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야기했는지 “산이 거기 있으므로 오른다.” 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명언이다. 거기
있기만 해도 오르는 산을 우리는 22 명이 한 무리가 되어 다녀왔다. ‘우신’ 이라는 인연의
실타래에 엮여서. 누구는 아버지와 아들로 누구는 엄마와 아들로 또 어느 분들은 조금은 거
리가 있는 인연으로. 거기에 이야기가 없을 수 없지 않은가? 2박 3일인지 1박 3일인지 헷
갈리는 이 여행, 이 땅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섭섭할 명산, 그 설악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우
리의 추억을 여기에 남기고자 한다.
얼마나 기다렸던 날이던가? 매년 정기 모임에만 참석하다가 작년 10 월에 동창회 가족 체
육대회를 기점으로 등산반 활동에 적극 참여한 이후로, 작년 지리산에 가족들과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었기에 그리고 그 여행이 얼마나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까? 를 혼자 생각할 때
마다 이 번의 설악산 여행은 내게 정말 기다려지는 여행이었다.
마누라야 워낙 등산을 싫어하니 함께 가는 것은 기대도 안 했고 두 아이(초등 4년, 1년)을
모두 데려갈 욕심이었다. 작년 지리산에도 한태균 아들인가가 초등 1 년인데 거뜬히 다녀왔
노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달리기에 소질이 있는 막내가 못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었다. 그런데 집사람이 한사코 말리는 거였다. 괜히 본인 고생 나 고생,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는 일일랑 하지 말라는 거였다.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다. ‘산을 오르다가 못 간다고
울고 떼라도 쓰면 난감한 일이겠구나’ 하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장맛비 끝에 많이 덥지만 쾌청한 날씨, 23 일 밤 11 시 20분 준비물을 배낭에 나
누어 실은 우리 부자는 약속 장소인 서초구민회관 앞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아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맨끝 관광버스에서
승필이가 나오는 게 아닌가. 무척 반가웠다. 일찍 온 사람들이 날씨가 더워 에어콘 바람을 쐬
기 위해 차 안에 있었던 거였다. 난,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고 짐을 내려놓은 뒤, 바로 준비
한 양주병을 꺼냈다. 마침 일행 중에 인호의 대학 동창이 마른안주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용섭(7회)이가 얼음도 준비했다는 거였다. 컵은 형동이가 가져온 스텐레스 컵. 안성맞춤이었
다. 죠니워커를 한 바퀴 쭈욱 돌렸다. 다들 여행의 들뜬 기분과 적당히 취해오는 느낌으로
마음이 설레었을 것이다. 3조의 부식을 책임지기로 한 남구식 가족이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
하자 출발, 버스는 설악으로 달렸다. 간단한 서로의 인사를 나눈 뒤 밤 버스는 야음을 뚫고
우리의 목적지로 달렸다.
중간의 휴게소에서 관노가 패트병 맥주와 오징어를 사줘서 마른 목을 축이고 계속 달려서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용대리에서 내렸다. 지난 겨울 설악산행에서 걸어본 거리지만, 계
곡을 끼고 걷는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가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우리는 처음의 예정
을 바꾸에 백담 산장에서 아침을 해 먹기로 했었기 때문에 어른 속보로 한 시간이 훨씬 넘
는 거리인 백담산장을 향해 열심히 걸었다. 걷는 중간에 힘들자, 백담산장에서 버스를 내리
지 왜 이고생을 사서 하냐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회장인 인호가 말하기를
- 아니, 이 좋고 멋있는 길을 왜 차타고 가요? 편하려면, 집에 있는 게 최고죠.
내 배낭은 아내가 지난봄에 아름다운 가게에서 3천원 주고 산 배낭이다. 50 리터도 더 됨
직한 데다가 양쪽에 탈,부착 주머니까지 있어서 준비물은 제법 많이 들어갔다. 겉은 멀쩡했
지만, 구식은 구식, 한 20분쯤 걷자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팠다. 최신형 배낭과는 달리 배낭
의 무게가 어깨끈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박인호의 배낭과 바꾸어 매었다. 무게는 인호
것이 오히려 조금 더 무거운 느낌이었지만, 인호 배낭은 최신형이라 배낭이 몸에 착 달라
붙으면서 상체 전체에 배낭무게가 분산되는 느낌이었고 따라서 어깨의 통증도 없었다. 절반
거리쯤 바꾸어 매니 어깨 통증을 나누어 가진 셈이다. 결국 내 배낭의 한계는 이번처럼 가
득 채워서는 안 되고 80% 정도만 채워서 등산을 다녀야 한다는 결론이다.
백담사 산장에 도착해서 조별로 아침을 해 먹었다. 다른 조는 햇반을 비롯한 인스턴트 식량
으로 한 끼를 떼우듯이 먹었지만, 준비를 튼실히한 우리조는 시간은 좀 걸렸지만, 밥을 지
어서 먹었다. 글쎄 여행의 재미야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다양하겠지만, 한끼 식사
를 준비하고 익기를 기다렸다가 먹는 재미 또한 뺄 수 없는 게 아닐까? 준비하는 과정에서
의 왁자지껄한 이바구 또한 집에서는 못 느끼는 즐거움이리라. 구식이 마눌님이 끓인 김치
찌개와 각종 밑반찬, 남성 건강에 좋다는 마늘 등 푸짐한 아침 식사를 마치니 당장이라도
대청봉에 오를 힘이 솓았다. 밥을 먹고 수렴동 계곡의 산장을 향해 출발한 시간이 아침 9시
쯤이었다.
세상에 철 따른 자연의 변화만큼 당연하면서도 경이로운 일이 또 있을까? 불과 몇 개월 전
의 계곡과 한 여름 계곡의 모습은 너무도 달랐다. 그 때는 수십 톤은 될 듯한 얼음 덩어리
들이 겁나게 떠다니던 무섭기까지 했던 계곡이었는데, 지금의 계곡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쉬어가라고 손짓이라도 하는 아주 순한 모습이었다.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과 날씨는 우리의
이마를 땀으로 적시게 했지만, 시원한 계곡에 언제라도 그 땀을 씻을 수 있어서 좋았다. 발
바닥에 열이 오르면, 계곡물에 담그고 서로 흰 이를 드러내며 이런저런 덕담으로 계곡의 시
원함을 즐기고 기운을 재충전해서 수렴동 산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두 시간을 조금 더 걸어
수렴동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에 도착해서 간단한 막걸이 파티를 하였다. 산과 시원한 계곡
물이 막걸리의 취흥을 돋구었다. 아까의 조금 힘든 듯한 피로가 오고가는 막걸리 잔 속에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아침은 밥을 해 먹었으니 점심은 라면을 끓여 먹었다. 라면을 안주
삼아 마시는 소주 한 잔이 식욕을 돋구었다. 세상에 소주가 없었다면 무슨 재미로 삶을 이
어갈까? 우리 3 조, 민형동, 최경수(7회)와 나, 남구식은 라면과 반찬을 안주 삼아 한 잔 또
한 잔 제법 얼근해질 만큼 마셨다. 그 동안에 한글이 녀석은 수렴동 계곡물이 쉬어 가는 곳
에서 혼자 시원한 물놀이를 즐기는 거였다. 제법 깊은 곳은 녀석의 키를 넘을 정도였지만,
수영을 할 줄 알기에 큰 걱정은 안 했다.
두 시간 가까운 휴식과 식사를 한 다음에 봉정암을 향해 올랐다. 사실 본격적인 등산은 지
금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물놀이를 한 시간 넘게 즐긴 한글이의 체력이 급속도로 하강 곡선
을 긋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좀처럼 쉬어가자는 말을 안 했던 녀석인데, 자주 힘들다고 쉬
어가자는 거였다. 한용섭과 박인호가 함께 가 주어서 그나마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박인호
가 말하기를
- 삼겹살 아홉 근 내가 지고 가니, 지들이 암만 빨리 가봐야 기다릴 수밖에 없을 걸.
계곡이 나올 때마다 팔 베게를 하고 발은 계곡에 담근 채 여유를 부렸다. 때때로 좋은 경치
에서는 사진도 찍으며 정말 산을 즐기며 오른다고 할 수 있겠다. 용섭(7회)이 후배 또한 진
짜 산을 즐길 줄 아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쌍폭을 지나면서 한글이의 체력이 더욱 떨어지고 있었다. 10 분을 채 오르지 못하고
자꾸 쉬자고 하는 거였다. 할 수 없이 뒤로 처지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물을 좋아하는 녀석이 수렴동 계곡에서 한 시간이 넘게 물놀이를 즐긴 게 체력 고갈의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았다. 평소 몸은 좀 통통한 편이긴 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씩 농구를 배우
러 다니기에 별 걱정을 안 했는데 자꾸만 힘들어 하는 녀석을 보고 쉬어가는 도리밖에 어쩔
수 없었다.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봉정암까지 오르자, 녀석은 배고픔까지 호소했다. 이미
일행과 상당히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 때였다. 절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줄을 서서는 미
역국에 말은 밥을 받아 오는 게 아닌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나도 줄을 서서 미
역국 두 그릇을 받아왔다. 정말 배고픈 우리에게는 부처님의 자비가 아닐 수 없었다. 특별
히 양념을 하지 않은 담백한 미역국에 말은 밥을 오이 무침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난, 미역국을 먹고 나자 힘이 솟았으나 한글이 녀석은 그렇지 않았다. 거기다 경사가 점점
가파르기 시작하는 지점이 되었다. 제법 예쁘장한 여대생 두 명이 말벗이 되어 주면서 걸어
서 녀석이 좀 힘을 내는 듯하더니, 다시 계속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채 10 분을 넘지 않는
거였다. 난, 내가 짚고 가던 스틱의 길이를 줄여서 녀석에게 주며
- 여기에 체중을 실어 걸어보렴.
- 알았어요, 아빠.
녀석은 짜증을 내지는 않았지만, 쉬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으며, 표정도 힘든 빛이 역력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더 올라가자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승필이였다. 우리가 걱정이 되어서
구조대로서 온 것이다. 우선 한글이의 배낭을 한 쪽 어깨에 걸더니
- 천천히 아저씨 따라와라.
- 네. 배낭을 아저씨가 들어주니까 훨씬 낫네요.
꾸준히 등산을 해 온 나도 힘들었는데, 오늘의 목적지인 소청 산장까지 올랐다가 다시 내려
온 승필이에게 인간적인 고마움을 깊이 느꼈다.
그 때였다. 한글이 녀석의 손에 스틱이 없는 걸 깨달았다.
- '어떻게 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스틱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만큼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나도 힘든 게 사실이었
다. (계속)
2004. 7.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