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나서 나와 아내는 위장 이혼을 하기 위해서 수원 법원으로 갔다. 참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다고 해야 하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감돌지 않을 수 없었다.
‘행복한 결혼을 위한 이혼’이라, 이 얼마나 기막힌 아이러니인가? 법원 근처로 가자 법원에
제출할 서류를 도와주는 사무소가 많이 있었다. 아내는 이미 이혼 서류를 작성하고 내 도장
도 거기에 찍어 놓은 상황이었다. 아내의 적극성에 기가 막히기도 하며 한 편으로는 머리
한 구석이 혼란함으로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마음이 변해서 위장 이혼이 진짜 이혼으로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어렴풋이
들었는데, 부채 문제 때문에 위장 이혼한 부부가 정말로 갈라서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이 있는 것 같았다.
- 내가 마음이 변해서 다시 혼인 신고를 하지 않고, 만약에 당신이 별 도움(위자료와 양육
권)도 받지 못한 채로 정말로 갈라선다며 어쩌나 하는 불안한 생각은 조금도 없어? 한글이
엄마는 마치 새로운 세상을 구경가는 밝은 표정이군 그래. 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
분인데 말이야.
- 한글이 아빠는 나 없이는 못 살아요. 세탁기도 못 돌리고, 요리라고는 라면이나 짜파게티
를 끓이는 게 전부인 당신이 어떻게....
- 알았어. 한글이 엄마 말이 옳아. 내가 한글이 엄마 없이 어떻게 살아가겠어?
겉으로는 웃으며 밝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아내도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
상에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자 더 이상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피하는 게
좋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이혼 서류에 보증인 두 사람의 서명 또는 도장이 필요했다.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무작정 부탁할 수도 없고 정말 난감했다.
우리는 근처의 대서소에 들어갔다. 나이가 50중반쯤 돼 보이고 왼쪽 뺨에 까만 점이 있는
아저씨가 인사를 하며 우리를 반겼다.
- 두 분의 표정을 보니 부채 문제로 위장 이혼을 하러 오셨군요.
- 네? 그 걸 어떻게 아셔요?
나는 조금은 놀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진짜로 이혼하러 오는 사람들은 두 분과 표정부터가 달라요. 그리고 IMF이후로 빚을 갚
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법적으로 갈라서는 부부가 얼마나 많은데요.
- 그렇겠군요.
'나는 빚 때문에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를 순간적으로
생각하며 대서소 아저씨의 표정을 살폈다.
- 아저씨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데요. 저희는 부채문제 때문이 아니고 좀 특별한 사연이 있
어서 여기를 온 겁니다.
나는 아저씨에게 간단하게 보증인이 필요해서 왔다는 정황 설명을 했다. 그 얘기를 듣더니
- 아하, 그러시군요. 그렇지 않아도 보증인이 필요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꽤 있죠. 그런
데 수수료가 필요합니다. 2만원을 먼저 주시겠습니까?
나는 이름 한 번 써 주고 그 옆에 막도장 하나 찍어 주는데 너무 비싸다는 생각을 했지만,
다른 대서소를 또 찾아가서 구차한 얘기를 하는 게 남사스럽고 귀찮기도 해서 지갑을 꺼내
고 2만원을 그 아저씨에게 주었다.
그러자 사무실 한 구석에서 신문을 읽던 다른 아저씨 한 분이 도장과 볼펜을 갖고 우리에게
로 다가오는 거였다.
그런데 처음 우리가 대서소에 들어왔을 때 말을 걸었던 아저씨가 약간 낮은 목소리로 나에
게 말을 걸어오는 거였다.
-아저씨?
점박이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네.
-위장 이혼을 하게 되면 호적에 흔적이 남는 거 아시죠. 아내 분의 호적이 처가로 갔다가
혼인 신고를 새로 하게 되면 친가로 다시 기록이 되기 때문이죠. 혹시 세월이 흘러 아드님
이나 따님이 취직을 위해 신원조회를 하면 그게 좀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 아하, 그렇겠군요. 호적이 한 번에 깨끗한 경우와는 느낌이 다르겠죠.
- 그래서 말씀을 드리는데 이혼이 결정된 다음에 우리 사무실로 오면 한 번 서류상 이혼했
던 기록을 깨끗이 세탁을 해 드리죠.
- 다른 사람들도 서류 세탁을 하는 경우가 있나요?
- 그럼요. 자녀분들이 결혼을 할 때도 부모님이 이혼을 한 번 한 기록이 좋을 리는 없겠죠?
나는 대서소 아저씨의 말을 듣고 서류상 이혼한 전력이 남는다는 게 좀 찜찜했지만 마음을
크게 갖기로 했다. 아내가 직업을 갖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인데 어쩌란 말인가.
- 당연히 비용이 들겠지요? 얼마쯤?
- 20만원이면 깨끗이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왠지 불법을 저지르는 것 같아 꺼림칙했기 때문에 그 아저씨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서소에서 필요한 서류를 모두 완성한 우리는 법원 안으로 들어갔다.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별의별 사람들이 여럿 와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고,
남자에게, 혹은 조금 있으면 남이 될 상대방 여인에게 욕을 해대며 큰 소리로 불만을 상대
방에게 토해 내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에 섰다. 한참을
기다리니, 가정 법원 판사 앞으로 안내했다. 판사는 여자였다.
- 두 분, 결혼 생활을 오래 하시진 않은 것 같은데 성격차이 인가요?
- 네. 그렇습니다.
아내가 대답하는 게 부담스러울 것 같아 내가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애들 양육은 누가 맡기로 했나요?
안경 너머로 여자 판사가 이혼 서류를 보며 말했다.
- 엄마가 맡아 키우기로 했습니다.
- 아빠 직업이 교사 맞나요?
- 네. 그렇습니다.
역시 낮은 목소리로 내가 대답했다.
- 여자분에게 위자료는 얼마를 주기로 했나요?
순간, 나는 당황했다. 모든 게 아내가 시키는 각본에 따라 착착 맞아 돌아갔으나 그 걸 미
리 생각해 두지 못했던 것이다. 순간 아내가 판사의 눈치를 살피다가 판사가 서류를 들여다
보는 틈을 이용해서 내게 손가락 셋을 가리켰다. 300백은 너무 적고, 3억은 너무 많고....
'애라, 모르겠다.'
-셋이 거주할 전세방을 얻으라고 3천 만원을 주기로 했고 매달 양육비로 또 얼마간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아내, 아니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후한 편이시군요. 그 마음으로 더
부부생활을 지속해볼 마음은 없나요? 실제로 일시적 기분으로 갈라섰다가 후회하는 경우가
적지 않거든요.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여자 판사는 서류에 도장을 찍더니,
- 자, 끝났습니다. 기한을 넘기지 말고 구청에 가서 신고를 꼭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이 협의 이혼이 무효가 될 거라는 건 두 분이 잘 아시죠?
판사는 지금까지 오랜 동안을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해왔었다는 듯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이제 신고만 하면 우리는 서류상 남남으로 되는 거였다. 이혼! 거 참 간단
한 것이로구나. 아내가 화장실을 갔다 올 때까지 담배를 피면서 나는 생각했다.
2013. 0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