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의 외부를 꿈꾸어 본 적이 있나요?
삶의 외부를 꿈꾼다는 것은 여행이나 성공 혹은 버킷 리스트의 실현과 같은 단순한 욕망을 넘어서서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체계와는 전혀 다른 낯선 삶으로의 접속이겠지요.
우리들은 환타지를 통해 그것을 욕망하기도 하지만 실제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은 드물지요.
그만큼 체계적 삶의 관습에 익숙해 있기도 하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순응해 살아가는 것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일상이든 혁명이든 보이지 않는 절대 정신에 의해서 역사 발전은 끊임없이 한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고
일찍이 헤겔이 결정론적 역사관을 이야기 했었습니다.
헤겔에 따르면 삶의 외부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후쿠야마 이후 자본주의는 버전을 달리하며 끊임없이 한 곳을 향해
직선으로 치달아 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미래에도 자본주의는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전혀 이질적인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수 있을까요?
역사의 진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봉준호 감독은 영화 <설국 열차>에서
새로운 세상을 설정하고 그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통해 상징적인 메시지를 던집니다.
자, 그럼 설국열차를 타고 그 곳은 어떤 세상인지 함께 가 보시겠습니까?
멀지 않은 미래에 세상은 새로운 빙하기가 시작되었고 생존하기 위해 설국열차에 무임승차한 하류 계층의 꼬리 칸은
빈민굴처럼 지저분하고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을 매 끼니로 먹으며 생명만 부지하고 살아가는 처참한 곳입니다.
설국열차의 절대 권력자 윌 포드와 지배집단은 점호를 통해 그들을 관리하고 공포를 심어 줌으로써 체제를 유지합니다.
미리 점지되어 있는 각자의 정해진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여자 총리의 입을 통해 꼬리 칸 사람들을 훈육합니다.
하지만 꼬리 칸의 지도자 커티스를 중심으로 꼬리 칸 사람들이 윌 포드의 폭정과 독재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며 앞칸으로 전진해 가지요.
그렇게 드러나는 설국 열차의 각 칸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그들이 향유하는 문화를 환유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로 다음 칸으로 올라가면 정원과 맛있는 요리가 있고 음악이 흐르는 세상이 드러납니다.
당연히 그들은 평온한 표정으로 안락한 삶을 향유하고 있지요.
다음 칸에서 바닷속 세상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스시바가 등장합니다.
스시 요리는 1년에 2번만 제공되는데,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윌 포드의 의지입니다.
균형을 위한 유지하기 위한 통제는 인간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요.
스시바를 지나면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교실이 나옵니다.
그곳에는 가면 – 윌 포드에 의해 훈육되어지는 페르조나를 상징 –을 쓴 아이들이 윌 포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영원히 순환하는 천국을 만들고자 설국열차를 설계한 윌 포드의 설립 의지가 드러난 비디오가 상영되기도 합니다.
엔진 칸 바로 아래 맨 윗칸에는 향락에 젖어 환각파티를 즐기는 젊은 남녀들이 나옵니다.
봉준호 감독은 자본주의 마지막 양상을 이렇게 예견하고 있는 것일까요...
술과 마약에 빠져 쾌락만을 추구하는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의 징후를 질타하고 있는 것일까요
꼬리칸 사람들이 앞칸으로 전진하는 과정에는 유혈이 낭자한 전투가 벌어지곤 하는데요...
지배 집단 전투 대원들은 싸우기 직전 Happy new year!를 외치는데, 싸움의 결과가 결국은 인구수를 조정해서
새로운 세상을 해피하게 맞이 하자라는 윌 포드의 구호로 들립니다.
전투 장면의 압권은 빛이 없는 터널에서 벌어지는 액션 씬입니다.
적외선을 통해 볼 수 있는 지배 집단 대원들과 그렇지 않은 꼬리 칸 사람들 간의 일방적 싸움의 형태는
‘시선이 권력이다’ 라는 알레고리로 읽힙니다.
이러한 비대칭적 투쟁에 어둠을 몰아내는 횟불의 등장은 새로운 역사를 희망하는
민초들의 열정일 것이고 변혁의 무기가 됩니다.
한편 꼬리 칸의 정신적 지도자 길리엄은 혁명 도중 이제 피를 씻고 여기서 멈출 것을 제안하는데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자신의 목표는 열차의 엔진(권력)을 장악하고 윌 포드를 제거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합니다.
길리엄의 이러한 태도는 영화 마지막 반전 부분과 연결되어 있고,
커티스의 욕망 또한 직선으로 표상되어지는 열차의 속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커티스가 새로운 윌포드가 된다면 세상은 하나도 바뀌지 않는 셈이지요...
설국 열차의 칸은 그대로 나뉘어져 있고 그것을 유지하는 시스템에 변화가 없다면 말입니다.
커티스의 혁명적 행동도 결국은 윌 포드와 길리엄의 음모(균형을 위해 인구수를 조정해야 하고
혁명을 자연스럽게 일으키게 조정하여 대규모 살상을 유도함)에 의해 디자인된 것이 밝혀집니다.
존재의 부름에 존재자가 응답을 하면서 건너온다는 하이데거의 존재 철학이 떠 오릅니다.
하이데거는 독일민족이 처한 역사 공간에서 히틀러가 민족적 부름을 받고 나타난 것이라고
나치즘을 그의 ‘존재 –존재자론’으로 옹호하기도 했었지요.
설국열차에서 존재는 영원히 멈추지 않는 엔진과 체제 유지이고 존재자는 커티스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역사 발전이란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성의 간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갈파했던 헤겔의 말이 떠 오르며 씁쓸해졌습니다.
설국열차의 설계자인 남궁 민수(송강호 분)는 설국 열차의 엔진 칸으로 가는 대신 자신들을 둘러 싼 벽을 부수는 것이
새로운 문(새로운 출구)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윌 포드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기차 바깥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 되겠지만, 기차 바깥의 세상에서
눈이 녹는 징후(사람이 살 수 있는 곳)를 발견한 남궁 민수는 결국 자신의 삶의 외부를 꿈꾸게 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설국 열차의 탈주는 설국 열차 내부에서 비롯된 폭발 보다는 외부에서 밀려 온
산사태에 의해 이루어 지는데, 이 부분에서 봉준호 감독의 의도가 궁금해졌습니다.
외부를 꿈꾸는 혁명은 외부의 힘에서 비롯되어진다는 이 쓸쓸한 결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