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정호승 <수선화에게> 중에서
수업중에 맹렬하게 전화벨이 울린다.
수업중에 교사의 핸드폰이 울리는 것도 결례인지라 미안한 표정을 짓고 핸드폰을 급히 끄려고 하는데
회준이라는 발신자 표시가 눈에 확 들어온다.
늘 위태로운 스토리를 안고 살아가는 회준이에게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기에 문득 불길한 마음이 들어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는데 하이톤의 회준 목소리 대신 착 가라앉은 모기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죽기 전에 보자 / 뭔 이야기 하는거야 / 죽기 전에 보자구 / 누가 죽어... 무슨 이야기야/
나 며칠 전에 뇌출혈로 쓰러졌어/ 뭐... 뭐라고 뇌출혈...이런... 야 지금 수업 중이니깐 이따 전화해 / 알았어
수업을 하고 나서 전화를 하려고 보니 원기에게 문자가 와 있다.
정회준이 쓰러져 한림대 병원에 입원중이니 같이 병문안 가자는 내용이었다.
먹먹해 진다. 뭐야 씨발 뇌출혈이라니...어떻게 된거지...괜찮은 걸까...걱정이 앞선다.
허둥지둥 수업을 마치고 평촌에 있는 한림대 병원을 향했다.
마음이 급해서 였는지 약속시간보다 20분 정도 일찍 가는데 평촌역 출구 에스컬레이터 옆에서 원기를 만났다.
곧이어 주동이도 왔다.
우리는 벤취에 앉아 대책회의(?)를 했다.
뇌출혈이라는데 그래도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위기는 넘긴 것 같다..,
하지만 부작용으로 마비증세가 올지도 모른다...
요즘은 3시간 전에 응급 조치를 취하면 의학이 발달해서 완치할 수 있다...
회준이가 갑자기 쿵하고 쓰러졌다는데 이건 어떤 증상일까...
뭐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주동이가 통화 내용을 복기하면서 회준이 와이프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라고 했는데 그 의도가 궁금하다고 한다.
뭐지 와이프가 우리에게 무슨 선포라도 하는 것 아닌가...
다들 회준이랑 밤 늦게까지 술 마신 전력이 많은 터라 혹시 그게 뇌출혈에 영향을 미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누군가는 교묘한 알리바이를 내세우며 자신의 행적은 아마 관계 없을꺼라 이야기 하다 핀잔을 받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는 회준이가 입원해 있는 716호실을 찾았고 회준이는 저녁 식사중이었다.
아내와 큰 아들 한글이가 간호를 하고 있는 게 한 눈에 들어온다.
병실인데도 화목하고 단란해 보인다.
회준아 재식이야 누군지 알지... 괜히 너스레를 떤다.
회준이는 흐릿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손을 꼬옥 잡는다.
와이프와 인사를 나누고 와이프에게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와이프가 차 와이퍼를 고치고 집에 들어 서는데 남편이 반갑게 맞이하러 나오다 느닷없이 쿵하고 쓰러지더니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단다.
깨어도 의식을 못차리기에 119를 불렀고 응급조치를 취하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넘어질 때 충격으로 뇌에 출혈이 있어 뇌혈전 용해제를 맞고 각종 검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하루만에 중환자실에서 나와 안정을 취하고 있던 터였다.
뇌혈관이 터진 것은 아니었고 큰 수술을 하지 않고 안정을 취하면 될 것 같다는 와이프의 말에
우리는 이 기회에 학교 걱정은 하지 말고 몸조리 잘하며 푹 쉬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뒤늦게 도착한 승필이는 하나님이 싸인을 보낸 것이니 오히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영적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회준이 목소리는 힘없이 가라앉아 있었지만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낭송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회준이 상태는 ‘정상 판정’이라는 꽤 심도있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저녁 먹으러 간다는 말에 따라 나와 딱 한잔 하고 싶다는 위험한 센텐스를 날리는
바람에 저게 부작용의 징후인지 아니면 벌써 철없는 회준 스타일로 복귀한 것인지 헷갈렸다.
아무튼 우리는 걱정했던 것 보다 상태가 좋아 안도했고 덕분에 이렇게 평촌에서 만나서
술 한잔 할 수 있게 되었다며 호방하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저녁 겸 반주로 소주 한잔을 하는데 주동이와 정천이가 통화가 되었는데,
뒤늦게 회준 소식을 알게 된 정천이는 제환이와 규명이 그리고 마이애미 수철이와 함께 병문안을 갔다가 우리랑 합류했다.
까칠한 턱수염의 규명이는 회준이에게 까칠하게 별거 아니니깐 걱정하지 말라고 통 크게 이야기 하고 왔단다.
하긴 당뇨로 몸이 반쪽이 된 규명이는 인생 별거 아니라는 듯한 달관의 경지로 껄껄껄 웃으면서 호프를 마신다.
배가 폼나게 나와 무슨 무슨 조직의 보스같은 수철이는 슈퍼 볼 결승전 특석은 3만불이라는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눈하나 깜짝 안하고 한다. 미국이 뭐 원래 그런 나라라고 한다.
제환이 자식은 나만 보고 바보라고 호명하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응답해 준다.
바보는 대학 시절 별명 (사실은 우울한 천재였는데 제환이는 바보로 기억)이었는데 지금은 애칭인셈이다.
건실한 인생관을 소지한 정천이가 그만 가라고 종례를 하는 바람에 다소 이른 시간에
우리는 평촌에서의 오랜만의 만남을 건실하게 마무리 지었다.
하긴 친구 병문안 와서 불타는 향연을 즐길 수는 없는 법.
이제사 생각해 보면 회준이가 외로워서 우리들을 불렀지만 결국 지천명의 외로운 친구들끼리
만나 외로움을 이겨내는 자리를 마련해 준 셈이다.
회준이가 보름전에 아내와 관계가 좋아졌다는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이 입원을 계기로
단란한 가족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팍팍 밀려온다.
회준 화이링~