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내리던 날 연극 <빨간 버스>를 보러 찾아간 국립 극장 앞마당에는 꽃단장을 한
눈사람이 개구진 표정으로 반갑게 맞이합니다.
누구나 눈사람 앞에서는 동심으로 돌아가는 법이어서 나도 씽긋 미소를 보냅니다.
아이이면서 어른인 청소년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녹지 않을 저 마다의 눈사람이 하나 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무대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환한 조명 아래 드러난 무대는 디귿자 객석 앞의 X자형 교차로뿐이었습니다.
세상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희망일까요... 아니면 어디로 가야할지 혼란스러워 하는 방황일까 요...자못 궁금해졌습니다.
노란 고등학교 합창반 삼총사가 잔잔하게 노래를 부르면서 연극이 시작됩니다.
자신들이 함께 만든 가사를 음악 샘은 교감이 부족하다고 야단을 칩니다.
(그런데 연극 중반부에 가면 음악샘은 주인공 세진에게 교감이 없는 일방향의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연출가님은 이러한 배치를 통해 어긋남의 역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연극반 삼총사들은 엄마가 차려주는 따뜻한 아침밥을 먹거나 가족과 함께 외식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니 가능하지 않은 것을 꿈꾸는 것이 꿈이라며 세상에 대하여 냉소적 태도를 보이네요.
담배를 거나하게 한 대 피우며 부모와 학교의 선생님들에 대한 만평을 쏟아냅니다.
세진이의 남자친구 동환이가 자전거를 타고 멋지게 등장합니다.
술 담배는 기본이고 세진이와 성적인 관계를 갖기도 합니다.
동환이는 공부 잘하는 형을 질투하며 자신의 진로는 아버지의 설계에서 한발자욱도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이 친구도 세상을 냉소하죠.
동환이 자전거를 타고 무대를 계속 도는 장면이 나오는 데요...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일종의 ‘셔레이드’ 같았습니다.
가족과 학교와 소통할 줄 모르는 아이들의 대화를 몰래 엿 듣고 있는 나로서는 가슴이 아릿해지는데요...
아~ 교실의 적나라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수학적 인간’이라고 큼지막하게 칠판에 써 놓고는 전혀 수학적이지 않은 수업을 하고 있는 샘,
‘인간의 삶과 윤리’라는 제목으로 비윤리적인 대사를 쏟아 붓는 샘...
그리고 그러한 샘들을 등지고 앉아 수업은 전혀 듣지 않고 카톡을 하는 아이들이 모습을 보며
나는 한바탕 웃었지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마도 학교란 아이들의 고민과 상처에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는 소통 부재의 공간이라는 암시를 하는 셈이겠지요.
자, 이제 연극은 본격적으로 위기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10대 미혼모 세진이 편의점에서 분유를 훔치다 들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호기심 어린 주변의 시선은 ‘아빠가 누구일까’로 모아지고 세진이를 추궁하지만 정작 세진이는 그를 사랑했고
자기가 먼저 유혹 했다면서 무슨 일을 해서라도 아이는 지키겠다고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달콤하면서 두려운 법이지요.
그리고 그 고통을 치유하는 것도 자기 자신일 수 밖에 없고요.
하지만 어른들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관심만 보입니다.
학교는 시끄러워지고 샘들은 내부적으로 조용히 해결(?)하고자 합니다.
아이들 문제는 모름지기 못본 척 하는 것이 상책이라면서 세진이를 자퇴시키려고 하지요.
어쩌면 <빨간 버스>는 상처 앞에서의 나와 타자와의 관계, 그 부조리함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청소년의 내밀한 상처는 어른들에게 대상화되면서 검열과 보호의 논리로 재단됩니다.
마음 속 눈사람이 이미 다 녹아버린 어른들이 눈사람을 통해 꿈을 꿀 수 있는 아이들의 여린 상처를 바라보며
내가 보듬어 줄 수 있다는 듯 여전히 꿈을 가지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찾아 온 엄마도 세상이 맨홀 투성이처럼 위험하니 아이를 입양시키자고 합니다.
하지만 세진이는 절규합니다.
아이를 버릴 수 없다고...이제껏 그랫듯이 자기 혼자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세진이의 아이 이름도 자신과 똑같은 세진이입니다.
결국 아이란 저마다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가는데 필요한 자신만의 내밀한 고통의 비유일 수 있습니다.
세진은 찾아 온 엄마에게 엄마 자신의 인생을 사시라면서 나는 내 인생을 살겠다며 단지 졸업만 시켜달라고 외칩니다.
연극은 절정의 단계로 치닫고 있습니다.
세진의 외침속에 조명은 페이드 아웃되면서 교차로 램프등은 빨간 불빛과 노란 불빛이 교대로
반짝입니다. 음악은 고조되고 우리의 감정선도 어느새 희망과 절망사이를 오가며 고양됩니다.
‘졸업’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청소년들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를 뜻하는 상징일까요...
아이(자신만의 내밀한 상처)마져 제 손으로 키우겠다는(치유하겠다는) 세진이 그토록 졸업에 집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어른들의 세계로 상징되어지는 제도와 틀속에서 결코 자유로울수 없었던 세진이가
나도 얼른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서 이제는 당당하게 주체적 삶(타인의 왜곡된 시선과 관심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몸부림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어른이 되면 자본주의 체제아래서 물질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릴 것을 안다는 듯이
세진은 돈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한편 세진의 친구들은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노래를 나지막히 부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작은 소리도 진실하다면 커다란 함성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이 연극의 희망을 찾기란 너무 미약하게 느껴집니다.
이제 연극은 막바지에 다다릅니다.
레몬 향처럼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노란 버스에 타서 노란 희망을 품고 이제껏 살아왔는데,
그 노란 희망마저 사실은 부모의 희망이었고 교사의 희망이었다는 것을 눈치 채는 순간
노란 버스는 이제 돈만이 최고 가치로 인정받는 광란의 빨간 버스가 되어버린다고 그렇게 세진이는 외칩니다..
하지만 문제는 유리를 깨고 내리지 않는 이상 그 빨간 버스에서 내릴 수 조차 없다는 사실입니다.
유리창을 깨고 버스에서 내리는 탈주는 새로운 욕망의 시작일 수 있을까요...
세진은 자신의 외침을 뒤로 한 채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차피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무거운 주제의식 때문에 연극은 죽음으로 마무리하며 관객들에게 숙제를 던집니다.
‘청소년기의 혹독했던 그 아픔은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과연 치유 된 것일까?
계속 돌던 자전거처럼 그것은 변하지 않은 채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대는 온통 빨간 램프만 점멸하면서 음악은 커져가고 그렇게 연극은 끝이 나지만
내 가슴속에는 해결되지 못한 먹먹한 아픔이 밀려듭니다.
극장 밖...어둔 밤...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눈사람위로 싸락눈만 흩날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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