를 갑자기 꺼냈다. 종합검진 결과를 받았는데
콜레스테롤 수치 과다와 고지혈은 물론 당뇨, 고혈압 등 모름지기 성인병이라고
하는 것은 빼놓지 않고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일단 금주와 금연 상태라며
소줏잔을 뒤집었다.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이번엔 천안에서 혼자 사는 친구가
비슷한 내용의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결국 다른 둘 마저도 자신들의 검진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어 우리 망년회는 중증 성인병 환자들의 간증 집회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알차게 보낼 일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연말에 한 번씩 하는 종합 검진이 몇 년 사이 제법 부담스러운 놈으로 변해 버렸다.
내 경우 재작년에는 조직 검사도 하고, 재검도 받으라는 등 해서 상당히 겁을
주더니 다행히 작년에는 그 결과가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과도한 콜레스테롤 및
중증 지방간 등 만만찮은 수치들이 나를 부담스럽게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올해 우리 나이로는 마흔 아홉, 다섯 번 째 맞는 아홉수다. 요즘이야 아홉수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마는 우리 부모님 세대까지만 해도 아홉수는
다음에 오는 10년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 액땜을 해야 하는 역경의 한해였다.
이미 다양한 예고편들이 상영되었거니와 올해는 우리 다섯 번째 아홉수들 뿐이
아닌 다른 모든 가장들에게도 그 어느 해 보다 혹독한 한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올 한 해를 무사히 넘겨 다가올 10년이 평안하다면 까짓 거 하면서 덤벼 볼 텐데
그럴 것 같지도 않다.
그냥 모두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한 해이기 만을 빌고 싶다. 더도 덜도 말고 1년 후에
기분 좋게 5학년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