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추석이 어김없이 무감각적으로 다가온다.
금요일 저녁 추석관련 업무를 마무리하고 퇴근 중 이제 연로하신 부모님대신 장손인 내가
제사를 물려받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옛날부터 한번은 꼭 가보아야 할 곳 꼭 한번은 가리라 마음먹었던 그 곳이 생각나면서
저녁 식사 후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밤 11시 심야우등고속을 타고
대구를 향해 강남고속 터미널을 출발하였다.
(마누라가 "이 남자 혹시 부적절한 외박인가" 싶어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날린다)
50년전 대구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3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전학을 와
한번도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항상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었는데 추석겸 제사인수 기념(?)차
back to the future기회를 만든 것이다.
항상 그곳은 꿈 속에서도 가끔 등장하고 내 기억의 가장 아련한 끝자락에 있는
동화같은 공간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새벽 3시 동대구 고속 터미널 도착....눈은 감고 왔는데 생각은 3시간여 내내 깨어 있었다.
택시가 어둠을 뚫고 달린 끝에 내가 걸어서 다녔던 국민학교 정문 앞에 내려 주었다.
어둠이 가시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정문의 위용에 압도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 쇄락하는 것이 있는 반면 커나가는 것도 있는 모양이다.
설마 이것이 아직 남아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을 못했다...
2학년때 마치 목욕탕 같았던 수영장에 들어가 벌벌 떨었던 기억이 난다. 그땐 수영이 뭔지도 몰랐다.
시내에 있어서 그런지 시간이 흘렀지만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옛날 담쟁이 넝쿨 본관은 아쉽게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40년전 기억을 더듬어 초등학생시절 하교했던 길을 찾아 걸어보았다.
그런데 새벽길 아무리 걸어가도 예전에 기억과 일치하는 모습이 없다.
대구상고 정문앞을 지나 경북고등학교 정문을 지나 골목길 속의 집이였는데
두 학교 모두 이전하고 아파트와 상가들이 들어서 있었다.
택시를 두번이나 타고 뱅뱅 돌았고(나이든 택시 기사도 이쯤인데 하면서 아리송해 했다)
한 시간가량 왔다 갔다를 반복했으나 거기가 거기 같고 기진맥진하여 포기했는데 마치 과거의 내 data가 한꺼번에
날아간 듯하여 무척 아쉬웠다.
잠도 못자고 배도 고프고 하여 동네 목욕탕에 들어갔다.
탕속에서 할아버지에게 혹시나 하여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그분이 한평생 여기서만 사신 분이라 너무도 자세히 알고 계셨다.
이런 것을 아마 행운이라 이야기 하는가 보다.
정확한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원래는 재개발 지역이어서 보상까지 완료 되었으나 주민 이주 중 회사가 부도가 나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고 한다.
앗!!! 저 골목이다. 순간 몸속에서 나를 흥분시키는 호르몬이 분비됨을 느낀다.
골목의 폭과 집들의 분위기가 꿈 속에 보았던 그곳과 흡사했다....아니 내 자신이 꿈 속을 걷는 듯하다.
갑자기 몸이 굳어 버렸다.....그래 바로 여기야. 오!!! 하느님. 진정 이곳이 이렇게 남아 있다는 말입니까?
저 안쪽 철제문이 바로 내가 태어나서 10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 당시는 나무문이었고 한옥집이었는데 바뀌었고 바로 앞집은 40년전 그 모습 그대로 였다.
나는 이 앞집에서 난생 처음 테레비라는 것을 보았고 닐 암스롱 달착륙 장면, 동물의 왕국,카스터장군등을 보았다.
이 골목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물총싸움 했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다.....마치 며칠 전의 일처럼
10살까지 이 골목이 나의 세상 전부였다.
T.V안테나가 마치 나를 그때와 연결 시켜주려고 아직까지 하늘로 향해 있는 것 같다.
3학년 4반 친구들이 마음 속의 성원을 보내주는 것 같다.
40년만의 방문을 축하라도 하듯 골목 입구의 짜장면 값이 나를 보고 아는채 한다.
그 당시 아버지.어머니는 서울에 계셨기 때문에 할아버지 밑에서 초3까지 자랐다.
그래서 유난히 조부에 대한 느낌이 남다른데 이왕 온 김에 산소를 찾아 인사나 드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하여
전철 종점 부근인 다사역에 내렸다.
묻고 물어 30분을 걸은 다음 산앞에 도착했으나 올라가는 길이 헷갈린다.
헉~~~~~아버지가 분명 벌초회사에서 주기적으로 벌초하여 사진까지 집으로 보내준다고 했는데
이건 완전히 여자귀신 산발한 머리다. 마치 산소에서 누군가 튀어나올 것 같다.
"할아버지 할머니 죄송합니다...이렇게 멀리 외로운 곳에서 더구나 7남매 자식들이
있는데도 이러한 모습으로 계시다니 제가 이제 제사를 물려받으면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두번 큰 절하고 한참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근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비석에 이름을 자세히 보니 할아버지 묘가 아니다.
@#$%^&*()!@#$%^&*
스스로 어이가 없다.
'죄송합니다...없었던 걸로 하고 그냥 가겠습니다'
산을 내려와 두번째 길로 갔는데도 아니다.
가을햇살이 따갑고 이제 땀까지 줄줄 흐른다.
그나마 운동화를 신고와 다행이다.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산속으로 다니면서 세번째 만에 드디어 찾았다.
인적이 거의 없는 산이라 길이 희미하고 온통 가시 투성이다.
그런데 첫번째 산소와 환경이 너무나 흡사해 비석을 보니 분명 손자 원기라고 내 이름이 적혀 있었고
벌초가 안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아버지도 팔순이 넘으셨으니 이 모든 것이 내 몫이다.
이 집이 내 집이란다.....
증조=>할아버지=>아버지=>나한테까지 물려 받았으나 마치 내 모습처럼 폐가가 되어 버렸다.
어릴때 여기서 처음 소를 보았고 매미도 잡고 호박잎에 보리밥을 싸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40년 후에 오니 사람은 가버리고 집은 폐허가 되어 있고 산소는 잡초만 무성하다.
그나마 기억을 더듬을 장소가 남아 있다는게 감사하다.
앞으로 40년 후 아마도 나는 사람들의 기억속에만 존재하고 무성한 잡초 속에 있을 것이다.
아마 잘 못 살면 기억에 조차 없을 것이다.
곧바로 서울로 올라오면서 내내 잤다.
세상의 덧없음을 느낀 16시간의 Back to the future 대구 방문이었다.
강남고속터미널에 도착하니 사람 속에 묻혀 대구 생각은 몇 발작 걷지 않아 머리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