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처럼 화사한 아가씨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서울 북녘의 순환고속도로 주변은 향기로 가득 차있다. 제법 서늘한 공기에도 불구하고, 차창을 활짝 연 채로 달려본다. 밖으로 내민 손에는 향에 젖은 공기가 부딪힌다. 가야 할 목적지가 있으면서도 그냥 이렇게 달리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다. 잡스러운 어느 생각도 마음에 일지 않는다. 마냥 평화롭고 좋기만 하다. 아카시아 향 때문이다.
5월이다. 어느새 이렇게 되어버렸다. 온 세상은 연록으로 가득해졌다. 새로 돋은 잎이 꽃보다 아름답다더니 볼수록 그렇다. 4월의 봄꽃이 화사한 줄 뉘 모르겠는가. 그 빛과 향은 마른 장작에도 생기를 부를 만하다. 그저 벚꽃 아래에 서면 색정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산에 진달래, 들에 개나리와 더불어서 말이다. 그러함에도 그림보다 더 고운 4월의 꽃보다 5월의 푸르름이 더욱 좋다는 데 굳이 저항을 못하겠다.
신록이 예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익숙하게 알고 있다. 그 신록마냥 싱그러운 시절에 좁은 공간에서 읽어야 했던 글이다. 힘을 들여 그 내용을 들추어낼 필요도 없이, 5월은 참으로 싱그럽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생명력이 느껴진다. 세상 모두가 푸르다. 그 연초록에서 내품는 산소마저 맑디맑다. 마냥 들여 마시고만 싶어도 숨이 짧아 한이다. 아무리 쳐다보아도 질리지 않고, 그저 사랑스러울 따름이다.
새 잎에 어찌 향이 없으랴. 허나 나뭇잎에서 향을 찾는 것은 무리다. 4월의 꽃보다 더 좋다 하더라도, 어찌 향으로 견주었을까. 4월의 꽃향이 아무리 은은하다지만 5월의 잎과는 단순하게 나란히 세울 수 없다. 그러나 5월의 향은 4월보다 더욱 진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순전히 아카시아 때문이다. 모든 나무가 새 잎으로 뒤덮일 때에 주렁주렁 아니 덕지덕지 매달린 하얀 아카시아 꽃의 향기는 꽃향의 표본이다.
아카시아가 5월 향기의 주인이 된 것은 산림녹화의 탓이다. 그 주도자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철이 들기 전부터 익숙해졌던 터라 이젠 향수를 자아내는 데에 미쳐 있다. 정치적인 생각과 감정을 무시해버리고, 그 향수의 일단을 만든 의도만이라도 떼어 보려 애를 쓴다. 아카시아 향기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순수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거름을 낸다, 못자리를 한다 하는 바쁜 시기에 지금의 나보다 어렸을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과 함께 나무를 심으러 가셨다. 지게 바작에 30센티가 될까 하는 어린 아카시아 나무 다발을 가득 얹고서, 모두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서툰 글씨로 ‘산 림 녹 화’라는 구호들이 적지아니 서 있었다. 그 나무들이 자라고 자라서 이렇게 5월이 되면 그 어릴 적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눈송이처럼 날린다는 동요의 가사가 더욱 그렇게 만들었다. 과수원 길가에는 아카시아가 잔뜩 심어져 있었겠다. 어림잡아도 과수와 아카시아는 같은 시기에 심어졌을 것이다. 60년대 말이나 70년대 초이다. 떨어지는 꽃잎을 눈에 비유하자면 벚꽃이 제격이다. 언뜻 일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벚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장면은 눈(眼)에게만은 흩날리는 흰 눈과 흡사하다. 그런데도 아카시아 향기에는 한적한 고향의 과수원 길이 담겨 있다. 그래서 어린 친구들이 그리워지고, 뻐꾸기 한가히 울어대는 맑은 5월이 떠올라 서글퍼진다. 그리운 옛날의 그 얘기를 다시 듣고 싶어서다.
싱그러움 속에 향을 더하는 아카시아에는 나에게 향과 막연한 추억 이상의 ‘그 얘기’가 잔뜩 담겨 있다. 대대로 향토적인 생활을 이어오는 시골에서 아들을 도회지에 유학보내기는 쉽지 않았다. 작은 개울을 거슬러 한참을 올라가면 선산에 할아버지들이 여전히 계시고, 그분들이 짓다 물려주신 논과 밭들이 여기저기 제법 널려 있었다. 할아버지도 그 논밭을 갈아 사셨고, 아버지도 역시 그렇게 사시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결심을 하셨는지 교육에 집착을 보이셨다. 우선 그 대상이 나였다. 국민학생인 나는 서울로 유학을 하기에 이르렀다. 어린 나이에 낯선 도회지에서 생활해야 하는 나의 어려움은 그렇다 치고, 그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지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다. 그것이 양봉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은 한편으로 논밭을 갈면서, 더욱 많은 시간을 벌에 매달리셨다. 상당히 많은 양의 벌통이었다. 일하는 사람을 몇 고용해서 쓰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주요한 사업이 되어버렸다.
해마다 설을 쇠고 나면, 이엉으로 싸두었던 벌통을 꺼내 싣고 제주도로 가셨다. 일찍 핀 유채꽃으로 꿀은 물론이거니와 벌의 새끼를 치게 해서 될 수 있는 한 수를 늘렸다. 그 늘어난 벌은 곧 아카시아 꽃이 피는 시기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제주도에서 남해변 어느 지역으로 옮겨 머무르다 아카시아 꽃을 따라 북으로 북으로 올라오셨다. 충청도는 잘 모르고, 경기도 수원 근처의 비봉이나 파주의 광탄 등의 지명은 아주 익숙히 알게 되었다. 그렇게 얻어진 아카시아 꿀은 돈으로 바뀌어 고스란히 내 교육비용으로 쓰였다.
그래서 나는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며 마냥 자연과 낭만만을 얘기하기 어렵다. 고향의 과수원 길에서 같이 뛰놀던 순이 생각에 머물러 한가한 표정으로 옛 생각에 취해 담배만을 즐길 수 없다. 자연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 이내 세월의 탓으로 옮겨질 것은 정해진 길이고, 허무니 무상이니 해도 어디 끝이 나겠는가.
아카시아 향이 참 좋다. 밤이면 더욱 그렇다. 해가 지면 바람이 산에서 밑으로 불어오는지 어둠 속에서 아카시아 향기는 손에 묻을 듯 농도가 진하다. 그 향은 간색의 어여쁜 옷을 입은 선녀를 데려다줄 뿐만 아니다. 제 먹으러 가져온 꿀을 사람에게 빼앗겨 분노의 침을 곤두세우고 떼를 지어 덤벼드는 벌들, 비지땀을 흘리며 꿀을 빼앗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일꾼들, 며칠 걸러 반복되는 벌레와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역동감이 또한 전해온다. 그 아수라 전쟁 중에도 멀리서 하루 종일 울어대는 뻐꾸기는 깨끗한 5월 햇살에 완곡한 파문을 지어주었다.
아카시아 꽃이 이렇게 지천으로 피어났는데, 그 전쟁의 주인공들은 보이지 않는다. 계절은 바퀴이고, 삶은 차체이다. 계절이 돌고 돌며 늙어간다. 어머니는 환갑을 지내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다. 의욕을 잃은 아버지는 모든 일손을 놓아버리셨다. 그 많던 벌들도 다 날아 가버렸다. 그때 난 대학원 석사 졸업을 앞두었으니 …….
나이가 들면서 가끔, 이렇게 아카시아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은 상황에 부딪히면 새삼스럽게 ‘사는 게 뭔지’하는 생각이 절로 인다. 나에게 왜 그렇게들 하셨는지, 지금의 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리벙벙하다. 그 전쟁의 수확물로 학교를 다녔는데 무엇을 배우고 익혔는지 잘 모르겠다. 세상은 배우고 뜻하는 대로 되지 않고, 그냥 제멋대로 간다. 어떤 의무감을 가져야 될 것 같은데, 그 꺼리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하찮은 효도도 할 데가 없고, 내리 사랑이라 했으니 받은 것처럼 아들 녀석에게 하려 해도, 요즘은 이놈이 더 어른스럽다. 덩그러니 혼자 남아 외로움이 커진다.
삶은 산다고 여겼는데, 살아진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끌리며 밀리며 살아진다. 힘이 남아 있고 열정도 제법 쓸 만한데, 왜 마음먹고 찾은 의무감이 덧없이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그저 막대기 하나 들고 저기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 구멍에 공넣기의 횟수를 줄이는 게 분출구일 따름이다.
아카시아가 한창이다. 그 화려한 철쭉도 시들고 있다. 이팝나무(쌀밥나무)도 하얗게 꽃을 피웠다. 순백의 이팝꽃은 슬픈 사연을 안고 있다. 나와는 거리가 있는 그 어렵던 옛날을 떠올린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카시아꽃이 더 슬프고, 또 정겹게 다가온다. 아카시아 꽃잎이 눈송이처럼 날리는 과수원 길에서 같이 놀던 순이도 그립다. 싱그러운 5월 햇살 속에서 뻐꾸기 울움소리가 어울려 들리는 듯하다. 그리운 옛날의 그 얘기를 다시 들려주려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리운 옛날의 얘기를 들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서럽고 또 외롭다. 그런데 들어서 무엇하랴! 소쩍새가 젖을 달라고 울어댄다. ‘젖줘! 젖줘! 젖줘!’
하모니카연주 - 글과 어울릴 듯 싶어서 첨부합니다... 혹, 맘에 안들면 쪽지 주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