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두려다 김원기가 지은 글 제목의 2탄이 될 듯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립니다. 심심풀이입니다.)
며칠 전 더위가 이제 가리라고 여겼다. 몇 십 년을 산 대수롭지 않은 경험에서 말미암은 예측이다. 유난히 심하다던 무더위 속에서 가을을 느꼈었다. 반가움보다는 기세가 꺾이는 여름이 아쉬웠다. 그래서 마음을 달래려고 집을 나섰다. 가는 비가 보였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로 향했다. 아들 녀석을 옆에 태우고서다. 돌아와 누운 지금 온 밤을 떠들던 매미소리는 들리지 않고, 귀뚜라미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온다. 제법 서늘한 바람이 창으로 밀려온다.
올여름은 정말 더웠다. 당연히 더워야 하는 여름인데도 더위로 인한 고통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장마는 오는 듯하더니 이렇다 할 비는 뿌리지 않고 이내 없어져버렸다. 마른 햇빛에 몸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까지 열기에 시달렸다. 아들 녀석과의 갈등 때문이다. 가고자 하는 대학에 들어가서 그에 관한 시름을 다 놓아버렸더니, 한 학기가 지나고 난 뒤의 소식이 학사경고란다. 학교에 전혀 가지 않았단다.
부화를 억누르며, 알바를 빌미로 내 근무처에 출근을 명했다. 망가진 일상의 리듬을 교정해주려는 의도에서다. 그러나 이 또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밤새 컴퓨터다 뭐다 꼼지락거리다보니 아침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고, 출근 자체가 엄청난 일이 되어버렸다. 난 일찍 다른 데를 들렀다 가야 했으므로 같이 갈 수는 없고, 점심을 먹은 뒤에서야 그 놈의 출근여부를 확인하였다. 참으로 고통이었다. 대부분 나오지 못했다.
어수선한 날이 계속되었다. 이리저리 핑계는 그럴 듯하지만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문제가 심각해졌다. 그런 만큼 거북한 감정이 담긴 말이 많아지고, 사이는 더욱 어색해졌다. 그 놈에게 온 신경이 집중되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기조차 힘들었다. 짧은 기간에 벌어진 일이다.
날이 더워 몸이 부대끼는데, 마음까지 화기로 가득 차올라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몸과 마음의 안정이 모두 깨져버렸다. 마음상태가 중요하다던 공치기에도 영향을 크게 끼쳤다. 투온을 하려고 자세를 잡으면 그 놈이 출근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집중이 되지 않았다. 퍼팅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옆에 앉은 아가씨에게 건네는 농담도 생기를 잃었다.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흥미도 줄어들었다.
7월 말쯤 그 놈의 성적표가 날아들었다. 받아든 순간 참고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였다. 들었던 것보다 심각했다. 앞서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에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불러세우고, ‘TOUCH'를 시작했다.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입에서는 험한 말이 계속 되고, 손은 말의 중간중간 리듬을 맞췄다. 왼쪽 오른쪽 번갈아가며 딱딱한 머리통을 북처럼 두드렸다. 내부의 압력이 센 터라 상당한 힘이 나왔다. 거의 애국가 4절 분량의 가사에 그 쉼표마다 북을 쳤으니 꽤 맞은 셈이다. 현관의 두꺼운 유리창도 박살났다. ‘ROUGH TOUCH’였다. 그 놈은 가만히 서서 흔들리지 않았다. 화기가 좀 빠졌다 싶을 무렵 내심 너무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를 집어 들고 문을 나섰다. 억지로 화를 식히려 이리저리 배회했다. 날은 왜 그리 더운지. 앉아도 보고, 걷기도 해보아도 그 더위 때문에 오히려 화가 더욱 부풀어 올랐다. 담배를 몇 개나 피웠는지 모른다. 매미소리는 귓가에 쟁쟁하게 약을 올렸다.
역시 더위 속에서는 화를 녹일 수 없었다. 그 동안 그 녀석 때문에 참았던 화의 꺼리들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뚜껑이 열렸다. 삐질삐질 흘러나온 땀은 불쾌하기 짝이 없고, 매미는 여기저기서 놀래대니 열렸다기보다는 튀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골프채가 어른거렸다.
방 한쪽 구석에 쳐박힌 낡은 골프채만을 생각하며 다시 집으로 뛰쳐들어갔다. 그리고 더 큰 소리의 애국가가 시작되었다. 수도의 덕택인지 그 와중에도 채는 쓰지 않았다. 맞겠다고 엉덩이를 들이미는 데도 손만을 거칠게 썼다. ‘HEAVY ROUGH TOUCH' 였다. 마음으로만 꼼지락거리던 감정의 모두를 말로 뱉어냈다. 역시 리듬을 타며 머리통을 두드렸다. 한참을 그랬다. 아마 교가까지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서 집을 나섰다. 들어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몇 시간이 지나 아무 말도 없이 광란의 언행을 지켜보았던 마누라한테 전화가 왔다. 제발 집에 들어오란다. 아직 화가 덜 풀려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 놈도 죄송하다 하고는 집을 나갔단다. 사내 두 놈이 집을 나가니 여자 하나는 놀라기도 했나보다. 아니 허전했을 것이다.
불편한 마음으로 며칠을 밖에서 보냈다. 그 놈도 며칠 째 들어오지 않는단다. 마누라는 애걸복걸이다. 그 더위 때문에 화도 쉽게 식지를 않는다. 간혹 이 나이에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혼자 남은 여자는 전화기 문자로 간간히 그 놈의 소식을 전했다. 그 동안 삼척 죽서루, 망상 해수욕장, 월정사와 상원사 등지와 오지의 계곡을 떠돌았다. 빼어난 경치, 햇빛 내리쏟는 젊음의 바닷가, 시원한 계곡으로 몸을 옮겨도 마음은 참으로 허전했다.
모든 부모들이 겪어야 하는 절차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성장과정을 되돌아보게 된다. 부모님이 한없이 그리웠다. 그러다가 내가 그 아버지 나이에 이르렀고, 아들놈은 천방지축 내가 되어 나타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것이 인생이겠거니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해도, 서럽고 외로웠다. 세월의 가닥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러나 저러나 인생살이 참.
10여 일이 지나 마누라의 노력으로 아들놈과 마주했다. 역시 더웠다. 그늘을 찾아 나무 아래 앉았어도 더위와 매미소리는 같았다. 몇 시간 동안 무거운 얘기를 나눴다. 그 순간을 너무 소중하다 느낄 정도로 감정은 다소 누그러졌다. 손은 가만히 둔 채 입만 움직였다. 그 놈도 여러 날 도를 닦았는지 더욱 어른스럽게 여겨졌다. 해명, 변명, 사과를 번갈아 하며 마음을 보여주었다. 그 놈도 그랬다. 오늘 아빠가 인간적이어서 좋단다. 난 속으로 ‘이제 네 인생 네가 살아라. 내가 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온 정성을 다해 키워낸 새끼가 날아가고, 바짝 마른 몸으로 서럽게 울던 노랑할미새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 그 놈이 하는 말이, 아빠와 계곡에 발을 담그고 얘기를 나누고 싶단다. 말이 나온 김에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하룻밤을 보낼 요량으로 몇 가지 챙겨서 급하게 집을 나섰다. 마누라는 집에 남겼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음악을 들으며 빗속을 달리는 게 좋았다. 얘기를 나누는 모양새도 도란도란해졌다. 어른이 된 모습이 괜찮아보였다.
냉면을 같이 먹고, 빗길을 달려 바닷가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 비를 맞으며 백사장을 거닐었다. 제법 굵은 빗방울의 촉감이 좋았다. 금강산 신선봉 아래 도원 계곡에 발을 담갔다. 열심히 살겠단다. (난 이제 너를 잊고 내 할 일만 할란다. 고맙다.) 긴 시간 운전이 힘들지 않느냐며 어깨를 주무른다. 'FAIR TOUCH' 다. 그 시원함이야.
집에 돌아와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귀뚜라미 소리가 처량하다. 빗소리가 들린다. 새벽이 오나보다. 가을가운이 스며들어온다. 그 무덥던 여름이 이렇게 간다. 이번 여름은 진짜 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