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1998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33살. 그 당시로는 꽤 늦은 나
이에 장가를 가서 둘째를 낳고 아내가 몸조리를 거의 끝냈을 무렵이었다. 아내는 내게 26살
에 시집을 왔는데, 계산해 보니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초등학교 6학년인 셈이었다. 지금은
마치 누나처럼 행세(?)하지만 말이다.
다시 그 때(1998)로 가서,
늘 한 잔 걸치고 퇴근을 했던 나는 정말 며칠만에 맨정신으로 집에 일찍 들어왔었는데 내가
상의를 벗을 때, 아내가 내게 충격적인 말을, 평상시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투로 하
는 거였다.
- 한글이(장남 이름) 아빠, 중요한 할 말이 있어요. 우리 이혼해요.
- 엥? 지금 이혼이라고 했나?
- 네. 그래요. 난 이대로는 도저히 못 살겠어요. 갑갑하고 시간이 더디 흘러서...
나를 만났을 때 26살이었던, 부산 출신의 아내는 PBS(부산 KBS방송국) 방송 리포터였다.
내가 살고 싶은 도시 부산이기는 했지만, 부산 사람들은 대개가 ‘서울’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거 같다. 제 2의 도시이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서울과 부산은 상대가 안 되
고 뭔가 조금이라도 규모가 있는 일을 도모하려면 서울이 여러 가지로 유리하기 때문이겠고
교사인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교육 한 가지만 해도 서울과 부산은 애초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쨌든 토박이 부산 출신인 아내가 친구하나 없는 평촌으로 시집와서 그것도 중풍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와 60을 갓 넘은 시어머니와 살려니 갑갑하고 따분하기는 당연한 일이겠고 지리도
잘 모르니 답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손치더라도 ‘이혼’ 이라니,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유가 뭔데? 부모님과 생활하기가 너무 어려운가? 애들 둘을 어머니가 보살펴 주니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 맞아요. 어머니가 집안 일은 물론 애 키우는 일들을 거의 해 주시기 때문에 나는 삶이 너
무 헛헛해요. 그래서 내가 밖에 나가서 활동을 해야겠다는 말이예요.
방송국 ‘리포터’라는 직업이 계속 취재도 다니고 늘 순발력을 필요로하며 생방송을 해야하
기 때문에 매우 활동적인 직업이라는 것은 짐작이 되었다. 하지만 아내는 지금 4살과, 막
돌을 앞두고 있는 둘째 아들의 엄마인데 사회 생활을 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은가?
- 당신이 어느 정도는 알겠지만, 나는 성격상 도저히 집에서 살림만 하고 살기에는 적합하
지 않아요. 내가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내 일이 있고, 사회 생활에 참여해야 삶을 살아가
는 재미가 있다는 말이죠.
- 그런데 이혼은 뭔 소리야?
- 대졸 사원을 뽑는 곳이 있는데, 당신도 아시다시피 여자의 경우 미혼만 뽑는 거 알죠?
- 그래서, 취업을 하기 위해서 위장 이혼을 하자는 말인가? 나~참 어이가 없구만.
- 그래요. 내 말의 취지를 빨리 알아들어서 고마워요. 우선 이혼을 해서 서류상 독신처럼
살고 취업을 한 다음에 다시 서류를 원래대로 신고하면 되잖아요.
나는 갑자기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아내가 그 당시로는 비교적 늦게 결혼한 나를 위해서
곧바로 첫째를 임신했을 때도 그 몸으로 ‘보습학원’ 강사로 취업해서 수학을 가르쳤던 아내
이기에 지금 하는 말이 얼마나 진지한 말인지를 잘 알고 있는 처지였다. ‘결혼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이혼을 해야 한다?’ 참 요상한 삶도 있구나! 나는 자못 심각해질 수 밖에 없었
다.
- 내가 반대한다면?
- 그럴 리가 없죠. 시어머니 잘 모시고 이렇게 무난한 결혼생활을 하는 내가 좀 더 나은 삶
을 살자는 건데, 현명한 당신이 조금 불편한 걸 참아 주리라 충분히 예상하고 힘들게 꺼낸
이야기인데, 당신의 허락을 100% 믿어요.
아내는 내 팔짱을 끼더니 맹렬히 육탄 공세로 나오는 거였다.
- 참,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군. 어머님의 반대가 만만치 않을 텐데?
아내의 애정공세를 받으면서도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져만 갔다.
- 알았어. 일단 당신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지. 하지만, 우리만 살고 있는 결혼 생
활이 아니고 만일 당신이 직장생활을 하게 된다면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에 아들 둘까지 돌
봐야하는 어머님의 입장도 있으니, 먼저 어머님께 허락을 구해야겠지?
- 걱정 마셔요. 어머님께는 제가 말씀드렸고, “서류상 이혼하는 게 좀 찜찜하기는 하지만,
더 나이를 먹기 전에 가능하다면 네 꿈도 펼쳐봐라!” 라고 허락을 이미 하셨어요.
나는 아내의 집요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리고 내가 반대를 해 봐야 아내의 뜻을 꺾을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 (계속)
2013.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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