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심심함은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
기술 복제, 아우라등으로 유명한 발터 벤야민이 한 말입니다.
꿈을 위해 열정을 다하고 그 이후의 발효와 숙성을 위한 무위의 시간은
새로운 창조의 과정이라는 걸 미학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현대의 성과사회에서는 능력과 실적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데,
그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과잉이 피로사회를 만들었다고,
심심함의 가치를 역설하는 한국의 철학자가 있습니다.
독일에서 꽤 유명한 한병철이라는 문화비평가인데요,
근대사회에서 탈근대사회로 이행되는 포스트 모던한 현상들을 한병철은 피로사회라는 키워드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근대가 금지와 규제의 부정사회였다면(~해서는 안된다),
현대는 자유와 탈규제의 긍정사회(~할 수 있다)로 변모해 가는데,
오직 자신의 성과로 존재감을 확인받는 주체들은 오히려 억압을 받고 피로해 진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명령하는 사람이 타자였다면, 이제는 스스로가 가해자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내면화한 노동 과잉의 신화로 자신의 에너지가 소진(burn out)되면 우울증이 도래합니다.
결국 긍정성의 폭력이란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인데.
이러한 새로운 폭력은 타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시스템 자체에 존재합니다.
자발적 착취는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입니다.
저자는 과거사회를 면역사회라고 하는데요, 면역의 뜻이 질병을 배제하는 것이라면
면역사회는 나와 타자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이질적 타자(질병, 범죄자)를 경계선 밖으로 쫒아내는 사회라 할 수 있겠지요.
푸코는 그러한 위생 권력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로 병원, 교도소, 군대, 학교를 이야기 합니다.
금지와 차별과 훈육이 주요한 덕목이 되고 있지요.
하지만 현대사회는 이질성과 타자성이 소멸되고, 오히려 이질성은 차이로 대체되고 혼성화 되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퓨전, 크로스 오버, 혼성 모방, 다문화, 세계화등)
그러니까 이제는 절대적인 중심도 없고 경계도 없으니 We can do everything!
그렇게 현대의 성과사회는 무엇이든 무한정 할 수 있다고 속삭이고,
그러한 성공 신화의 구체적 실천 전략 프로젝트도 친절하게 제시해 줍니다.
이러한 과잉활동 프로젝트는 과열 경쟁을 야기하고 우리는 벌거벗은 생명이 되고 맙니다.
저자는 이에 대한 극복 대안으로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강조하는 치유적 피로를 제시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동양 철학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활동과잉은 자극과 흥분에 쉽게 순종하는 과잉수동으로 전도된다고 지적하면서
어떤 사태에 대하여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사유의 능력을 키울 것을 요구합니다.
무위가 가지고 있는 부정성이야 말로 사색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현대인들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거나 한 사물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스마트 폰이 제공하는 수많은 정보와 이야기는 내 삶의 진정성 있는 스토리를 지워버립니다.
사색은 자기 자신의 밖으로 나와서 사물 세계에 침잠하는 것이라는 걸 폴 세잔은 일찍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풍경은 내 속에서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