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에 가서 사람들의 바둑을 구경하면 두는 사람들의 눈에서는 판도에 따라 온갖 감정들이 드러난다. 감정을 숨기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은 또 줄담배를 피우면서 속내를 들키는 것이다. 프로들 중에서 조훈현은 대국 내내 혼잣말을 중얼거린단다.
"졌네, 졌어. 다 죽었네. 쯧, 더 둬야 하나."
이런 말이라는데 입을 열어 눈빛을 닫겠다는 것이다. 혼 빼기 작전이요 흔들리는 눈빛으로 마음을 들키지 않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누가 그러는데 내 눈에서는 빛이 난단다.
“눈에서 불이 나와. 어둑어둑한 항구의 등대처럼 강력한 빛이 쏟아져 나와서는 바둑판을 훤하게 밝혀.”
이건 칭찬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좋은 뜻으로는 몰입한다는 것일 테지만 나쁘게 말하면 집착일 것이다. 좀 유순해져야겠다.
기원에서 최고 고수에 속하는 한 분의 눈은 거의 감격이다. 그의 눈은 어린 아기를 재우는 눈빛이다. 서글서글한 눈으로 내려보면서 그윽한 표정으로 반상을 훑을 때는 바둑돌 하나하나를 부모처럼 다정다감하게 다독이는 거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
잘 두니까 그런 눈빛이 나오겠지. 맨날 지는 대국자라면 절망의 눈빛이 뻔한 것이다. 바둑에 지고도 초연한 눈빛이라면 도통한 것이고 그런 사람이 기원에는 뭐 하러 들락거리겠나. 어디 큰물에서 놀아야지.
그 분과 둘 기회가 있었다. 세 점을 깔고 두는데 첫 판은 졌다. 자신이 좀 몰리는 듯하면 잠시 장고에 들어가서는 절묘하게도 묘수를 찾아냈다. 그럴 때 그의 눈빛은 잠시 고요한 호수에 실바람이 스쳤다고 할까 미동이 보일 듯하다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두 번째 판에서는 시종 내가 우세했다. 그러자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는 입담이 좋아서 좌중을 한바탕 웃기는데 소질이 있고 경우도 썩 밝은 사람이다.
“눈이 간재미 눈이야.”
나는 짐짓 모른 척 물었다.
“예? 간재미 눈이요?”
“그래. 여길 보는 척 하면서 딴 데를 보고 계신 거야. 옆으로 휙 돌아갔어. 눈을 잘 보라고, 지금 어디 보고 계신지.”
모두 웃을 수밖에. 물론 그 분도 웃었다. 하긴 이세돌도 대국 중에 눈을 힐끔힐끔 치뜨며 상대의 눈을 훔쳐본다. 상대의 눈을 보면 상대가 지금 바라보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상대가 가자미 눈으로 돌아갔고 나는 바둑돌 하나하나 어린 자식 보듯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