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기관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 2008-11-19)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기관'의 시대입니다. 정보기관, 공안기관, 사정기관…. '권력기관'으로 불리던 그들의 무소불위가 다시금 이 땅에서 부활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권력기관들은 연일 뉴스의 중심입니다. 단순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운영의 중추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순식간에 국민생활 전반을 '기관들의 업무영역'에 편입시켜 버렸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어린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집회에 참여했던 엄마들, 인터넷에서 소비자 캠페인을 한 시민, 경제 예측을 한 글조차 수사대상이 돼 절필을 선언한 인터넷 논객,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내용을 방송했다가 수사를 받는 PD, 임기가 법으로 보장된 사장직을 법대로 수행하려던 공영방송 사장에 이르기까지 이제 기관이 손볼 대상에서 감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이야말로 기관의 시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문제는 그들이 누구의 명에 의해 움직이느냐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 전성시대를 맞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위엄과 국민들 존경이 합쳐져 할 일이 많아지고, 위세가 커지고, 영향력이 늘어난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핵심권력의 손아귀에서 춤을 추며 공평성을 잃은 채 권력을 행사한다는 의심을 받는다면 이보다 심각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과거 그 이름만으로도 국민들 마음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던 대한민국의 권력기관들. 그들의 빗나간 암약이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되고 역사의 오점이 된 것은 바로 핵심권력의 손아귀에서 춤을 추며 공평성을 잃은 채 권력을 행사한 데서 시작됐습니다.
악몽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오점을 지우는 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많은 사회적 진통이 뒤따랐습니다.
그 지난한 여정이 불과 얼마나 됐다고, 어렵사리 제 자리로 돌아간 보람도 없이, 음험한 시절로 회귀해 버린다면, 그런 행태야말로 한국 민주주의의 초라한 몰골에 다름 아닙니다.
기개라곤 오간데 없는 검찰
권력기관 가운데 걱정스러운 것은 검찰입니다. 이른바 공기업 비리를 뒤진다고 지난 반년 가까이 부산을 떨었습니다.
처음부터 미심쩍었습니다. 검찰이 직접 나서야 할 일일까 싶은 사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공기업은 주무 감독부처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으면 감독부처로 하여금 감사를 하면 될 일입니다. 그것도 부족하면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의해 공기업 전체를 들여다보고 따져볼 수 있는 단일한 권한을 가진 슈퍼 부처도 있습니다. 그것조차 부족하다면 감사원도 있습니다.
그런 일에 대검 중수부가 직접 나섰으니, 항간엔 이전 정부 인사들의 비리를 찾기 위한 표적사정이니, 공기업에서 계속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이전 정부 인사들을 몰아내기 위한 지원수사니 하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중수부는 물론 전국 검찰의 특수수사 역량이 총투입 된 수사였다고 하는데 뭐가 나왔습니까?
17일 대검중수부의 수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구속기소 된 옛 정권 관련 '거물급' 인사는 김상현(73) 전 의원뿐이었습니다.
지난 정부 실세 연루설만 무성하더니 결과는 초라합니다. 한마디로 견문발검(見蚊拔劍)입니다. 대한민국 검찰이 그리 한가한지 측은합니다.
정연주 전 KBS사장에 대한 수사 역시 코미디입니다. 업무상 배임이면 이득을 본 사람이 있을 텐데, 법원 조정결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익을 얻은 자는 정 전 사장이 아니라 정부였습니다. 그로 인한 이익은 곧 국민에게 귀속되었습니다. 결국 정연주 전 사장이 조정결정을 받아들인 것은 국민의 이익으로 이어진 셈입니다.
국민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위를 한 사람을 형법으로 처벌해야 할 만큼 검찰이 할 일이 없습니까?
<PD수첩>에 대한 수사, 네이버와 다음에 대한 압수수색 모두 검찰권의 남용이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지난 정권에 대한 검찰 수사가 착수될 때마다 "검찰이 정치권으로 거액의 뭉칫돈이 유입된 정황을 포착했다"는 언론보도가 잇따랐습니다. 최근 검찰 수사에 걸핏하면 뒤따르는 이전 정부 실세 연루설은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이런 모습에 대해 참담함을 느끼는 검사들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검찰 내부에서 심각한 문제제기가 있었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검찰을 장악하지 않겠다'는 현직 대통령 앞에서 맞장을 뜨던 일선 검사들의 기개는 이제 청와대에 상납한 것인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공평성 상실한 채 춤추는 권력기관
정치적 독립성을 눈동자처럼 소중히 여겨야 할 검찰이 이런 눈총을 받고 있는 처지에 다른 기관들의 행태는 논하는 것조차 부질없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검찰 이상으로 독립성이 유지돼야 할 감사원이 KBS 감사에 나선 일, 국내 정치에 철저히 거리를 둬야 할 국정원 고위간부가 공영방송 사장 한 명 몰아내기 위해 열린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참석한 일, 이전 정부 고위인사들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기업에 세무조사를 하는 국세청, 영향력이 큰 인터넷 논객 한 명 제압하기 위해 신원을 파악하고 수사압박까지 하는 정보기관, 유모차 부대를 수사대상으로 삼은 경찰….
모두 지켜야 할 자리를 일탈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이런 일이 또 다시 해당기관의 역사적 오점으로 남게 될 게 아닐지 우려됩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아예 법을 만들거나 바꾸는 일까지 추진되고 있습니다. 사이버모욕죄 신설, 집시법 개정, 국정원법 개정,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등이 그것입니다.
행위에서 이미 일탈을 하고 있으면서 그 일탈을 뒷받침할 법적 인프라까지 구축하게 된다면 과거로 가도 한참 과거로 퇴행하는 것이요, 명실상부 3류 공안국가로 가는 셈이니, 참으로 나라가 큰일입니다.
문제 핵심은 보수화가 아니라 사병화(私兵化)
이런 일이 과거 10년의 정부에서라면 가능했을까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대통령 한 명 바뀌었을 뿐, 사람도 그대로요 법률도 그대로요 조직도 크게 다른 것 없습니다.
그런데도 과거에 안 하던 일, 혹은 감히 못하던 일을 하게 된 이들 권력기관의 일탈배경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핵심권력의 강압 때문이거나, 해당기관 지휘부의 '알아서 기기'이거나, 체질을 완전히 못 바꾼 기관별 못된 속성의 부활로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맨 앞의 핵심권력 강압부분에 대해선 체념을 하고 있기에 논의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만취한 권력, 혹은 초조한 권력은 그런 저급한 유혹에 쉽사리 빠지기 마련입니다.
심각한 건 뒤의 두 가지입니다. 대통령 한 사람 바뀌었다고 국가 중추기관의 체질이 바뀌고 근본 꼴이 바뀌어서야 법치(法治)가 아니라 인치(人治)이니, "대통령 입맛에 맞는 권력으로 전락했다"고 비판받는 들 피할 재간이 있겠습니까. 불쾌하게 들리겠지만 권력의 사병(私兵)이 됐다고 욕먹어도 싼 처지입니다.
보수정권으로 바뀌었으니 권력기관도 보수화 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냐고 항변하면 안 됩니다. 선진국 어느 나라에서 정권 바뀌었다고 국가 중추기관들이 이처럼 일제히 춤을 추며 바뀐 행정부 입맛에 맞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가요.
행정부 수장이 바뀌었다고 이전 정부 흔적을 지우는 부박(浮薄)한 일에 주요 기관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하는 사례를 선진국 어느 나라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의 현상은 권력기관의 보수화가 아니라 사병화(私兵化)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 맞습니다.
지난 정부 10년에 대해 이리저리 말이 많아도 두 전직 대통령은 권력기관을 정치보복에 함부로 동원한 일이 없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 후 내내 가까운 분들로부터 짜증스럽도록 많이 들었던 충고는 "왜 권력기관들을 장악하지 않고 방치하느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리 하지 않은 것은 그들 기관이 대통령이나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본연의 소임이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모멸감을 느낄 만큼 불쾌한 일은 물론 불편한 일도 많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본인은 물론 참모들로 하여금 결코 금도를 넘지 않도록 절제했습니다.
권력기관 제자리 찾기는 그만큼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다다른 소중한 민주주의의 진일보였습니다.
악순환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을 통해 도출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대통령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권력을 지키기 위해 기관들이 동원된다면 그 오점은 고스란히 역사의 단죄를 받기 마련입니다.
미래의 단죄에 대해 현재의 정치권력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지금 전성시대를 만난 듯한 권력기관들은 한결 같이 과거의 불행을 안고 있습니다. 그 불행을 털어내는 과정에서 기관 내에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런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랍니다. 가급적 그런 단죄 과정이 없는 상황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런 단죄 과정이 없더라도 자칫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순식간에 정치권력의 입맛에 맞게 순응하는 권력기관의 모습은 다음 정치권력으로 하여금 또 다시 장악의 유혹, 통제의 유혹을 느끼게 합니다. 만만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권력기관의 속성이 매저키즘의 길로 접어드는 첫 발입니다. 사병화(私兵化)의 악순환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권력기관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스스로의 현 주소를 냉정하게 돌아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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