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여자가 있다.
결혼 5년차의 그녀에게 아이는 없지만 자상하고 유머러스하고 요리도 잘하는 남편이 있다.
그녀의 가정생활은 순탄하고 남편과의 관계도, 뭐 그 정도면 닭살 부부 버금간다.
그런 그녀에게 예기치 않게 새로운 남자가 등장한다.
그녀 앞에 나타난 그에게 그녀는 새로운 매력을 느끼고, 이런 저런 갈등 끝에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놓아주고
그녀는 새로운 남자를 찾아 떠난다.
그 둘은 새로운 열정에 빠지고 그리고 다시 늘 그런 것처럼 다시금 일상의 권태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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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진부한 사랑의 이야기를 영화 ‘우리가 사랑일까’는 새롭게 터치한다.
원제가 ‘Take this the waltz' 이다. (지금 이 순간 새롭게 다가 온) 이 왈츠를 추실래요...
제목에서 우리는 프루스트의 저 유명한 ‘가지 않은 길’이란 시를 떠올리게 된다.
삶은 여정마다 새로운 선택의 연속인 것을...그래서 언제나 삶은 아쉬움의 문양을 추억속에 간직하는 법이다.
이 진부한 소재의 이야기를 감독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연출로 우리를 저마다 아련히 간직해 놓은 몽상의 환타지로 몰입시킨다.
어차피 사랑의 이야기란 뻔한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가슴속에서 파문을 짓게 되느냐는 스토리가 아니라 스타일의 문제일 뿐이다.
자, 이제 영화속으로 들어가 보자...
첫 장면... 초점이 흐릿한 포커스 아웃 상태에서 영화의 주제 음악 ‘Take this the waltz' 가 흐르며 주인공 마고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그녀는 사뿐히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카메라는 다리 부분만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나는 이 다리 shot이 영화의 모티프라고 생각하는데, 어디로든지 떠날 수 있는 유목민(노마드)의 삶을 상징한다고 본다.
요리를 하던 마고는 지쳤는지 주저앉아 머리를 주방에 기대고 있는데 남편 루가 무심히 스쳐 지나간다.
남편의 무심함과 허공을 바라보며 살짝 떨리는 마고의 눈빛이 대비를 이루며 영화는 편안한 가정속에 내재된 권태를 암시한다.
씬이 바뀌며 프리랜서 작가 마고는 어느 마을 코스프레를 취재한다.
간통(adultery)이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있는 남자를 코스프레 진행자가 채직으로 때리라며 마고에게 권한다.
쭈빗쭈빗 망설이다 마고는 살살 치는데... ‘거 좀 똑바로 쳐보쇼...’라며 대니얼이 군중속에서 외친다.
이 장면은 마고가 간통을 하게 되리라는 운명을 예견하는 복선이다.
감독은 이처럼 수많은 복선과 모티브를 영화 전반에 걸쳐 축조해 놓고 있다.
내용과 형식의 충돌이라는 미학적 기법도 빈번하게 드러나는데 음악과 표정연기에서 그러한 감독의 연출 의도를 읽어 내는 것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 중요 포인트이다.
그런데 코스프레하는 곳에서 스친 대니얼을 마고는 우연히 비행기안에서 다시 만나게 되며 친숙해진다.
주인공 마고는 공항에서 다른 공항으로 환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나의 사랑에 정착하면 새로운 사랑으로 환승하는 것을 두려워 하듯이...
그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들은 가끔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멜로영화가 그렇듯 마고와 대니얼은 같은 동네 맞은 편에 살고 있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안에서 마고와 대니얼은 소꿉장난 같은 유치한 장난을 치며 서로에게 서서히 빠져 들어간다.
정숙한 마고는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자신은 이미 결혼했다는 말을 던진다.
흔들리려고 하는 자신을 부여잡기 위한 자신을 향한 선언인 셈이다.
한편 마고와 남편 루는 엽기적인 성적 농담을 게임처럼 주고 받으며 애정을 확인한다.
이처럼 농담속에서 마고와 루는 경계를 넘어선 사랑을 나누지만 정작 마고가 요리하고 있는 루를 뒤에서 백허그를 할 때,
루는 아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 지 모른 채 요리하고 있는데 왜 그러냐며 화를 낼 뿐이다.
마주침과 어긋남의 역설이다.
물리학적으로 두 물체가 같은 주파수를 가질 때 공명하듯이, 인간의 영혼도 같은 욕망을 지향하고 마주질 때 천둥이 치는 법이다.
남편 루와의 2% 부족한 사랑으로 미묘한 권태를 느끼는 마고 앞에 앞집 남자 대니얼은 마고의 일상 속으로 서서히 들어선다.
수영장에서 수영 체조를 즐기고 있는 마고를 바라보고 있는 대니얼.
그 앞에서 마고가 어이없게 오줌을 싸는 헤프닝이 벌어진다.
그러한 규범의 전복은 자신의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마고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듯 하다.
수영을 마치고 샤워를 하는 장면에서 적나라한 노출신이 펼쳐지는데...
야하다는 느낌보다는 표현의 핍진성으로 하여 오히려 생경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 때 어느 할머니가 ‘모든 새로운 것들은 낡아지는 법이다’ 말은 이 영화의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
대니얼은 남편에게 허전한 마음을 느끼고 모닝커피를 마시러 가는 마고를 따라 간다.
내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 지 솔직히 말해 보라는 마고에게 대니얼은 마치 섹스를 하듯이
그 과정 하나하나를 이야기로 리얼하게 묘사한다 .
대니얼의 선정적인 말을 들으며 야릇한 흥분에 빠지기도 하는데 현실과 상상사이를 넘나드는 마고의 표정 연기가 돋보인다.
일탈을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마고는 그런 방식으로 대니얼을 사랑한다.
마고는 지금 우리는 사랑할 수 없으니 30년 후 오늘 2시 등대에서 만나자고 제안한다.
그 때 쯤이면 남편에게 덜 미안할 것 같고 키스 정도는 나눌 수 있지 않겠냐고 덧붙인다.
대니얼도 마고를 적극적으로 유혹하거나 사랑의 집념을 보이지 않고 마고 앞에서 서성일 뿐이다.
그러한 마고와 대니얼의 이중심리 앞에서 나는 일정부분 감정이입을 하면서도 거리두기를 반복한다.
마고와 대니얼은 수영장 물속에서 그 곳은 현실 저 너머의 세계라는 듯 서로에게 다가섰다 물러섰다를 반복하며
또 다시 새로운 방식의 사랑을 나눈다.
감독은 이처럼 새로 시작하는 연인들이 사랑을 감정의 잉여나 과장없이 담백하게 새로운 버전으로 그려내고 있다.
결국 마고와 대니얼은 놀이공원에서 하루 데이트를 즐기기로 한다.
놀이기구를 타는 두 남녀의 모습을 감독은 현실 저 너머의 환타지인 것처럼 극적인 조명으로묘사하는데,
이 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팝송 ‘video kill the radio star'이 흘러 나온다.
이처럼 새 것 과 옛 것의 대비를 조명과 음악과 표정 연기로 표현하는 감독의 연출력이 압권이다.
흔들리는 마고를 위해 결국 대니얼은 ‘30년 후 8월 5일 오후 2시 등대에서’가 적혀있는 쪽지 하나를 남기고 마을을 떠난다.
그렇게 떠나는 대니얼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대니얼을 사랑했는지 마고는 뒤늦게 깨닫는다.
멜로영화의 관습처럼 다른 사내를 사랑하게 된 아내 마고의 마음을 남편 루도 눈치를 챈다.
하지만 남편 루는 쿨하게 마고를 보내준다.
마고는 대니얼을 찾아 해변가를 헤메는데 방파제에 쓸쓸히 앉아 있는 마고를 향해 어디선가
“여기 있었군요”라는 대니얼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영화는 여기서 크레딧이 올라가리라 기대했는데... 영화는 계속 이어진다.
마고와 대니얼의 정사신을 카메라가 돌아가면서 찍는데 다양한 체위들이 숏과 숏으로 연결되며 격정적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는 섹스에 몰입한 감정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며 감정이입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롱 숏으로 처리하면서 관찰의 느낌을 전한다.
영화의 처음 장면과 유사한 장면이 재현된다.
역시 초점이 흐릿한 포커스 아웃 상태에서 영화의 주제 음악 ‘Take this the waltz' 가 흐르며 주인공 마고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요리를 하던 마고는 지쳤는지 주저앉아 머리를 주방에 기대고 있는데 누군가 무심히 스쳐 지나간다.
스쳐간 누군가는 대니얼이다....
관계의 무료함은 남편 루에서 애인 대니얼으로의 전치된 셈이다.
자, 이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지는 놀이공원으로 가보자.
조명도 환타스틱하고 팝송 ‘video kill the radio star'가 여전히 흘러 나오고 있지만 대니얼과 함께 탔던
그 놀이기구에 마고 그녀 혼자만이 쓸쓸히 타고 있다.
마고의 미묘하게 떨리는 눈빛은 음악에 취한 채 초점을 잃고 허공을 응시한다.
조명이 자연 색채를 회복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라캉이 이런 말을 했다.
‘주체는 결핍이요, 욕망은 환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